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볼리즘 건축


나카진 캡슐 타워, 구로카와 기쇼, 1970~1972. via Wikimedia Commons

메타볼리즘(메타보리즈무, 신진대사, 신친타이샤 ;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대신[代身] 생기거나 들어서는 일)은 건축적 메가스트럭처(거대구조)에 대한 아이디어와 유기적 생물학적 성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융합한 전후 일본의 건축 운동이었다. 1959년 CIAM 회의에서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소개됐으며, 단게 겐조(1913~2005)의 MIT 스튜디오 학생들이 그 아이디어를 시험적으로 테스트됐다.

1960년 도쿄세계디자인컨퍼런스를 준비하는 동안 기쿠타케 키요노리(1928~2011), 구로카와 기쇼(1934~2007), 마키 후미히코(1928~)를 비롯한 젊은 건축가 및 디자이너 그룹이 메타볼리즘 선언의 출간을 준비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생물학적 과정을 포함한 다양한 출처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선언은 「해양도시(海洋都市)」, 「공간도시(空間都市)」, 「무리조형을 향하여(群造形へ)」, 「물질과 인간(物質と人間)」이라는 4개의 에세이 시리즈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바다에 떠 있는 광대한 도시와 유기적 성장을 통합할 수 있는 플러그인 캡슐 타워를 위한 디자인도 포함되었다. 비록 세계디자인컨퍼런스를 통해 메타볼리스트들이 국제 무대에 노출되었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는 대체로 이론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메타볼리즘의 원칙을 적용한 소규모 개별 건물이 지어졌으며, 단게의 야마나시 언론방송센터와 구로카와의 나카진 캡슐타워(1972)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의 작업이 가장 집중된 곳은 1970년 오사카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로, 단게가 전체 사이트의 마스터플랜을 담당했고 기쿠타케와 구로카와는 파빌리온을 디자인했다.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메타볼리스트들은 일본을 벗어나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관심을 돌렸다.


메타볼리즘의 기원

근대건축국제회의(CIAM)는 모더니즘을 국제적인 환경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건축가들의 모임으로 1928년 스위스에서 설립됐다. 1930년대 초, 그들은 (미국에서의 새로운 도시 패턴을 기반으로) 도시 개발이 CIAM의 4가지 기능적 범주인 주거, 노동, 교통, 레크레이션에 의해 가이드되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장려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르 코르뷔지에와 다른 건축가들은 모던 아키텍처를 모든 사람에게 홍보하는 것을 목표로 CIAM을 의사-정치적 정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관점은 전쟁 직후 르코르뷔지에와 그의 동료들이 찬디가르에서 건물을 디자인하기 시작한 직후에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었다. 1950년대 초에 이르러 CIAM이 아방가르드적 면모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1954년에 “팀 텐”이라는 젊은 멤버들로 구성된 그룹이 결성됐다. 여기에는 네덜란드 건축가 야콥 바케마(1914~1981)와 알도 반 아이크(1918~1999), 이탈리아 건축가 지안카를로 드 카를로(1919~2005), 그리스 건축가 조르주 캉딜리(1913~1995), 영국 건축가 피터와 앨리슨 스미스슨 및 미국 건축가 샤드라크 우즈(1923~1973)가 포함됐다. 팀 텐 건축가들은 “휴먼 어소시에이션”, “클러스터”, “모빌리티” 같은 개념을 도입했고, 바케마는 도시 디자인에서 건축과 계획의 조합을 장려했다. 이는 CIAM의 기존  네 가지 기능의 기계적 접근방식을 거부한 것이었고, 결국 CIAM의 해체와 종말로 이어지게 된다.

단게 겐조는 네덜란드 오테를로에서 열린 CIAM ‘59 회의에 초대됐다. CIAM의 마지막 회의가 될 이 회의에서 그는 건축가 기쿠타케 기요노리의 두 가지 이론적 프로젝트(탑상도시 그리고 기쿠타케 자신의 집인 하늘집)를 발표했다. 이 발표를 통해 햇병아리 메타볼리스트 운동이 처음으로 해외 청중에게 소개됐다. 팀 텐의 “휴먼 어소시에이션” 개념처럼 메타볼리즘 역시 도시 디자인에서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 있었다.

