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주의 건축


구성주의 건축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소련(소비에트 연방)에서 번성했던 구성주의 스타일의 현대 건축을 말한다. 추상적이고 간결한 이 운동은 현대 산업 사회와 도시 공간을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장식적인 양식화를 거부하고 재료의 산업적 조립을 선호했다. 디자인은 첨단 기술과 공학을 명백한 코뮤니즘 사회 목적과 결합시켰다. 비록 여러 경쟁적인 분파로 나뉘었지만, 이 운동은 1932년경 인기를 잃기 전까지 많은 선구적인 프로젝트와 완공된 건물을 생산했다. 이는 이후 건축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의

구성주의 건축은 러시아 미래주의에서 성장한 더 넓은 구성주의 미술 운동에서 나왔다. 구성주의 미술은 운동적 요소를 지닌 완전히 추상적인 비-객관적 ‘구조물’에 3차원 입체주의 비전을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구성주의 미술은 새로운 사회적 수요와 신정권에 요구되는 산업적 과제로 관심을 돌렸다. 두 가지 뚜렷한 흐름이 등장했는데, 첫 번째는 공간과 리듬에 관심을 가졌던 앙투안 페브스너(1886-1962)와 나움 가보(1890-1977)의 리얼리스트 선언으로 요약됐고, 두 번째는 순수 예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예술이 산업 생산에 흡수되기를 원했던 보다 사회지향적 그룹인 알렉산더 로드첸코(1891-1956), 바바라 스테파노바(1894-1958) 및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 같은 생산주의자 사이의 계몽인민위원회 내 투쟁을 대변한다.

1922년, 페브스너와 가보가 이민을 떠나면서 분열이 일어났다. 그 후 이 운동은 사회적으로 실용적인 노선을 따라 발전했다. 생산주의자 대다수는 프롤렛쿨트(‘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의미의 소비에트 예술 기관)와 잡지 《LEF》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후 건축 그룹 O.S.A.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건축에서의 혁명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구성주의 건축 프로젝트는 종종 타틀린의 타워로 불리는, 1919년 미래주의자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코민테른 본부를 위한 제안이었다. 비록 언빌트로 남았지만, 재료 ㅡ 유리와 강철 ㅡ 와 그것의 미래지향적 기풍 그리고 정치적 편향(그것의 내부 볼륨의 움직임은 혁명과 변증법을 상징하도록 의도되었다)이 1920년대 프로젝트들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 다른 유명한 초기 구성주의 프로젝트는 움직이는 연설 단상인 엘 리시츠키(1890-1941)의 레닌 트리뷴(1920)이었다. 러시아 내전(1917.11.7-1923.6.16) 동안,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와 리시츠키를 중심으로 한 우노비스(Utverditeli Novogo Iskusstva; 새로운 예술의 옹호자; 절대주의 양식의 러시아 예술가 단체) 그룹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설계했는데, 이들은 ‘비대상(非對象)’ 추상을 추구한 쉬프레마티즘(절대주의)을 보다 실용적인 목적과 결합시켜 이상적인 구성주의 도시를 만들어냈다.ㅡ 엘 리시츠키의 프로운 라움, 구스타프 클루시스(1895-1944)의 ‘다이나믹 시티’(1919); 라자르 키데켈(1904-1986)의 노동자 클럽(1926) 및 그의 두브로브카 발전소 및 최초의 Sots 타운(1931~33)도 참조하라.


아스노바(새건축가협회)와 합리주의

러시아 내전 직후, (구) 소련은 너무 가난해서 어떠한 주요 신축 프로젝트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아방가르드 학교인 브후테마스는 1921년에 건축가 니콜라이 라도프스키(1881-1941)가 이끄는, 일명 아스노바(새건축가협회)라는 건축 계파 활동을 시작했다. 교수법은 게슈탈트 심리학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여 기능적이면서도 환상적이었으며, 심비르체프의 유리로 덮인 매달린 레스토랑 같은 형태와 더불어 대담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아스노바에 소속된 건축가로는 엘 리시츠키, 콘스탄틴 멜니코프(1890-1974), 블라디미르 크린스키(1890-1971) 및 젊은 베르톨트 루베트킨(1901-1990) 등이 있다.

