고대 이집트 건축


기자 대 피라미드, 기원전 2589-2566년 경. via Wikimedia Commons
카르나크 신전 다주식 홀의 기둥, 기원전 1294-1213년 경. via Wikimedia Commons
필레의 이시스 신전, 기원전 380-서기 117년 경. via Wikimedia Commons

2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대 이집트는 하나의 안정된 문명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에 의해 시대가 구분되는 끊임없는 변화와 격변 속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대 이집트 건축도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 여러 양식의 집합이다.

고대 이집트 건축의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이집트 피라미드이며, 발굴된 신전, 궁전, 무덤, 요새 등도 연구되고 있다. 대부분의 건물은 부역 노동자들에 의해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진흙벽돌과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기둥-인방 공법을 통해 지어졌다. 많은 건물이 천문학적으로 정렬되었다. 기둥은 전형적으로 파피루스 식물처럼 이집트 문명에 중요한 식물을 닮은 주두(柱頭)로 장식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건축적 모티브는 다른 곳의 건축에 영향을 미쳤으며, 처음에는 동방화 시기 동안 그리고 다시 19세기 이집토마니아1 기간 동안 더 넓은 세계로 확산되었다.


특징

재료 및 시공 방법

목재가 부족하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두 가지 지배적인 건축 자재는 햇볕에 구운 진흙벽돌과 석재(주로 라임스톤; 석회암)이었으며, 사암과 화강암도 상당량 사용되었다. 고(古)왕국 이후 돌은 일반적으로 무덤과 신전을 위해 따로 보관되었고, 벽돌은 왕궁, 요새, 신전 경내 및 마을의 담장, 신전 단지의 부속 건물에도 사용되었다. 피라미드의 중심부는 현지에서 채석한 돌, 진흙벽돌, 모래 또는 자갈로 구성되었다. 케이싱(피복)에는 주로 투라 지역의 흰 석회암과 상(上) 이집트의 붉은 화강암 등 더 먼 곳에서 운반해야 하는 돌들이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주택은 나일강의 눅눅한 제방에서 채취한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진흙은 거푸집에 넣고 뜨거운 햇볕에 말려서 건설 공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굳혀졌다. 만약 벽돌이 피라미드와 같은 왕의 무덤에 사용되도록 의도된 경우, 외부 벽돌은 정교하게 다듬고 연마된다.

많은 이집트 소도시들이 사라진 이유는 나일 계곡의 경작지 근처에 위치하여 수천 년 동안 강바닥이 서서히 상승하면서 침수되거나 농부들이 진흙벽돌을 비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들은 새로운 건축물이 고대 건축물 위에 세워져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건조하고 더운 기후 덕분에 일부 진흙 벽돌 구조물이 보존되었다. 예를 들면 카훈에 있는 이집트 중왕국 소도시인 데이르 알-마디나 마을, 그리고 부헨과 미르기사에 있는 요새가 있다. 또한, 많은 신전과 무덤이 나일강 홍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높은 지대에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와 같이, 고대 이집트 건축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주로 종교적 기념물들, 아마도 진흙벽에서 안정성을 얻기 위해 사용된 공법을 반영하여 개구부가 거의 없으며 두껍고 경사진 벽으로 특징지어지는 거대 구조물에 기반을 두고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석조 건물의  절개되고 평평하게 모델링된 표면 장식은 진흙벽 장식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아치의 사용이 제4왕조 동안에 개발되었지만, 모든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기둥과 인방 구조로 되어 있으며, 평평한 지붕은 외벽과 좁은 간격의 기둥에 의해 지지되는 거대한 석재 블록으로 건설되었다.

필레의 이시스 신전에 있는 잘 보존된 최초의 탑문으로, 신전 단지의 기념비적인 관문 역할을 한다. via Wikimedia Commons
메디넷 하부 신전 단지의 카베토(단면이 네 개의 원으로 된 윤곽을 만드는 오목한 쇠시리)에 날개 달린 태양. 날개 달린 태양은 이시스의 아들인 매의 신 호루스가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이미지는 신전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호 장치이기도 하다. via Wikimedia Commons

장식 및 모티브

기둥과 교각뿐 아니라 외벽과 내벽은 화려한 생삭으로 칠해진 상형문자와 프레스코화 그리고 조각들로 덮여 있었다. 이집트 장식의 많은 모티브들은 풍뎅이, 신성한 딱정벌래, 태양 원반, 독수리처럼 상징적인 것들이다. 다른 일반적인 모티브로는 야자수 잎, 파피루스 식물, 연꽃의 꽃봉오리와 꽃이 있다. 상형문자는 장식적인 목적에 더해 역사적 사건이나 주문을 기록하기 위해 새겨졌다. 또한 이러한 프레스코화와 조각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 방식, 지위, 전쟁 및 그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고대 이집트 관리들의 무덤을 탐험하던 최근에 특히 그러했다.