탑상도시는 도시 전체의 인프라를 수용하는 300m 높이의 탑이었다. 여기에는 교통, 서비스 및 조립식 주택 제조 공장이 포함됐다. 이 타워는 철골로 제작되어 조립식 주거 캡슐이 부착될 수 있는 수직 “인공 대지”였다. 기쿠타케는 이들 캡슐이 50년마다 자가-갱신을 거쳐 도시가 나무의 가지처럼 유기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산비탈에 지어진 하늘집은 쌍곡포물선 쉘 지붕이 있는, 네 개의 콘크리트 패널로 지지되는 플랫폼이다. 이 건물은 수납 유닛으로 구분된 단일 공간으로, 바깥쪽 가장자리에 주방과 욕실이 있다. 후자의 두 공간은 집의 용도에 맞게 이동할 수 있도록 디자인됐으며, 실제로 50년 동안 약 일곱 번 이동 및/또는 조정이 이루어졌다. 한때는 두 실 사이에 작은 어린이 크기의 출입문이 있는 작은 어린이 방이 1층 바닥에 붙어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단게는 매사추세츠 공대로 가서 4개월 동안 초빙교수로 일하게 된다. 오테를로에서 기쿠타케의 프로젝트를 접한 그는 5년차 프로젝트를 보스턴 만 물 위에 건설될, 25,000명 주민이 거주하는 주거 공동체를 위한 디자인으로 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단게는 슈퍼-스케일 도시보다 인간적인 연결을 제공할 수 있는 디자인의 새로운 프로토타입을 기반으로 도시 디자인을 제작하려는 욕구를 자연스럽게 느꼈다. 그는 “메이저”와 “마이너” 도시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것이 나무의 줄기와 잎사귀처럼 주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학생들이 제작한 7개의 프로젝트 중 하나는 그의 비전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프로젝트는 각각의 단면이 삼각형인 두 개의 주요 주거 구조물로 구성됐다. 측면(가로) 이동은 고속도로와 모노레일로 제공되는 반면, 주차장에서 수직 이동은 엘리베이터를 통해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커뮤니티 센터를 위한 열린 공간이 있었고 매 3층마다 가정집이 줄지어 있는 보도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제네바에 있는 세계보건기구 본부에 대한 실현되지 않은 단게의 설계경기 참가작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이며, 두 프로젝트 모두 그의 후기 프로젝트인 “東京計画1960”의 길을 닦았다. 단게는 도쿄세계디자인컨퍼런스에서 보스톤 베이 프로젝트와 도쿄 계획을 모두 발표했다.


1960 도쿄세계디자인컨퍼런스

이 컨퍼런스는 1956년 콜로라도주 아스펜에서 열린 국제디자인컨퍼런스의 일본위원회 대표였던 켄모치 이사무(剣持勇, 1912~1971)와 야나기 소리(柳 宗理, 1915–2011)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아스펜에서 4년마다 열리는 컨퍼런스 대신 1960년에 도쿄를 첫 개최지로 삼아 순회 컨퍼런스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산업디자인협회가 탈퇴한 후 일본건축협회와 일본광고미술협회만 남았지만, 일본 기관 회원 3명이 컨퍼런스를 조직할 책임이 있었다. 1958년에 사카쿠라 준조(坂倉準三, 1901~1969), 마에카와 쿠니오(前川國男, 1905~1986), 단게 겐조가 이끄는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마침 매사추세츠 공대의 객원교수 초빙을 수락한 단게는 그의 후배 동료인 아사다 타카시(浅田孝, 1921~1990)를 컨퍼런스 프로그램 조직에서 자신을 대신하도록 추천했다.

젊은 아사다는 건축 평론가이자 잡지 《신건축》의 전 편집장이었던 카와조에 노보루(川添登, 1926~2015) 그리고 단게의 학생 중 한 명인 구로카와 기쇼 등 두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차례로 이 두 사람은 건축가 오타카 마사토(大高正人, 1923~2010)와 기쿠타케 키요노리, 디자이너 에쿠안 겐지(榮久庵憲司, 1929~2015)와 아와즈 키요시(粟津潔, 1929~2009) 등 재능 있는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했다. 구로카와는 (당시) 소련에서 열린 국제학생 컨퍼런스에서 돌아왔고 마르스크주의 건축 이론가인 니시야마 우조(西山夘三, 1911~1994)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에쿠안은 당시 콘라드 왁스만(1901~1980)이 주최한 세미나에 참여했기 때문에 요청 받았으며(그는 야마하를 위해 새로 디자인한 YA-1 오토바이를 타고 강연장에 도착했다.), 오타카는 마에카와 쿠니오의 주니어 어소시에이트였으며 (그때) 막 도쿄만의 하루미 아파트 건물을 완공한 상태였다. 단게의 전 학부생인 후미히코 마키도 그레이엄 파운데이션의 여행 펠로우십으로 도쿄에 있는 동안 이 그룹에 참여했다.