리시츠키와 마르트 슈탐의 볼켄뷔겔 수평 마천루와 콘스탄틴 멜니코프의 임시 파빌리온 같은 1923년부터 1935년까지의 프로젝트들은 이 새로운 그룹의 독창성과 야망을 보여주었다. 멜니코프는 1925년 파리 장식 예술 박람회에서 소비에트 파빌리온을 디자인했는데, 이 전시관은 로드첸코가 디자인한 객실과 들쭉날쭉한 기계적 형태로 새로운 스타일을 대중화했다. 구성주의적인 생활 환경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예는 알렉산드라 엑스테르(1882-1949)가 각지고 기하학적인 유행하는 방식으로 실내와 외관을 모델링한 인기 공상과학 영화 〈아엘리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24년에 지어진 국영 모셀프롬 백화점은 신경제정책의 새로운 소비주의를 위한 초기 모더니즘 건물이었으며, 3년 후 지어진 베스닌 형제의 모스토르크 백화점도 마찬가지였다. 이즈베스티야 본사 같은, 대중 언론을 위한 모던한 사무실도 또한 인기가 있었다. 이것은 1926–7년에 지어졌으며 그리고리 바르킨(1880-1969)이 디자인했다.


현대건축가동맹

더 차갑고 더 기술적인 구성주의 양식은 베스닌 형제가 1923/4년 설계한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의 글래스 오피스 프로젝트를 통해 도입되었다. 또한 1925년에는 브후테마스와 연계된 OSA(현대건축가동맹) 그룹이 알렉산더 베스닌과 모이세이 긴즈부르크(1892-1946)에 의해 설립됐다. 이 그룹은 에른스트 마이의 하우징 프로젝트처럼 바이마르 독일의 기능주의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택, 특히 19세기의 집단화된 주택을 대체하기 위해 특별히 설게된 ‘돔 코뮤나’의 공동 주택은 이 그룹의 주요 우선 순위였다. 소셜 콘덴서(사회적 응축기)라는 용어는 그들의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1919년에 다음과 같이 쓴 레닌의 사상에서 따왔다. “여성의 진정한 해방과 진정한 코뮤니즘은 이러한 사소한 가사노동에 맞서는 대중의 투쟁 그리고 대중을 광대한 사회주의 가정으로 진정으로 개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지어진 집합주택 프로젝트에는 이반 니콜라예프(1901-1979)의 섬유 연구소 공동 주택(모스크바 오르조니키제 거리, 1929-1931), 긴즈부르크의 모스크바 고스트라크 아파트식 주거지, 그리고 가장 유명한 그의 나르콤핀 빌딩이 있다. 아파트식 주거지는 하르키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그리고 작은 타운에서 구성주의 표현 양식으로 지어졌다. 긴즈부르크는 또한 알마아타(카자흐스탄)에 정부 청사를 디자인했으며, 베스닌 형제는 모스크바에서 영화배우학교를 디자인했다. 긴즈부르크는 새로운 사회에서 건설에 대한 개념이 과거와 동일하다고 비판했다: “노동자들의 주택을 부르주아 아파트와 같은 방식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은 우리 일상 생활의 변화와 변동을 최대한 고려하여 동일한 문제에 접근한다… 우리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와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OSA는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잡지 《SA》 또는 《컨템퍼러리 아키텍처》를 발행했다. 대표적인 합리주의자인 라도프스키는 1929년에 모스크바 아파트 단지를 완공하면서 자신만의 다소 독특한 형태의 대중 주택을 디자인했다. 특히 사치스런 예는 이반 안토노프, 베냐민 소콜로프, 아르세니 툼바소프가 디자인한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의 ‘체키스트 마을’로, 인민내무위원회(NKVD) 직원을 위한 망치와 낫 모양의 집합주택단지이며, 현재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일상과 유토피아