고대 이집트 신전은 지점(하지, 동지)과 분점(춘분, 추분) 같은 천문학적으로 중요한 이벤트들과 맞춰 조정되어야 했기 때문에, 특정 이벤트의 순간에 정확한 측정이 필요했다. 가장 중요한 신전의 측정은 파라오가 직접 의식(儀式)적으로 수행했을지도 모른다.

기둥

기원전 2600년대 초에 건축가 임호텝은 파피루스, 연꽃, 야자나무 같은 갈대 다발의 유기적 형태를 반영하기 위해 석조 기둥의 표면을 조각하여 사용했고, 이후 이집트 건축에서는 다각 기둥도 흔히 사용되었다. 그것들의 형태는 고대의 갈대로 지은 사당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돌로 조각된 기둥은 상형문자, 글, 의식 이미지, 자연 모티브로 조각되고 그려져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집트 기둥은 카르나크의 대(大) 다주실(多柱室; 하이포스타일 홀)(기원전 1224년경)에 있는 것이 유명하며, 134개의 기둥이 16열로 정렬되어 있고 일부 기둥들은 높이가 24m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유형 중 하나는 파피리폼 기둥이다. 이 기둥의 기원은 제5왕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들은 띠로 장식된 다발로 함께 그려진 연꽃(파피루스) 줄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두(柱頭)는, 초롱꽃 모양으로 펼쳐지는 대신 꽃봉오리처럼 부풀었다가 다시 좁아진다. 주초(柱礎)는, 연꽃 줄기처럼 반구 형태를 취하기 위해 점점 가늘어지고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턱잎 장식이 있다. 룩소르 신전에서, 기둥들은 파피루스 다발을 연상시키며, 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세계의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늪지를 연상케 한다.

파피리폼 주두의 장식 문법 삽화. via Wikimedia Commons
룩소르 신전의 파피리폼 기둥. via Wikimedia Commons

정원

중앙 정원을 둘러싼 그늘진 나무 숲으로 구성된 테베의 무덤에서 나온 메케트라의 집과 정원 모형, 기원전 1981-1975년 경.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via Wikimedia Commons

고대 이집트에는 신전 정원, 개인 정원, 채원 등 세 가지 유형의 정원이 있었다는 것으로 확인된다. 데이르 엘-바흐리와 같은 일부 신전에는 숲과 나무, 특히 신성한 이세트 나무(페르세아)가 제공되었다. 개인 휴양원은 메케트라의 제11왕조 무덤 모델과 신왕국의 무덤 장식으로부터 잘 알려져 있다. 그것들은 전형적으로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나무와 꽃이 심어져 있으며 차양 구역이 제공되었다. 과일과 향기를 위한 식물이 재배되었다. 꽃에는 수레국화, 양귀비, 데이지가 포함됐고, 신왕국에 도입된 석류는 인기 있는 관목이 되었다. 부유한 개인들의 정원은 물고기, 물새, 수련을 위한 관상용 수영장 주변에 배치되었다. 개인 소유인지 신전 소유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채소밭은 수로로 나뉜 사각형으로 배치되었고, 나일강 근처에 위치했다. 그것들은 수작업으로, 혹은 (제18왕조 후기부터) 샤두프(방아두레박)를 이용하여 관개했다.


고왕국2

석실 분묘

붉은 사암, 분홍색 화강암, 투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솁세스카프 왕이 묻힌 마스타바 알 피라운. via Wikimedia Commons