아사다는 낮에는 정치인, 비즈니스 리더, 저널리스트를 만나 아이디어를 구하고, 밤에는 젊은 친구들을 만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아사다는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류게츠 료칸에 머물면서 진보적인 학자, 건축가, 예술가들의 만남이 장소로 사용했다. 그는 종종 다른 직업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했는데, 그중에 이론물리학자인 다케타니 미츠오(武谷三男, 1911~2000)가 있었다. 다케타니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도 관심이 있는 학자였으며, 이를 그의 과학 이론과 함께 그룹에 가져왔다. 다케타니의 과학 연구 3단계 방법론은 기쿠타케 자신의 3단계 이론 카(일반 시스템), 카타(추상적인 이미지), 카타치(구축된 솔루션)에 영향을 주었고, 그는 이를 광범위한 비전에서 구체적인 건축 형태에 이르는 자신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요약하는 데 사용됐다.

이 그룹은 또한 경제 성장으로 인한 일본의 경이로운 도시 확장에 대한 건축적 해법과 이를 가용 토지 부족과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이세 신궁과 가쓰라 별궁 같은 전통적인 일본 건축에서 발견되는 순환 성장과 재생의 사례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들은 커피숍과 도쿄의 인터내셔널 하우스에서 작업하면서 컨퍼런스를 위한 선언문으로 출판할 수 있는 그들 작업의 모음집을 제작했다.

컨퍼런스는 1960년 5월 11~16일까지 진행됐으며 루이스 칸, 랄프 어스킨(1914~2005), B. V. 도시, 장 프루베, 폴 루돌프, 피터 & 앨리슨 스미스슨 등 84명의 외국인을 포함한 227명의 게스트가 참석했다. 일본 참가자로는 마에카와 쿠니오, 아시하라 요시노부(芦原義信, 1918~2003), 시노하라 카즈오(篠原一男, 1925~2006) 등이 있다.

5월 13일 강연 이후, 루이스 칸은 기쿠타케의 하늘집에 초대되어 메타볼리스트들을 비롯한 여러 일본 건축가들과 긴 대화를 나눴다. 마키가 통역을 맡으면서 그(칸)는 자정이 넘도록 질문에 답변했다. 칸은 디자인에 대한 그의 보편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간과 움직임에 관한 새로운 사고로 새로운 디자인 해법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자신의 리차드의학연구소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많은 메타볼리스트들이 여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메타볼리즘 명칭

기쿠타케의 이론적 해양 도시 프로젝트의 유기적 본성을 논의하는 동안, 카와조에는 유기체와 외부 세계 사이의 물질과 에너지의 필수적인 교환을 상징하는 일본어 단어인 ‘신친타이샤(新陳代謝; しんちんたいしゃ; 문자 그대로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신진대사’)’를 사용했다. 이 단어의 일본어 뜻은 ‘낡은 것을 새 것으로 교체한다’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메타볼리스트) 그룹은 이를 도시의 지속적인 갱신과 유기적 성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컨퍼런스가 세계 컨퍼런스인 만큼, 카와조에는 더 보편적인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느꼈고, 기쿠타케는 그의 일영 사전에서 ‘신친타이샤’의 정의를 찾아보았다. 그가 찾은 번역은 ‘Metabolism’이라는 단어였다.

마린 시티 스케치, 기쿠타케, 1958. via Wikimedia Commons

기쿠타케는 마리나 시티의 사진을 사용하여 중앙 타워에 캡슐이 꽂혀 있는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via Wikimedia Commons

The Metabolism manifesto

이 그룹의 선언문인 「메타볼리즘: 새로운 도시주의를 위한 제안」은 세계디자인컨퍼런스에서 발표됐다. 90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2,000부가 인쇄되었고 행사장 입구에서 구로카와와 아와즈가 500엔에 판매했다. 선언문은 다음의 진술로 시작되었다:

메타볼리즘은 각 멤버가 구체적인 디자인과 삽화를 통해 다가오는 세상의 디자인을 제안하는 우리 그룹의 명칭이다. 우리는 인간 사회를 원자에서 성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하는 생명 과정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생물학적 낱말인 메타볼리즘을 사용하는 이유는, 디자인과 기술이 인간 사회를 표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메타볼리즘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의 제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적극적인 신진대사 발전을 고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 출판물에는 각 멤버의 프로젝트가 포함됐지만 문서의 ⅓은 “오션 시티”에 대한 에세이와 삽화를 기고한 기쿠타케의 작업에 할애되었다. 구로카와는 “스페이스 시티”를, 카와조에는 “물질과 사람(物質と人間)”을, 오타카와 마키는 “무리조형을 향하여(群造形へ)”를 기고했다. 아와즈가 소책자를 디자인하고 카와조에의 아내 야스코가 레이아웃을 편집했다.