구성주의자들의 새로운 형태는 당시 신경제정책 하의 혼합 경제 체제였던 소련의 새로운 일상 생활 프로젝트를 상징하기 시작했다. 하르키우(우크라이나)의 거대한 고스프롬 단지(1926~8년 세라피모프, 폴저 및 크라베츠에 의해 디자인 됨.)와 같은 국가 건물들이 건설되었는데, 레이너 번햄은 그의 저서 『제1기계시대의 이론과 디자인』(1960)에서 이를 데사우 바우하우스와 함께 1920년대 가장 큰 스케일의 모더니즘 작업으로 언급했다. 다른 주목할만한 작업으로는 미하일 바르시와 미하일 시냐프스키의 1929년 모스크바 천문대의 알루미늄 포물선 지붕과 유리로 된 계단이 있다.

새로운 미학의 인기는, 모스크바에 있는 이반 졸토브스키(1867-1959)의 1926년 MOGES 발전소 또는 알렉세이 시추세프(1873-1949)의 나르콤젬(농업인민위원회) 사무실과 같이, 전통주의 건축가들이 구성주의를 채택하도록 이끌었다. 마찬가지로, 엔지니어 블라디미르 슈호프(1853-1939)의 슈호프 타워는 종종 아방가르드 작업으로 여겨졌고, 발터 벤야민(1892-1940)의 모스크바 일기에 따르면 ‘서구의 어떠한 유사한 구조와도 다르다’고 썼다. 슈호프는 또한 바흐메테프스키 버스 차고지 및 노보-리아잔스카야 주차장 작업에서 멜니코프와 협력했다. 이들 건물 대부분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1898-1948)의 영화 ‘더 제너럴 라인’(낡은 것과 새로운 것)에서 보여지며, 이 영화에는 안드레이 부로프(1900-1957)가 디자인한 특별 제작된 모크업 구성주의자 집단 농장이 나온다.

구성주의자들의 중심 목표는 일상 생활에 아방가르드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1927년부터 그들은 일반적으로 공장 구역에 지어진 공동 레저 시설인 노동자 클럽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콘스탄틴 멜니코프의 카우추크, 스바보다 및 루사코프 클럽, 베스닌 형제의 리카체프 클럽, 일리야 골로소프의 즈에브 노동자 클럽이다.

일상으로의 이러한 진출과 동시에 버크민스터 풀러와 비교되는 하이테크 작업인 이반 레오니도프의 레닌 인스티튜트(1927)와 같은 기상천외한 프로젝트들이 디자인되었다. 이것은 모노레일로 연결된 마천루 사이즈의 도서관, 천문대, 돔으로 구성되었으며, 공중 주택에 대한 진지한 제안을 담은 게오르기 크루티코프의 아스노바 프로젝트인 ‘플라잉 시티’는 떠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멜니코프 하우스와 그의 바흐메테프스키 버스 차고지는 구성주의에서의 개인주의와 공리주의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라자르 히케이델에 의해 ‘플라니트’ 또는 ‘아르히텍톤’이라 불리는 절대주의 고층 건물 프로젝트들도 있었다. 이들에는 우주 서식지(1921–22), ‘아르히텍톤’(1922–1927), ‘노동자 클럽’(1926), ‘공동 주거’1927), 그리고 A. 니콜스키와 L. 히데켈의 ‘모스크바 협동조합 연구소’(1929) 등이 포함된다. 환상적인 요소는 야코프 체르니호프의 작업에서도 나타났는데, 그는 여러 권의 실험적인 디자인 서적ㅡ가장 유명한 것은 《건축적 환상》(1933)ㅡ을 출판하여 ‘소비에트 피라네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소츠고로드’와 타운 플래닝

재건된 도시에 대한 많은 구성주의적 제안들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일관된 구성주의 도시 계획의 예는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레닌그라드의 나르브스카야 자스타바 지구는 구성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5년부터 이 지역을 위해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게겔로와 OSA 소속의 알렉산더 니콜스키 같은 건축가들이 공동 주택을 설계하기 시작했으며, 노이 트로츠키(1895~1940)가 설계한 키로프 시청(1932–34), G.A 시모노프의 실험학교, 그리고 지역 아스노바 회원들이 설계한 공동 세탁소와 주방 시리즈 같은 공공 건물들도 함께 건설되었다. 완성된 구성주의 동네의 한 사례로는 자포리자의 소츠미스토(소츠코로드)이다.