석실 분묘(마스타바)는 왕실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매장 무덤이다. 이집트 통치자들이 선택한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발견된 많은 무덤들이 나일강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석실 분묘에 관한 구조적 외관은 역사적으로 다양하지만 이집트 왕조의 과정에서 현저하게 발전했다. 이집트 제1왕조의 석실 분묘는 계단식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이 디자인은 발전하여 제4왕조 시대에는 구조적 외관이 벽돌에서 돌로 바뀌었다. 석실 분묘의 계단식 디자인 이면의 추론은 “접근” 개념과 관련이 있다. 무덤을 지을 때는 측면 침투가 문제였다. 구조물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구조물의 기초 주위에 벽돌층이 배치되었다. 고왕국의 석실 분묘는 피라미드 디자인의 구조를 취했다. 이 디자인은 주로 왕과 같은 통치자와 그의 가문을 위한 매장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고왕국의 석실 분묘와 관련된 다른 디자인 특징으로는 직사각형 윤곽, 기울어진 벽, 석재와 벽돌 재료의 사용, 남북으로 이어지는 건물의 축 등이 있다. 석실 분묘의 내부에는 공물실, 죽은 자를 위한 조각상, 그리고 석관을 보관하고 있는 금고와 같은 여러 요소들이 있다. 고왕국이 끝날 무렵, 이들 무덤의 사용이 중단되었다.

사카라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 피라미드, 기원전 2650년 경. via Wikimedia Commons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기념비적인 석조 구조물은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이집트 제3왕조 2대 파라오)의 계단식 피라미드(기원전 2650년경)다. 이 장례 기념물은 건축가 임호텝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피라미드 무덤의 기원을 나타내며 역사상 가장 초기 형태의 기념비 건축이다. 그 디자인은 단순하고 평평한 석실 분묘 무덤을 추가된 여러 층으로 쌓아 각각 아래층보다 작게 만들어 계단 모양의 윤곽을 가진 고가 구조물로 변형시켰다. 이러한 성과는 또한 건축 재료로서 가공된 석재의 새로운 중요성의 전조다.

초기 피라미드 개발

다슈르에 있는 스네프루 굴절형 피라미드, 기원전 2615년 경. via Wikimedia Commons

피라미드 건설의 주요 시기는 새로운 디자인을 실험한 여러 피라미드 건설을 시작한 스네프루(제4왕조 1대 파라오)의 통치 기간인 기원전 264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메이둠에 있는 그의 첫 두 피라미드는 계단식이었는데, 제3왕조 초기와 사카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후 계단식 층 대신 똑바른 표면을 갖춰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이룬 최초의 진정한 피라미드가 탄생하는 중대한 혁신이 이어졌다. 첫 번째 시도는 건설 도중에 구조물의 무게로 붕괴될 위험에 처했을 때 측면의 각도를 줄였기 때문에 나중에 굴절형 피라미드로 알려졌다. 두 번째이자 성공한 시도는 붉은 피라미드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두 피라미드 모두 다흐슈르에 있다. 이 시기에는 피라미드의 형태 외에도 무덤 방의 배치에 있어서도 장식 기법의 상세에 있어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기자 피라미드 단지

기자의 세 주요 피라미드를 포함한 단지 구조물 유적. via Wikimedia Commons

기자(Giza) 네크로폴리스(고대도시의 대규모 공동묘지)는 이집트 카이로 외곽의 기자 고원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고대 유적지는 카이로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나일강의 기자 구시가지로부터 내륙으로 약 8km 떨어진 사막에 위치해 있다. 이 고대 이집트의 네크로폴리스에는 쿠푸 피라미드(대 피라미드 또는 케옵스의 피라미드로 알려짐), 다소 작은 카프레 (또는 케프렌/체프렌) 피라미드, 그리고 비교적 적당한 크기의 멘카우레 (또는 미케리누스/미세리누스) 피라미드, “여왕들”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여러 작은 위성 건물들과 함께 대 스핑크스와 수백 개의 석실 분묘 및 예배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왕조 시기에 지어진 피라미드는 종교와 국가에 대한 파라오의 힘을 증명한다. 그것들은 무덤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파라오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한 방법으로 지어졌다. 그 크기와 단순한 디자인은 대규모 스케일에서 이집트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기원전 258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는 기자 피라미드 중 가장 오래되고 세계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이며,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기념물이다.

카프레 피라미드는 카프레의 통치 말기, 기원전 2,532년경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카프레는 야심차게 자신의 피라미드를 아버지의 피라미드 옆에 놓았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피라미드만큼 크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피라미드보다 10m 더 높은 토대의 부지에 지어서 더 크게 보이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카프레는 자신의 피라미드를 짓는 것과 함께 무덤의 수호자로 거대한 스핑크스를 짓도록 지시했다. 사자의 몸에 아마도 파라오를 묘사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스핑크스는 1500년 후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신성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대 스핑크스는 석회암 기반암을 깎아 만들었고 높이는 약 20m에 달한다. 멘카우레 피라미드는 기원전 2,490년경에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65m로 기자의 대 피라미드 중 가장 작다.