선언문에 포함된 프로젝트 중 일부는 나중에 〈비저너리 아키텍처〉라는 제목의 1960년 모마(현대미술관) 전시회에 전시되어 일본 건축가들의 작업이 더 많은 국제 관객에게 노출되었다.

보다 엄격한 팀 텐의 멤버십 구조와 달리, 메타볼리스트들은 멤버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유기적인 형태를 갖춘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룹은 응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겼고 그들의 건축에 이를 반영했다. 특히 “공식” 멤버가 아닌 그룹을 위한 멘토로 남아 있던 단게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해양도시

기쿠타케의 해양도시는 팸플릿의 첫 번째 에세이다. 그것은 이전에 발표한 두 개의 프로젝트인 “탑상도시”와 “마린시티”를 다루었으며, 앞의 두 프로젝트를 결합한 새로운 프로젝트인 “해양도시”를 포함했다. 이들 프로젝트 중 처음 두 개는 “인공 대지”라는 메타볼리스트의 아이디어 뿐만 아니라 “메이저” 및 “마이너” 구조를 도입했다. 카와조에는 1960년 4월 잡지 《근대건축》에 실린 기사에서 “인공 대지”를 언급했다. 팽창하는 도시 내 토지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그는 콘크리트 슬래브, 바다 또는 벽(캡슐을 연결할 수 있음)으로 구성된 “인공 대지”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 “인공 대지”의 창조가 사람들이 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다른 땅을 사용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쿠타케는 마린 시티를 위해 바다에 자유롭게 떠다니며 특정 국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를 제안했다. 도시의 인공 토지에는 농업, 산업, 오락 시설이 들어서고 주거용 타워는 200m 깊이의 바다 속으로 내려간다. 도시 자체는 육지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바다를 가로질러 떠다니며 유기체처럼 유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단 너무 낡아서 거주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은 저절로 가라앉는다.

해양 도시는 탑상 도시와 마린 시티의 조합이었다. 그것은 내부 링에 하우징이 있고 외부 링에 생산 시설이 있는, 서로 접하는 두 개의 링으로 구성돼 있다. 접하는 지점에는 행정 건물이 있다. 인구는 50만 명의 상한선으로 엄격하게 통제됐을 것이다. 기쿠타케는 도시가 마치 세포 분열을 하는 것처럼 스스로 증식하여 확장될 것이라고 구상했다. 이를 통해 도시의 팽창이 생물학적 과정이 될 수 있다는 메타볼리스트 아이디어에 힘을 실어주었다.

공간도시

에세이 「공간 도시」에서, 구로카와는 신도쿄계획(新東京計画案:50年後の東京), 수직벽도시(垂直壁都市), 농촌도시계획(農村都市計画), 버섯모양집의 4가지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단게의 선형도쿄만계획과 달리, 구로카와의 신도쿄계획은 도쿄를 십자형 패턴으로 분산하고 조직화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 십자형을 따라 대나무 모양의 도시를 배치했지만 기쿠타케와 달리 도쿄의 건축법에 따라 도시 타워를 31m 이하로 유지했다(이 높이 제한은 1968년까지 개정되지 않았다).

수직벽도시는 집과 직장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문제를 고려했다. 그는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벽 모양의 도시를 제안했다. 벽의 한 쪽에 주거지가 있고 다른 쪽에 직장이 있을 것이다. 벽 자체에는 운송 및 서비스가 포함된다.

1959년 이세만 태풍에서 살아남은 구로카와는 농촌도시계획을 디자인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이 도시는 지상 4m 기둥 위에 지지된 격자 모양 도시로 구성되었다. 500㎡ 규모의 이 도시는 콘크리트 슬래브 위에 산업과 인프라스트럭처를 농업보다 우선시하는 도시로, 농촌과 도시를 하나의 독립체로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자신의 버섯집이 농촌도시계획의 슬래브 사이로 돋아날 것이라고 상상했다. 이 집들은 다실과 거실 공간을 둘러싸는 벽도 지붕도 아닌 버섯 모양의 뚜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리조형을 향하여

무리조형에 대한 마키와 오타카의 에세이는 몇몇 다른 메타볼리스트의 거대구조를 덜 강조하는 대신, 도시의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요구사항을 더 잘 수용할 수 있는 보다 유연한 형태의 도시계획에 초점을 맞추었다.

오타카는 1949년 졸업 논문에서 인프라스트럭처와 건축의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했고, 마에카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인공 대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계속 탐구했다. 마찬가지로, 마키는 해외 여행 중에 토착 건물의 무리와 형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해 포함된 프로젝트는 신주쿠 역 재개발 계획으로, 역 위의 인공 대지에 리테일, 오피스,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비록 아타카의 작업은 형태가 무겁고 조각적이며 마키의 작업은 넓은 스팬으로 가벼웠지만, 둘 다 무리조형과 관련된 균질한 클러스터를 포함하고 있었다.