많은 구성주의자들은 첫 5개년 계획에 수반된 ‘문화 혁명’ 기간 동안 그들 자신의 야망이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이 시점에서 구성주의자들은 전원 도시 또는 선형 도시 모델을 선호하는 도시주의자와 비도시주의자로 나뉘었다. 선형 도시는 니콜라이 밀류틴 재무국장이 그의 저서인 『소츠고로드』(1930)에서 선전했다. 이것은 OSA 이론가 미하일 오히토비치(1896~1937)에 의해 더 극단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의 비도시주의는 도시와 농업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광대한 지역에 선형 교통망으로 연결된 1인 또는 1가구 건물 시스템을 제안했으며, 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브로드에이커 시티의 사회주의적 등가물과 유사했다. 탈도시주의자들과 도시주의자들이 마그니토고르스크와 같은 새로운 도시를 위해 제안한 프로젝트들은 종종 나치즘을 피해 온 보다 실용적인 독일 건축가들, 예를 들어 ‘마이 사단'(에른스트 마이, 마르트 스탐, 마르가레테 쉬테-리호츠키), 하네스 마이어가 이끄는 ‘바우하우스 사단’, 그리고 브루노 타우트에 의해 거부되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은 한때 주목을 받았으며, 그는 후에 ‘빛나는 도시’ 계획으로 발전하게 되는 ‘모스크바에 보내는 회신’을 작성했고, 구성주의 건축가 니콜라이 콜리와 함께 첸트로소유즈 정부 청사를 설계했다. OSA 그룹의 복층 아파트와 집합 시설은 그(코르뷔지에)의 후기 작업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 다른 유명한 모더니스트, 에리히 멘델손(1887-1953)은 레닌그라드의 붉은 깃발 방직 공장을 디자인하고 그의 저서 『러시아, 유로파, 아메리카』를 통해 구성주의를 대중화시켰다.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구성주의가 크게 반영된 대표적인 프로젝트는 드니에프르 수력 발전소로, 빅토르 베스닌 등을 비롯한 건축가들이 설계했다. 또한 엘 리시츠키는 1930년에 출간한 저서 『러시아 건축의 재건』을 통해 이 양식을 해외에 널리 알렸다.


구성주의의 종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필적하는 웅장한 프로젝트인 소비에트 궁전을 위한 1932년 설계경기에는, 발터 그로피우스, 에리히 멘델손, 르코르뷔지에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 구성주의 건축가들의 작업도 출품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더니즘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과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여전히 대부분이 농업 중심인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이러한 양식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이 양식이 상당히 루틴한 건설 방법을 사용하면서 단지 기술의 형태를 카피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보리스 이오판(1891-1976)의 당선작은 스탈린 양식 건축의 절충적 역사주의의 시작을 알렸는데, 이 양식은 때로는 새로운 기술로 달성되기도 했지만, 역사적 양식들을 선택적으로 혼합하여 모더니즘 건축의 세계시민주의, 추함, 비인간성에 반발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한 점이 있다. 나르콤핀 같은 하우징 프로젝트들은 시설의 집단화, 성 평등, 아동의 집단 양육 같은 1920년대의 일상 생활을 개혁하려는 시도를 위해 디자인되었으며, 스탈린주의로 인해 가족의 가치가 되살아나면서 모두 인기를 잃었다. 특히 모스크바 지하철이 ‘노동자의 궁전’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하면서, 구 세계의 양식 또한 되살아났다.