대중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피라미드 내부에 무덤 도굴범들을 혼란시키기 위한 많은 터널이 있는 매우 혼란스러운 구조라고 믿게 만든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통로는 매우 단순하며, 대부분 무덤으로 바로 이어진다. 피라미드의 엄청난 크기는 내부에 놓인 재물을 노리는 도굴범들을 끌어들였고, 이로 인해 일부 경우에는 무덤이 봉인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굴이 발생하기도 했다.

추가적인 터널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들은 피라미드를 짓는 사람들이 무덤을 지하로 얼마나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도굴범들 때문에 후대의 왕들이 숨겨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왕가의 계곡에 묻혔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이 또한 사실이 아니며, 피라미드 건설은 규모가 작아졌을 뿐 여러 왕조에 걸쳐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피라미드의 건설은 도굴이 아닌 경제적 요인 때문에 중단되었다.


신왕국3

룩소르 신전

룩소르 신전 입구에 있는 첫 번째 탑문. via Wikimedia Commons

룩소르 신전은 오늘날 룩소르(고대의 테베)로 알려진 도시의 나일강 동쪽 강둑에 위치한 거대한 고대 이집트 신전 단지다. 신전에 대한 건설 공사는 기원전 14세기 아멘호텝 3세의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다. 호르엠헤브와 투탕카멘은 기둥, 조각상, 프리즈를 추가했고, 아크나톤은 일찌기 그의 아버지의 카르투슈의 흔적을 지우고 아텐의 신전을 설치했지만, 대규모 확장 작업은 첫 돌을 배치한지 약 100년 후 람세스 2세 휘하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룩소르는 이집트의 주요 신전들 중에서 단 두 명의 파라오만이 건축 구조에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신전은 람세스 2세가 지은 24m 높이의 제1탑문에서 시작된다. 이 탑문은 람세스의 군사적 승리(특히 카데시 전투) 장면으로 장식되었으며, 나중에 누비아와 에티오피아 왕조의 파라오들도 거기에 승리를 기록했다. 신전 단지의 정문은 원래 6개의 거대한 람세스 동상(좌상 4, 입상 2)이 측면에 있었지만 2개(둘 다 좌상)만 남아 있다. 현대의 방문객들은 25m 높이의 분홍색 화강암 오벨리스크도 볼 수 있는데, 1835년까지 한 쌍을 이루던 이 오벨리스크 중 다른 하나는 현재 파리로 옮겨져 콩코르드 광장의 중심에 서 있다.

탑문을 지나면, 역시 람세스 2세에 의해 건설된 열주랑(페리스틸륨)이 있는 안뜰로 이어진다. 이 구역과 탑문은 신전의 나머지 부분과 비스듬한 각도로 지어졌는데, 짐작건대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세 개의 기존 바크 성지를 수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열주랑이 있는 안뜰을 지나면 아멘호텝 3세가 지은 행진에 사용되는 콜로네이드(보통 지붕을 떠받치도록 일렬로 세운 돌기둥)가 나오는데, 14개의 파피루스-주두 기둥이 늘어선 100m 길이의 회랑이다. 벽에 있는 프리즈는 오페트 축제의 단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왼쪽 상단의 카르나크에서의 희생 제사로부터 그 벽 끝에서 아문이 룩소르에 도착한 후,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장식은 투탕카멘에 의해 배치되었다: 소년 파라오가 묘사되어 있지만, 그의 이름은 호르엠헤브의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회랑(콜로네이드) 너머에는 아멘호테프의 원래 건축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열주랑(페리스타일) 안뜰이 있다. 가장 잘 보존된 기둥은 기둥들은 원래 색상의 흔적을 일부 볼 수 있는 동쪽에 있다. 이 안뜰의 남쪽은 신전의 어두운 내부 방으로 이어지는 3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다주식(하이포스타일) 코트(즉, 기둥으로 지지되는 지붕 공간)로 이루어져 있다.

