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ave ship
노예선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노예를 운송하기 위해 특별히 건조되거나 개조된 대형 화물 선박이었다. 그 배들은 서아프리카의 기니 해안을 오가는 인신 매매와 관련된 무역에 관여했기 때문에 “기니맨”이라고도 불렸다.
Slave ships were large cargo ships specially built or converted from the 17th to the 19th century for transporting slaves. Such ships were also known as “Guineamen” because the trade involved human trafficking to and from the Guinea coast in West Africa.
대서양 노예 무역
Atlantic slave trade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지 한 세기 이상 지난 1600년대 초, 농장에서 일할 무급 노동력에 대한 수요로 인해 노예 무역은 수익성 있는 사업이 되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은 콩고 내전 기간과 그 이후인 18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절정에 달했다.
In the early 1600s, more than a century after the arrival of Europeans to the Americas, demand for unpaid labor to work plantations made slave-trading a profitable business. The Atlantic slave trade peaked in the last two decades of the 18th century, during and following the Kongo Civil War.
선주(船主)들은 수익성 확보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수송할 수 있도록 선체를 지붕과 머리 사이의 공간이 거의 없는 짐 선반으로 나누었다. 비위생적인 환경, 탈수, 이질, 괴혈병으로 인해 포로의 평균 15%, 최대 1/3에 달하는 높은 사망률로 이어졌다. 배에는 종종 판자 침대에 단단히 사슬로 묶인 수백 명의 노예가 실렸다. 예를 들어, 노예선 ‘앙리에타 마리’호는 긴 중간 항로(아프리카 서해안과 서인도 제도 사이)에 200여명의 노예를 실었다. 노예들은 움직일 공간이 거의 없이 쇠사슬로 묶인 채 화물 적재실에 갇혀 있었다.
To ensure profitability, the owners of the ships divided their hulls into holds with little headroom, so they could transport as many slaves as possible. Unhygienic conditions, dehydration, dysentery and scurvy led to a high mortality rate, on average 15% and up to a third of captives. Often the ships carried hundreds of slaves, who were chained tightly to plank beds. For example, the slave ship Henrietta Marie carried about 200 slaves on the long Middle Passage. They were confined to cargo holds with each slave chained with little room to move.
노예선의 가장 중요한 항로는 아프리카의 북서부와 서부 해안에서 남미 및 오늘날 미국의 남동부 해안, 그리고 카리브해까지 이어졌다. 2천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이 배로 운송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의 노예 수송은 삼각 무역(3국간에서 순환적으로 수출입을 행하는 무역 형태)의 중간 항로로 알려져 있다.
The most significant routes of the slave ships led from the north-western and western coasts of Africa to South America and the south-east coast of what is today the United States, and the Caribbean. As many as 20 million Africans were transported by ship. The transportation of slaves from Africa to America was known as the Middle Passage of the triangular trade.
노예선의 상태
Conditions on slave ships
노예
Slaves
노예선 소유자는 항해의 수익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승선시켰다. 그들은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예들을 쑤셔 넣고, 사슬로 묶고, 선별적으로 그룹화함으로써 그렇게(수익성 있게) 했다. 노예들은 이 비좁은 환경으로 인해 산소 결핍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입법자들은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키기 위해 1684년 톤수(ton數)법을 통과시켰다. 승선한 노예들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잔혹하게 다루어져 많은 이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고, 죽거나 죽어가는 노예들은 배 밖으로 버려졌다. 여행을 완료하는 데까지 평균 1~2개월이 걸렸다. 노예들은 벌거벗은 채 여러 종류의 쇠사슬로 족쇄를 채워, 움직일 공간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침상 아래 바닥에 보관되었다. 일부 선장은 다른 노예들을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해 ‘슬레이브 가디언’을 배정했다. 노예들은 바닥판에 고정된 채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로 인해 팔꿈치의 피부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닳곤 했다. 이질, 설사, 안근마비, 말라리아, 천연두, 황열병, 괴혈병, 홍역, 장티푸스, 구충, 촌충, 수면병, 트리파노소마증, 매종, 매독, 나병, 상피병(象皮病), 우울증 등의 질병으로 노예선에서 노예들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라우다 에퀴아노(1745-1797, 미국에서 자서전을 쓴 첫 번째 흑인) 같은 이전에 노예였던 이들의 직접적인 증언은 노예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상황을 묘사한다.