1920년대 말까지 구성주의는 소련의 지배적인 건축 양식이 되었으며, 놀랍게도 이 시기의 많은 건물들이 살아남았다. 초기 반응은 1929-32년 이오판의 ‘제방 위 주택’처럼 구성주의적 장치로 굴절된 아르데코풍 고전주의를 향한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일부 구조물들은 때때로 포스트컨스트럭티비즘(후기구성주의)으로 불리는 합성 양식으로 디자인되었다.

이러한 짧은 종합 이후, 1955년까지 신고전주의적 반동이 완전히 지배적이었다. 합리주의 건물은 산업 건축에서 여전히 흔했지만, 도시 프로젝트에서는 절멸되었다. 판텔레이몬 골로소프(1882-1945)의 《프라우다》(구소련 공산당 중앙 기관지) 건물(1935 완성), 모스크바 섬유 연구소(1938 완성) 또는 라도프스키의 모스크바 지하철을 위한 합리주의적 베스티뷸(현관, 양 끝 통로) 같은, 최후의 고립된 구성주의 건물이 1933~35년에 착공되었다. 분명히 베스닌 형제와 이반 레오니도프는 1934년 붉은 광장에서 진행된 나르콤티야즈프롬(인민중공업위원회 청사) 프로젝트를 위해 모더니즘 양식의 공모작을 제출했으며, 이 역시 건설되지 않은 또 하나의 스탈린주의 양식 건축물이었다. 구성주의의 흔적은 일부 사회주의 리얼리스트의 작업 ㅡ 예를 들어 니콜라이 수에틴(1897-1954)의 쉬프레마티즘적인 인테리어가 있었던 이오판의 울트라-스탈린주의 양식의 1937년 파리 박람회 파빌리온의 미래주의적 입면 ㅡ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산

부분적으로 정치적 공약 ㅡ 그리고 스탈린주의 건축으로의 대체 ㅡ 으로 인해, 구성주의의 기계적이고 역동적인 형태는 필립 존슨과 헨리-러셀 히치콕이 정의한 국제양식의 평온한 플라톤주의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의 책에는 니콜라예프가 이끄는 정부팀의 전기 연구소인 소련 건물 하나만 포함됐다. 1960년대에 구성주의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당시의 더 과감한 실험적인 건물들(예를 들어, 글로버스 극장 또는 트빌리시 도로부 건물)과 장식 되지 않은(언오너먼티드) 흐루쇼프카 아파트는 매우 다른 조건하에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중단된 실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 밖에서, 구성주의는 종종 대안적이고 보다 급진적인 모더니즘으로 여겨져 왔으며, 그 유산은 팀 텐, 아키그램, 단게 겐조(1913-2005) 같은 다양한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많은 브루탈리즘 작업에서 볼 수 있다. 아방가르드와 일상 생활의 통합은 상황주의자들, 특히 기 드보르(1931-1994)와 콘스탄트 니우엔하위스(1920-2005)의 뉴 바빌론(1959-74) 프로젝트와 유사하다.

하이테크 건축도 구성주의에 빚을 지고 있는데, 리처드 로저스(1933-2021)의 로이드 빌딩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하 하디드(1950-2016)의 초기 프로젝트는 말레비치의 ‘아키텍톤’을 각색한 것이었으며, 그녀의 드로잉에서 체르니코프의 영향은 명백하다. 해체주의는 쿱 힘멜블라우의 작업에서와 같이 사회적 측면은 없지만 구성주의의 역동성을 떠올리게 한다. 1970년대 후반에 렘 콜하스(1944-)는 「풀장 이야기」라는 구성주의의 정치적 궤적에 대한 우화를 썼는데, 구성주의자들이 자력으로 움직이는 모더니즘 수영장을 타고 (구) 소련을 탈출하지만,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 직후, 스탈린주의 하에서와 거의 같은 이유로 비판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원래의 구성주의 건물들 중 대부분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거나 철거가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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