카르나크 신전

카르나크 신전 단지는 룩소르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나일강 둑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아몬-레 구역, 몬투 구역, 무트 구역, 아멘호테프 4세 구역(해체됨)의 네 개의 주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개의 주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벽 밖에 있는 몇 개의 작은 신전과 성역, 그리고 무트 구역, 아몬-레 구역과 룩소르 신전에 연결된 숫양머리 스핑크스의 여러 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신전 단지는 특히 중요한데, 많은 통치자들이 여기에 추가 건설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특히 신왕국의 모든 통치자들이 이곳에 신전을 추가했다. 부지는 200 에이커가 넘는 면적에 안뜰, 홀, 예배당, 오벨리스크, 그리고 작은 신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탑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르나크와 이집트에 있는 대부분의 다른 신전 및 유적지의 주요 차이점은 그것이 개발되고 사용된 기간이 길다는 점이다. 공사는 기원전 16세기에 시작되었으며, 원래는 규모가 꽤 작았지만 결국 주요 구역에만 무려 20개의 신전과 예배당이 건설되었다. 약 30명의 파라오가 건축에 기여하여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규모, 복잡성, 다양성을 갖추게 되었다. 카르나크의 개별적인 특징들 중 독특한 것은 거의 없지만, 그 규모와 수는 압도적이다.

카르나크 방문자 센터에 재현된 신전 단지 모형. via Wikimedia Commons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전 중 하나는 카르나크에 있는 아문-라 신전이다. 이집트의 다른 많은 신전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은 과거의 위업을 상세히 기록하고(현장에서 발견되는 많은 벽과 기둥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수천 년의 역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통치자들에 의해 종종 수정되거나 완전히 지워지고 다시 만들어지기도 했음) 신들을 기린다. 아문-레 신전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지어졌으며, 세 번째 부분은 후기 신왕국의 파라오들에 의해 지어졌다. 이집트 건축의 전통 양식의 규범(캐논)에 따라, 단지의 내부 성소와 같은 건축적 특징의 많은 부분이 하지의 일몰과 일직선을 이루었다.

이 유적지에서 건축적 특징 중 하나는 람세스 시대에 지어진 5,000sqm의 다주실(하이포스타일; 多柱室) 홀이다. 홀은 약 139개의 사암과 진흙벽돌 기둥으로 지지되어 있으며, 12개의 중앙 기둥(높이 약 21m)은 모두 밝게 칠해져 있었을 것이다.

라메세움

람세스의 영묘 신전은 표준적인 신왕국 신전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향하는 신전 입구는 여러 개의 석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상은 수평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단지 중앙에는 내부 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48개의 기둥으로 된 지붕이 있는 다주식 홀이 있다. via Wikimedia Commons

제19왕조의 (3대) 파라오인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9년부터 1,213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다. 이집트 국경 확장 같은 그의 많은 업적들 중에서 그는 당시 신왕국의 수도였던 테베 근처에 라메세움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건설했다. 라메세움은 입구를 지키는 기념비적인 조각상들로 완성된 장엄한 신전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원래 높이 19m와 무게 약 1,000톤에 달하는 람세스 자신의 동상이었다. 이 인상적인 파라오의 동상은 현재 좌대와 몸통만 남아 있다. 이 신전에는 인상적인 부조들이 있는데, 카데시 전투(기원전 1274년경)와 “샬렘” 도시 약탈 등 많은 부조들이 람세스의 여러 군사적 승리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라메세움은 람세스 2세를 위한 예배 장소로 지어졌다. 비록 지금은 옛 구조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라메세움은 단순히 신전이 아니라 궁전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라메세움은 그것들 이상이었다. 예배장소일 뿐만 아니라, 발굴 과정에서 신전의 남쪽 부분에서 발견된 제빵소, 부엌, 비품실 등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된 다른 방들도 있었다. 또한 부엌과 궁전 사이 영역에는 소년들에게 필경사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다. 라메세움이 파괴된 후 거기에 지은 다른 무덤도 있었다. 라메세움은 원래 람세스 2세를 위해 지어졌지만, 파괴된 후 제22왕조의 특정 가족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이 방에 두 번째 매장지를 마련하고 일종의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라메세움에는 많은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하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람세스 2세의 거상 머리를 대좌에 설치하고 지지대를 세원 것이다. 또 다른 건 진흙벽돌로 만들어진 구역이었다. 이 지역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진흙벽돌보다 강해서 폭우와 같은 자연 요소에 견딜 수 있도록 현대식 벽돌로 덮어서 복원했다.