물질과 사람

카와조에는 「조개가 되고 싶고, 곰팡이가 되고 싶고, 정령이 되고 싶다; 私はカイ(카이)になりたい, 私はカミ(카미)になりたい, 私はカビ(카비)になりたい」라는 제목의 짧은 에세이를 기고했다. 이 에세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문화적 고뇌를 반영하고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제안했다.


1960~2025 도쿄 플랜

단게 겐조의 1960 도쿄 만 계획. via Wikimedia Commons

1961년 1월 1일 단게 겐조는 NHK의 45분짜리 TV 프로그램에서 도쿄만에 대한 새로운 계획(1960)을 발표했다. 이 디자인은 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수도의 재편과 확장을 위한 급진적인 계획이었다. 이 디자인은 북서쪽 이케부쿠로에서 남동쪽 키사라즈까지 도쿄만을 가로질러 80km에 걸쳐 펼쳐진 일련의 9km 모듈을 사용하는 선형 도시를 위한 것이었다. 단게는 효율적인 통신 시스템이 현대 생활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각 모듈의 경계는 3단계의 순환고속도로로 구성됐다. 모듈 자체는 빌딩 구역과 교통 허브로 구성됐으며 사무실, 정부 행정 및 소매 지구는 물론 새로운 도쿄 기차역 및 도쿄의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포함됐다. 주거 지역은 주 선형 축에 수직으로 평행한 거리에 수용돼야 하고, 사람들은 거대한 A-프레임 구조물 내에 자신의 집을 지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단게와 도쿄대학교 스튜디오의 멤버들인 구로카와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 1931~)가 디자인했다. 원래 그것은 세계디자인컨퍼런스(따라서 제목이 “1960”)에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같은 멤버들이 컨퍼런스 조직에서 작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표가 지연됐다. 단게는 여러 정부 기관으로부터 관심과 지원을 받았지만 프로젝트는 결국 지어지지 않았다. 단게는 1964년에 도카이도(東海道) 메갈로폴리스 플랜을 통해 선형 도시의 아이디어를 확장했다. 이것은 인구를 재분산하기 위해 도쿄의 선형 도시를 일본 도카이도 전역으로 확장하려는 야심찬 제안이었다.

기쿠타케와 구로카와는 단게의 1960년 계획에 대한 관심을 이용해 도쿄를 위한 자신들만의 계획을 세웠다. 기쿠타케의 계획은 육지와 바다의 세 요소를 포함하고 만 주변의 모든 현을 연결하는 순환고속도로를 포함했다. 그렇지만 단게와 달리 단순한 프레젠테이션 그래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외면했다. 구로카와의 계획은 만을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나선 모양의 메가스트럭처들이 셀 안에 떠 있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비록 이 계획은 영화의 일부로 더 설득력 있는 그래픽이 제시되었지만, 프로젝트는 지어지지 않았다.

1980년대 일본의 부동산 붐과 함께, 단게와 구로카와는 자신들의 초기 아이디어(단게는 도쿄계획 1986, 구로카와는 신도쿄계획 2025)를 재검토했다. 두 프로젝트 모두 1960년대 이후 바다에서 매립된 토지를 부유식 구조물과 결합하여 사용했다.


스코페 마스터플랜

스코페 마스터플랜, 1963. via Wikimedia Commons

옛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공화국(지금의 북마케도니아)의 일부였던 수도 스코페 시 재건 계획은 대지진(1963년, 1070명 이상 사망하고 도시 80% 파괴) 이후 (지명경쟁공모에서) 단게 팀이 우승했다. 이 프로젝트는 도시 재건을 위한 국제적인 모범 사례로서뿐만 아니라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는 메타볼리즘 운동이 국제적 규모로 그들의 접근 방식을 실현하는 데 있어 중대한 돌파구다.


교토 인터내셔널 컨퍼런스 센터. via Wikimedia Commons

완공 프로젝트

야마나시 언론방송센터

야마나시 언론방송센터, 단게 겐조. via Wikimedia Commons

1961년 단게 겐조는 야마나시 뉴스 그룹으로부터 고후(甲府市)에 새 오피스를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건물은 두 개의 뉴스 회사와 인쇄 회사뿐 아니라 인접한 도시와 연결될 수 있도록 1층에 카페테리아와 상점을 통합해야 했다. 또한 향후 확장이 가능하도록 유연한 디자인이 필요했다.