The owners of slave ships embarked as many slaves as possible to make the voyage more profitable. They did so by cramming, chaining, and selectively grouping slaves to maximize the use of space. Slaves began to die of lack of oxygen due to these cramped conditions. Portuguese lawmakers passed the Tonnage Act of 1684 in order to slightly improve conditions. Slaves on board were underfed and brutally treated, causing many to die before even arriving at their destination; dead or dying slaves were dumped overboard. An average of one to two months was needed to complete the journey. The slaves were naked and shackled together with several different types of chains, stored on the floor beneath bunks with little to no room to move. Some captains would assign Slave Guardians to watch over and keep the other slaves in check. They spent a large portion of time pinned to floorboards which would wear skin on their elbows down to the bone. Diseases such as dysentery, diarrhea, ophthalmoparesis, malaria, smallpox, yellow fever, scurvy, measles, typhoid fever, hookworm, tapeworm, sleeping sickness, trypanosomiasis, yaws, syphilis, leprosy, elephantiasis, and melancholia resulted in the deaths of slaves on board slave ships. Firsthand accounts from former slaves, such as Olaudah Equiano, describe the horrific conditions that slaves were forced to endure.
돌벤법으로도 알려진 1788년 노예무역법은 노예 무역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영국 노예선의 선내 환경을 규제했다. 그것은 노예제 폐지를 옹호한 윌리엄 돌벤 경이 영국 의회에 제출한 것이다. 처음으로, 운반할 수 있는 노예 숫자에 제한이 가해졌다. 이 법의 조항에 따라, 선박은 톤 당 1.67명의 노예를 최대 207톤 무게까지 운송할 수 있었으며, 그 후에는 톤 당 오직 1명의 노예만 운송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노예선 브룩스 호는 454명을 운송하도록 제한되었는데, 이전에는 609명의 노예를 수송한 적이 있다. 올라우다 에퀴아노는 이 법안의 지지자였지만, 윌리엄 윌버포스(1759~1883) 같은 일부 폐지론자들은 노예 무역의 완전한 폐지가 아니라 단순히 개혁과 규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굳혀질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 노예 숫자는 등록된 총 톤수 대신 갑판 면적으로도 추산할 수 있으며, 이 방법은 오류가 더 적고 보고된 수치와의 편차가 단 6%에 불과하다.
The Slave Trade Act 1788, also known as Dolben’s Act, regulated conditions on board British slave ships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slave trade started. It was introduced to the United Kingdom parliament by Sir William Dolben, an advocate for the abolition of slavery. For the first time, limits were placed on the number of slaves that could be carried. Under the terms of the act, ships could transport 1.67 slaves per ton up to a maximum of 207 tons burthen, after which only one slave per ton could be carried. The well-known slave ship Brookes was limited to carrying 454 people; it had previously transported as many as 609 enslaved. Olaudah Equiano was among the supporters of the act but it was opposed by some abolitionists, such as William Wilberforce, who feared it would establish the idea that the slave trade simply needed reform and regulation, rather than complete abolition. Slave counts can also be estimated by deck area rather than registered tonnage, which results in a lower number of errors and only 6% deviation from reported figures.
노예선의 과밀화에 대한 이 제한적 감소가 선내 사망률을 감소시켰을 수 있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This limited reduction in the overcrowding on slave ships may have reduced the on-board death rate, but this is disputed by some historians.
선원과 승무원
Sailors and crew
18세기와 19세기 초, 노예선의 선원들은 종종 낮은 급여를 받았고 잔혹한 징계와 처우를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질병, 매질 또는 노예 봉기로 인한 선원들의 사망과 더불어 항해 중 선원 사망률은 약 20%에 달했다. 선원들의 환경은 노예들보다 훨씬 나았지만, 여전히 가혹했으며 높은 사망률의 원인이 되었다. 갑판 아래 공간은 노예들이 차지했기 때문에, 선원들은 대서양 항해 기간 내내 외부 데크에서 주거지(쉘터) 없이 생활하고 잠을 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In the 18th and early 19th centuries, the sailors on slave ships were often poorly paid and subject to brutal discipline and treatment. Furthermore, a crew mortality rate of around 20% was expected during a voyage, with sailors dying as a result of disease, flogging or slave uprisings. While conditions for the crew were far better than those of the slaves, they remained harsh and contributed to a high death rate. Sailors often had to live and sleep without shelter on the open deck for the entirety of the Atlantic voyage as the space below deck was occupied by slaves.
질병, 특히 말라리아와 황열병은 선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이었다. 귀환 항해에서 선원 사망률이 높으면 소속항(母港)에 도착할 때 지불해야 하는 선원 수가 줄기 때문에 선장에게는 이익이 되었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귀환 중에 급여를 사기당하는 일이 잦았다.