말카타 신전

아멘호텝 3세의 재임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250개 이상의 건물과 기념물을 건설했다. 가장 인상적인 건물 프로젝트 중 하나는 고대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기쁨의 집”으로 알려진 말카타 신전 단지로, 테반 네크로폴리스 남쪽에 있는 테베의 서쪽 강둑에 왕실 거주지를 위해 건설된 것이었다. 부지는 약 226,000㎡이다. 수많은 건물, 궁정, 연병장, 그리고 주택과 함께 부지의 엄청난 크기를 감안할 때, 이 곳은 단지 파라오의 신전과 거주지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소도시이기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단지의 중앙 구역은 기둥으로 둘러싸인 연회장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과 궁정으로 이루어진 파라오의 아파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족과 외국인 손님을 수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파트 옆에는 보관, 대기, 소규모 청중을 위한 작은 방에 연결된 공식 알현실이 있었다. 왕궁의 서쪽에 있는 서쪽 빌라, 북쪽 궁전과 마을, 그리고 신전이 이 구역의 가장 큰 요소다.

신전의 외부 치수는 약 183.5×110.5m이며, 큰 앞마당과 신전 본당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커다란 전면의 코트는 131.5×105.5m이며 동서 축을 향하고 신전 단지의 동쪽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코트의 서쪽 부분은 더 높은 곳에 있으며, 낮은 옹벽으로 나머지 코트와 구분된다. 아래쪽 코트는 거의 정사각형인 반면 위쪽 테라스는 직사각형 모양이다. 코트의 윗 부분은 진흙 벽돌로 포장되었고, 앞마당의 낮은 부분에 4m 폭의 입구가 있으며, 바닥과 상부 랜딩을 연결하는 경사로가 벽으로 둘러싸여있었다. 이 경사로와 입구는 모두 신전의 중심에 있었으며 앞마당 입구와 신전 본당의 방향이 동일했다.

신전은 중앙, 북쪽, 남쪽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앙 부분은 작은 직사각형 대기실(6.5×3.5m)로 표시되며, 대기실을 포함한 많은 문설주에는 ‘라처럼 영원히 생명을 주다’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12.5×14.5m 홀은 홀 전면 벽 중앙에 있는 3.5m 폭의 문을 통해 들어가는 대기실을 따라 이어진다. 이 방의 천장은 파란 바탕에 노란 별이 장식돼 있었다는 증거가 있는 반면, 오늘날의 벽은 진흙 회반죽 위에 흰색 치장벽토만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의 퇴적물에서 발견된 수많은 장식용 석고 조각을 보면 이것들 역시 다양한 이미지와 패턴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천장을 지지하는 6개의 기둥은 동서 축으로 2열로 배열되어 있다. 주초의 작은 파편만 남아있지만, 기둥 지름은 약 2.25m로 추정된다. 기둥은 벽에서 2.5m 떨어져 있으며, 기둥의 각 열은 다음 열까지 약 1.4m 떨어져 있는 반면 두 열 사이의 간격은 3m이다.

두 번째 홀(12.5x10m)은 첫 번째 홀의 뒷벽 중앙에 있는 3m 짜리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두 번째 홀은 첫 번째 홀과 비슷하지만, 천장이 첫 번째 홀과 동일하지 않지만 비슷한 패턴과 이미지로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기둥으로 천장을 지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는 4개의 기둥이 첫 번째 홀의 기둥과 같은 축을 따라 두 줄로 정렬되어 있으며, 기둥 사이 간격은 3m이다. 두 번째 홀에서, 적어도 하나의 방은 마아트의 숭배를 위해 바쳐진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 영역의 다른 세 개의 방도 그와 같은 종교적 목적을 수행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신전의 남쪽 부분은 서부와 남부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부 구역은 6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남부 구역의 크기(19.5×17.2m)를 감안할 때 또 다른 오픈 코트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방들 중 많은 곳에서 가장자리에 금으로 상감한 파란색 세라믹 타일이 발견되었다. 신전의 북쪽 부분은 남쪽 부분과 비슷한 양식의 10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전 자체는 “기쁨의 집에 있는 아문 신전” 또는 “기쁨의 집에 있는 아문 신전의 Nebmaarta” 같은 다양한 비문이 새겨진 벽돌의 수를 볼 때 이집트 신 아문에게 헌정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말카타 신전은 신왕국의 다른 숭배 신전과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며, 장엄한 홀과 종교적 지향의 방들 외에도 창고에 더 가까운 방들도 많이 있다.