단게는 세 회사의 공간을 기능별로 구성하여 공동 시설을 공유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그는 필요에 따라 이러한 기능을 수직으로 쌓았는데, 예를 들어, 인쇄 공장은 적재 및 운송을 위해 도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1층에 배치했다. 그런 다음 엘리베이터, 화장실, 배관 등 모든 서비스 기능을 각각 직경이 5m인 16개의 철근콘크리트 실린더(원통형) 타워로 그룹화했다. 그는 이를 그리드에 배치하고 그 안에 기능별 그룹 시설과 사무실을 삽입했다. 이렇게 삽입된 요소들은 구조물과 독립적이고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배열할 수 있는 컨테이너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유연성 덕분에 단게의 디자인은 칸의 리차드의학연구소와 같은 개방형 사무실 및 서비스 코어가 있는 다른 건축가들의 디자인과 차별화되었다. 단게는 수직 확장의 여지가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원통형 타워를 서로 다른 높이로 마감했다.

단게가 원래 구상했던대로 건물은 1974년에 확장됐지만, 이 건물이 도시 전체에 걸친 거대 구조물로 확장하는 촉매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이 건물은 구조와 적응성을 우선시하여 인간의 사용성을 포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시즈오카 언론방송타워

시즈오카 언론방송타워, 단게 겐조. via Wikimedia Commons

1966년에 단게는 도쿄 긴자 지구에 있는 시즈오카 언론방송타워를 디자인했다. 이번에 단일 코어만 사용했다. 단게는 사무실을 캔틸레버형 철골 및 유리 상자로 배치했다. 캔틸레버는 3층 블록에 단층 유리 발코니로 포인트를 주어 강조했다. 건물의 콘크리트 형태는 알루미늄 거푸집을 사용하여 주조되었으며 알루미늄은 클래딩(피복)으로 남겨져 있다. 비록 단게의 다른 도시 제안에 포함된 “코어-타입” 시스템으로 구상되었지만, 이 타워는 홀로 서 있고 다른 연결이 없다.

나카진 캡슐 타워

나카진 캡슐 타워. via Wikimedia Commons

메타볼리즘의 아이콘인 구로카와의 나카진 캡슐 타워는 1972년 도쿄 긴자 지구에 세워져 불과 30일 만에 완공됐다. 시가현에서 선적 컨테이너를 주로 제작하던 공장에서 조립식으로 제작된 이 건물은 높이 11층과 13층의 2개 코어에 140개 캡슐을 꽂은 구조로 지어졌다. 캡슐에는 당시의 최신 가젯(장치)이 포함됐으며 도쿄 샐러리맨을 위한 소규모 사무실과 피에드아테르(임시 숙소용 작은 아파트; pieds-à-terre; small living unit)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졌다.

캡슐은 철근콘크리트 코어 위에 강판으로 덮인 경량 용접 트러스로 구성된다. 캡슐의 너비는 2.5m, 길이는 4m이며, 한쪽 끝에는 직경 1.3m의 창문이 있다. 유닛에는 원래 침대, 수납장, 욕실, 컬러 텔레비전 세트, 시계, 냉장고, 에어컨이 포함됐지만 스테레오 같은 추가 옵션이 제공되었다. 캡슐은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됐지만 수요가 없었다. 아베 노부오(阿部信夫)는 나카진 캡슐 타워 건설의 설계 부서 중 하나를 관리하는 시니어 매니저였다.

이 타워는 1996년부터 도코모모에 의해 건축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렇지만, 2007년 주민들은 타워를 허물고 새로운 14층 타워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타워는 지금도 여전히 서 있고 약 15명이 거주하고 있다. 2010년, 여전히 안전하게 살 수 있고 내부가 무너지지 않은 포드(본체에서 분리 가능한 부분)는 1박 평균 미화 30달러만 내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이 되었다. 그러나 2017년 현재 많은 캡슐이 리노베이션되어 주거 및 사무실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에어비앤비와 같은 단기 임대 또는 기타 숙박 제공은 건물의 관리 당국에 의해 금지됐다. 타워는 2022년 4월에 철거되었다.

도쿄 힐사이드 테라스

힐사이드 테라스. via Wikimedia Commons

세계디자인컨퍼런스가 끝난 후 마키는 메타볼리스트 운동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지만, 무리조형에 대한 그의 연구는 메타볼리스트들의 관심을 계속 끌었다. 1964년에 그는 구성 형식, 거대구조 및 무리조형의 세 가지 도시 유형을 연구한 『집합유형 조사』라는 책자를 출간했다. 힐사이드 테라스는 아사쿠라 가문의 의뢰로 1967년부터 1992년까지 7단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프로젝트다. 여기에는 주거, 사무실 및 문화 건물 뿐 아니라 덴마크 왕립 대사관이 포함돼 있으며, 도쿄 다이칸야마 지구 내 규야마테 거리 양쪽에 위치하고 있다.