Disease, specifically malaria and yellow fever, was the most common cause of death among sailors. A high crew mortality rate on the return voyage was in the captain’s interests as it reduced the number of sailors who had to be paid on reaching the home port. Crew members who survived were frequently cheated out of their wages on their return.
노예 무역의 이러한 측면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선원들 사이에서 노예선의 악명은 노예선 선원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강압을 통해서 또는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종종 감옥에서 시간을 보낸 선원들에게 해당되었다.
These aspects of the slave trade were widely known; the notoriety of slave ships amongst sailors meant those joining slave ship crews did so through coercion or because they could find no other employment. This was often the case for sailors who had spent time in prison.
영국 노예선의 선원 중에는 흑인 선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들은 아프리카 또는 카리브해 출신이거나 영국 태생이었다. 연구원들은 생존 기록으로부터 수십 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많은 선장들이 선박 등록부에 선원의 인종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식은 불완전하다. 아프리카 남성 (그리고 때로는 아프리카 여성) 또한 통역사로 일했다.
Black sailors are known to have been among the crews of British slave ships. These men came from Africa or the Caribbean, or were British-born. Dozens of individuals have been identified by researchers from surviving records. However knowledge of this is incomplete as many captains did not record the ethnicity of crew members in their ship’s muster roll. African men (and occasionally African women) also served as translators.
노예 무역의 폐지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아프리카 노예 무역은 1807년 미국과 영국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1807년 노예무역법 폐지에 따라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 무역이 불법화되었다. 미국 법은 1808년 1월 1일에 시행되었다. 그 날 이후, 아프리카를 떠나는 모든 미국 및 영국 노예선은 법에 따라 미국 해군 또는 영국 해군의 나포 대상이 되는 해적선으로 간주되었다. 1815년 빈 회의(나폴레옹 전쟁 후 1814-15년 빈에서 열렸던 국제 평화 회의)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도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데 동의했다. 이 무역은 법적 폐지로 끝나지 않았다; 1807년에서 1860년 사이, 영국 선박들은 1,600척의 노예선을 포획하고 160,000명의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The African slave trade was outlawed by the United States and the United Kingdom in 1807. The 1807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Act outlawed the slave trade throughout the British Empire. The US law took effect on 1 January 1808. After that date, all US and British slave ships leaving Africa were seen by the law as pirate vessels subject to capture by the United States Navy or Royal Navy. In 1815, at the Council of Vienna, Spain, Portugal, France, and the Netherlands also agreed to abolish their slave trade. The trade did not end on legal abolition; between 1807 and 1860 British vessels captured 1,600 slave ships and freed 160,000 slaves.
(노예제) 폐지 이후, 노예선들은 해군 전함의 포획을 피하기 위해 더 빠르고 더 방향 조종이 쉬운 형태를 채택했는데, 가장 선호하는 형태는 볼티모어클리퍼 호였다. 일부는 선체에 항력(끌림)을 유발할 수 있는 해초의 성장을 방지하여 속도를 크게 높인 구리 피복이 장착된 선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비쌌으며,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영국 해군 선박에만 장착되었다. 노예선의 속도는 해적 행위에 재활용하기에 매력적이었고, 또한 포획 후 해군에서 사용하기에도 매력적이었다; USS 나이팅게일과 HMS 블랙 조크는 그러한 선박의 사례다. HMS 블랙 조크는 영국 해군에 복무하면서 주목할만한 경력을 쌓았으며 다수의 노예선을 나포하고 수백 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After abolition, slave ships adopted quicker, more maneuverable forms to evade capture by naval warships, one favorite form being the Baltimore Clipper. Some had hulls fitted with copper sheathing, which significantly increased speed by preventing the growth of marine weed on the hull, which would otherwise cause drag. This was very expensive, and at the time was only commonly fitted to Royal Navy vessels. The speed of slave ships made them attractive ships to repurpose for piracy, and also made them attractive for naval use after capture; USS Nightingale and HMS Black Joke were examples of such vessels. HMS Black Joke had a notable career in Royal Navy service and was responsible for capturing a number of slave ships and freeing many hundreds of slaves.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를 실어 나르는 노예선에 대한 보험 인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런던 로이드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Attempts have been made by descendants of African slaves to sue Lloyd’s of London for playing a key role in underwriting insurance policies taken out on slave ships bringing slaves from Africa to the Americas.
- 출처 : 「Slave ship」, Wikipedia(en), 2022.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