왕가의 계곡4

왕가의 계곡에 있는 람세스 5세와 람세스 6세의 무덤 장식, 기원전 1145년 경. via Wikimedia Commons

신왕국에서는 파라오가 더 이상 고대 피라미드 같은 크고 눈에 잘 띄는 기념비에 묻히지 않았지만, 여전히 죽은 파라오를 위한 장례식을 기념비적인 신전에 모시는 전통이 이어졌다. 고왕국과 중왕국의 장례 조형물은 모두 약탈당했으며, 이로 인해 사후 세계에서 파라오의 시신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제18왕조부터, 파라오들은 대신에 테베 근처 ‘왕가의 계곡’ 안에 숨겨진 지하 무덤에 묻혔다.

이들 무덤은 계곡 경사면의 바위에서 직접 발굴되었다. 무덤의 정확한 배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졌지만 일반적으로 무덤 방으로 이어지는 여러 구역으로 구성된 복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덤 방만 장식되었지만, 종내에는 무덤 전체 벽이 삽화와 문자로 풍부하게 장식되었다.


그레코-로만 시대

로마 시대, 필레에 있는 트라얀의 키오스크, 서기 100년 경. via Wikimedia Commons

이집트가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레코-로만 시대(기원전 332~서기 395년)에, 이집트 건축은 그리스 건축의 영향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이집트 고유의 종교에 대한 강한 존중을 유지하면서 많은 신전을 새로 짓거나 오래된 신전을 확장했다.

나라의 수도는 지중해 연안에 최근 설립된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로 이전되었다. 그 계획은 주로 도시에 현지 요소를 혼합한 것이었다. 이 도시의 대부분은 오늘날 물 속이나 현대 도시 아래로 사라졌지만, 설명에 따르면 왕궁, 무세이온,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그리고 유명한 파로스 등대를 비롯한 많은 훌륭한 건물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푸 신전, 콤 옴보 신전, 필레 신전 단지 등 이 시대의 상(上) 이집트에는 많은 잘 보존된 신전들이 있었다. 신전 건축은 전통적으로 이집트 양식을 유지했지만, 복합 주두의 등장과 같은 새로운 그레코-로만의 영향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집트 양식 모티브 또한 더 넓은 그리스와 로마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의 장례 건축물 중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지만,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기 위해 공유했던 지하 카타콤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그것들은 고전주의와 이집트 양식 장식이 혼합된 하이브리드 건축 양식이 특징이다. 서기 1세기에 시작되어 3세기까지 계속 확장된 콤 엘 쇼카파 카타콤은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이며 오늘날에도 방문할 수 있다.

로마 시대 알렉산드리아 콤 엘 쇼카파의 카타콤 지하 묘지, 서기 1-3세기. via Wikimedia Commons

요새

누비아의 미르기사에 있는 성벽. via Wikimedia Commons

고대 이집트 내에서의 요새는 경쟁국 간 분쟁의 시기에 지어졌다. 이 기간에 분석된 모든 요새 중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이 같은 재료로 지어졌다. 벽을 만들 때 돌을 사용한 부헨 요새 같은 고왕국의 일부 요새가 예외였다. 주된 벽은 주로 진흙벽돌로 지어졌지만 목재 등 다른 재료로 보강되었다. 또한 포장 뿐만 아니라 침식으로부터도 벽을 보호하기 위해 암석이 사용되었다. 2차벽은 요새의 주 성벽(메인 월) 외부에, 비교적 서로 가깝게 지어졌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침략자들이 요새의 주 성벽에 도달하기 전에 이 요새를 파괴해야 했기 때문에 하나의 도전 과제가 되었다. 적이 첫 번째 장벽을 돌파하면 또 다른 전략이 사용되었다. 주 성벽에 도달하자마자, 2차벽과 1차벽 사이에 배치될 도랑을 건설했다. 그 목적은 적을 노출시킬 수 있는 위치에 두어 침입자들이 화살 공격에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요새 내부에 있는 이 도랑 벽의 위치는 통일 시기에는 비무장화되어 철거되었다. 건설에 사용된 부분들은 벽으로 재사용할 수 있으므로 전체적인 디자인에 매우 유용했다.

고대 이집트의 요새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중왕국 시대에 이집트 제12왕조는 요새화된 기지를 만들어 누비아 강변 전역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 이집트 요새의 위치가 강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와 누비아의 기지는 바위나 모래가 많은 지형에 배치되었다. 이 방식의 이면에 있는 목적은 경쟁 집단이 기지를 습격하는 것을 저지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을 지역 전체에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누비아의 이러한 요새들을 조사한 결과 구리 제련 재료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이 지역의 광부들 간의 관계를 암시한다. 이들 누비아 요새의 점령은 두 당사자 사이의 무역관계를 암시한다. 광부들은 재료들을 모아서 이 요새로 옮겨주고 식량과 물로 교환했다. 제13왕조까지 이집트는 이러한 요새들을 이용하여 누비아를 지배할 수 있었다.