디자인의 실행은 외부 형태가 내부 기능과 사용되는 새로운 재료로부터 더욱 독립적이 되는 단계를 통해 진화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단계에는 상점과 레스토랑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보행자 데크가 있으며, 이는 후속 단계에서 확장되도록 디자인됐지만 원래의 마스터플랜과 함께 아이디어는 이후 단계에서 폐기됐다. 세 번째 단계에서 마키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모더니스트의 격언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에 더 잘 어울리도록 건물 외관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다이칸야마 역 주변 일대 재개발을 촉진하는 촉매가 됐다.


메타볼리즘의 맥락

1945년 3월 10일 공습으로 초토화된 도쿄. via Wikimedia Commons

메타볼리즘은 문화적 정체성에 의문을 가진 일본에서 전후 기간 동안 발전했다. 처음에 그룹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일본 도시의 파괴된 상태와 급진적 재건 기회를 반영하기 위해 ‘번트 애쉬 스쿨(잿더미 학파)’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핵물리학 및 생물학적 성장에 대한 아이디어는 불교의 윤회 개념과 연결됐다. 비록 메타볼리즘은 과거로부터의 시각적 참조를 거부했지만, 전통적인 일본 건축, 특히 이세신궁(단게와 카와조에가 1953년 초대된 곳)의 20년 주기 재건에서 사전 조립 및 재생 개념을 받아들였다. 메타볼리스트들은 신궁이 세워진 신성한 바위를 제국주의적 열망과 서구의 근대적 영향보다 앞선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마키는 『집합유형 조사』에서 단일 구조에 도시 전체 또는 일부를 수용하는 구조를 지칭하기 위해 메가스트럭처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현대 기술의 도움으로 광대한 구조물에 투영된 토착적 형태의 마을 건축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레이너 번햄은 지어진 수많은 프로젝트와 언빌트 프로젝트를 담은 자신의 1976년 책 제목으로 ‘메가스트럭처’를 차용했다. 그는 메가스트럭처를 (수명이 짧은) 모듈식 유닛이 (수명이 긴) 구조적 프레임워크에 부착되는 것으로 정의했다. 마키는 나중에 ‘메가스트럭처’ 디자인 방식을 비판하고 대신에 도시의 무질서를 더 잘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무리조형’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옹호했다.

건축가 로빈 보이드(호주, 1919~1971)는 그의 1968년 저서 『일본 건축의 새로운 방향』에서 메타볼리즘이라는 단어를 아키그램과 쉽게 혼용한다. 실제로, 두 그룹은 모두 1960년대에 등장하여 1970년대에 해체되어 메가스트럭처와 셀이 있는 이미지를 사용했지만, 도시와 건축적 제안은 상당히 달랐다. 비록 그들의 이상은 유토피아적이지만, 메타볼리스트들은 생물학적으로 영감을 받은 건축으로 사회의 사회적 구조를 개선하는 데 관심을 가졌지만, 반면 아키그램은 기계, 정보, 전자 매체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건축은 좀 더 유토피아적이고 덜 사회적이었다.


1970 오사카 엑스포 페스티벌 플라자 옥상. via Wikimedia Commons
기쿠타케의 엑스포 타워. via Wikimedia Commons
구로카와의 도시바 IHI 파빌리온. via Wikimedia Commons

1970 오사카 엑스포

일본은 1970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로 선정됐으며 오사카부 센리힐스(大阪府千里丘陵)의 330ha(3.3㎢)가 장소로 지정됐다. 일본은 원래 1940년에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기를 원했지만 전쟁이 격화되면서 취소됐다. 1940년 티켓을 구매한 백만 명 사람들이 1970년 티켓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단게 겐조는 엑스포 테마위원회에 합류하여 니시야마 우조와 함께 현장의 마스터플랜을 담당했다. 박람회 주제는 “인류를 위한 진보와 조화”가 됐다. 단게는 이소자키 아라타, 오타카, 기쿠타케 등 12명의 건축가에게 개별 요소를 디자인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또한 에쿠안에게는 가구 및 운송 수단의 디자인을, 카와조에에게는 거대한 공간 프레임 지붕에 설치된 공중 전시를 큐레이팅하도록 요청했다.

단게는 엑스포가 주로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큰 축제로 생각돼야 한다고 구상했다. 그는 사이트 중앙에 여러 테마 전시물이 연결된 페스티벌 플라자를 배치했으며, 모두 하나의 거대한 지붕 아래로 통합시켰다. 도쿄만 프로젝트에서 단게는 생명체가 유체와 전자라는 두 가지 유형의 정보 전송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프로젝트는 도시와 관련하여 그러한 유형의 전송을 수행할 나무 줄기와 가지의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카와조에는 페스티벌 플라자의 공간 프레임 지붕을 전자 전송 시스템에, 그 지붕에 연결된 공중 테마 디스플레이를 호르몬 시스템에 비유했다.