펠루시움 요새

펠루시움 요새는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는 침입자들로부터 보호 수단의 역할을 했다. 이 장소는 천 년 넘는 기간 동안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펠루시움은 무역의 중심지(육상과 해상 모두)로도 유명했다. 무역은 주로 이집트와 레반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요새의 설립에 관한 정보는 확실하지 않지만, 펠루시움은 중왕국 시대나 기원전 16~18세기까 사이의 사이스 왕조 및 페르시아 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펠루시움은 또한 점유 면적이 넓었음을 나타내는 국경 밖에서 발견된 다른 유적으로 인해 나일강의 한 부분으로 보여진다. 건축학적으로, 펠루시움의 구조물(예를 들면 문과 탑)은 석회암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리광이 발견되어 야금산업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적지 발굴을 통해 현무암, 화강암, 섬록암, 대리석, 규암 등 초기 왕조의 일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재료도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재료들은 더 최근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이 요새는 나일강과 가까운 곳에 건설되었으며, 대부분 사구와 해안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펠루시움 요새의 쇠퇴를 초래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존재 기간 동안 흑사병(선 페스트, 림프절 페스트)과 같은 사건이 지중해에 처음으로 나타났고, 요새 내에서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했다. 무역 감소에 더해 페르시아에 정복 당한 것 또한 이 지역의 방치 증가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공식적으로, 지각운동과 같은 자연적인 이유들이 펠루시움 붕괴를 초래했다. 이 지역이 공식적으로 버려진 시기는 십자군 전쟁 시대에 이루어졌다.

야파 요새는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명성을 떨쳤다. 그것은 지중해 연안의 요새이자 항구로 사용되었다. 오늘날까지 야파는 이집트의 주요 항구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 가나안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던 이곳은 이집트 제국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나안에서 이집트 점령으로 승계된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 곳은 제18왕조 파라오들의 군사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됐다. 기능 면에서, 이곳은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했다. 야파의 주요 기능은 이집트 군대의 곡물 저장고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람세스 문은 이 요새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발굴 당시 성곽은 요새와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릇, 수입 항아리, 냄비 받침대 그리고 맥주와 빵 등 여러 가지 물품들이 발견되어 이 지역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물건들의 발견은 식품 저장과 도자기 아이템의 제작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변환 및 후대의 사용

재사용 및 약탈품

로마의 통치가 시작된 후, 일부 신전은 새로운 용도로 개조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룩소르 신전은 로마 군사 주둔지의 중심이 되었고 신전의 일부는 신성한 황제를 숭배하는 데 헌정되었다. 이 신전의 남쪽 부분은 나중에 기독교 교회로 변모했고 이슬람 시대에는 신전 동쪽에 아부 하가그 모스크가 붙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 기념비의 돌과 건축 요소는 종종 후대의 건설을 위한 약탈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많은 중세 모스크에는 여전히 상형문자가 새겨진 고대 석조 블록이 포함되어 있다. 로마 시대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다른 나라로 옮겨져 귀중한 기념물로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현대 부흥 운동

19세기와 20세기에는 이집트 건축 모티브가 현대 건축에 사용되어 이집트 리바이벌 건축 양식, 특히 나중에 이집트 극장 영화관 및 기타 테마 엔터테인먼트 장소를 낳았다.

이집트 오벨리스크 양식의 현대식 기념물인 워싱턴 기념비. via Wikimedia Commons


  1. 이집토마니아 : Egyptomania. 특히 19세기에 고대 이집트 문화에 대해 서양인들이 보인 강박적 관심을 의미하는 말. ↩︎
  2. 고왕국 : Old Kingdom. 제3-제6왕조 (2780-2280 B.C.). (출처: 교학사 신영한대사전) ↩︎
  3. 신왕국 : New Kingdom. 고대 이집트의 신왕조 시대(1580-1085 B.C.). 제18왕조에서 제20왕조까지의 기간으로, 테베인의 세력이 컸던 시대. (출처: YBM 올인올 영한사전) ↩︎
  4. 왕가의 계곡 : Valley of the Kings. 고대 이집트 제18, 19 왕조의 왕가 매장지. (출처: 동아출판 프라임 영한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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