카와조에, 마키, 구로카와는 지붕에 통합될 공중 전시회를 위한 디스플레이를 디자인하기 위해 세계 건축가들을 초청했다. 건축가로는 모쉐 사프디(1938~), 요나 프리드먼(1923~2020), 한스 홀라인(1934~2014), 지안카를로 드 카를로(1919~2005)가 포함됐다. 비록 단게는 공간 프레임이 제공하는 유연성 이론에 집착했지만 실제로는 디스플레이를 고정하는 데는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지붕 자체는 카마야 코지와 카와구치 마모루(1932~2019)가 거대한 공간 프레임으로 구상하여 디자인했다. 카와구치는 하중을 안전하게 분산시키기 위해 용접이 필요 없는 볼 조인트를 발명하고, 잭을 사용하여 프레임을 들어 올리기 전에 지면에서 조립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기쿠타케의 엑스포 타워는 경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방문객을 위한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그것은 일련의 객실이 부착된 수직 볼과 연계 공간으로 지어졌다. 디자인은 주조 알루미늄과 유리의 멤브레인(막)으로 피복된 360㎥ 표준 건설 객실을 기반으로 타워의 어느 곳에나 유연하게 배치될 수 있는 유연한 수직 생활을 위한 청사진이었다. 이것은 전망대와 VIP실이었던 다양한 객실 그리고 안내 부스가 된 지상층의 객실 하나를 통해 시연됐다.

구로카와는 타카라 뷰티리온과 도시바 IHI 파빌리온이라는 두 개의 기업 파빌리온에 대한 의뢰를 받았다. 전자는 6개의 포인트 프레임에 연결된 캡슐로 구성되어 단 6일 만에 조립됐다. 후자는 14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유기적 성장을 닮은 헬릭스 시티(나선형 도시)를 기반으로 한 사면체 모듈로 구성된 공간 프레임이었다.

엑스포 ‘70은 메타볼리스트 운동의 절정기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일본의 급속한 경제 성장기가 세계 에너지 위기로 끝나기 전에도, 비평가들은 엑스포를 현실과 동떨어진 디스토피아라고 불렀다. 에너지 위기는 일본이 수입 석유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건축가들이 유토피아적 프로젝트에서 벗어나 소규모 도시 개입으로 이동하면서 디자인 및 계획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졌다.


말기

1970년 엑스포 이후, 단게와 메타볼리스트들은 일본에서 중동과 아프리카로 관심을 돌렸다. 이들 나라들은 석유를 통한 수입에 힘입어 성장하고 있었고, 일본의 문화와 메타볼리스트들이 도시 계획에 가져온 전문 지식에 매료되었다. 단게와 구로카와가 의뢰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기쿠타케와 마키도 참여했다.

단게의 프로젝트에는 파이잘 국왕을 위한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 수도)의 57,000석 경기장과 스포츠센터, 그리고 1974년 범아랍게임(범 아랍 국가 종합 스포츠 경기 대회)을 위한 쿠웨이트의 스포츠 도시가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1973년 제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발발로 두 프로젝트는 모두 보류되었다. 마찬가지로, 테헤란의 새로운 도심 계획도 1979년 혁명 이후 취소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1970년에 도쿄에 있는 쿠웨이트 대사관과 쿠웨이트 국제 공항을 완공했다.

주일 쿠웨이트 대사관, 단게 겐조, 1970. via Wikimedia Commons

쿠로카와의 작품에는 아부다비 국립극장(1977), 바그다드 호텔의 캡슐-타워 디자인(1975), 리비아 사막의 도시(1979~1984) 등이 포함되어 있다.

기쿠타케의 부양식 타워를 위한 비전은 1975년 오키나와 해양 엑스포를 위해 아쿠아폴리스를 디자인하고 지으면서 부분적으로 실현됐다. 100 x 100m의 플로팅 시티 블록에는 연회장, 오피스 및 스태프 40명을 위한 숙박시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히로시마에서 지어진 후 오키나와로 견인됐다. 하와이의 해양 조사를 위한 플로팅 시티, 자연재해 발생 시 모바일(이동식) 주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주택과 사무실이 포함된 플러그인 플로팅 A-프레임 유닛 등 건설되지 않은 플로팅 시티 프로젝트들이 추가로 진행되었다.

1975 오키나와 해양 박람회 아쿠아폴리스 모형, 기쿠타케.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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