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즉물주의 건축


발터 그로피우스(1925–26)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데사우 건물의 학생 숙소동. via Wikimedia Commons
그로피우스와 마이어가 설계한 파구스 공장. via Wikimedia Commons

신즉물주의(독일어 ‘노이에 자할리히카이트’의 번역으로, 때로는 ‘신-엄근진’으로도 번역됨)는 1920~1930년대에 유럽, 주로 독일어권 유럽에서 등장한 모던한 건축에 자주 붙이는 명칭이다. 흔히 ‘노이에스 바우엔’(신구축)이라고도 한다. 신즉물주의는 이 기간 동안 많은 독일 도시를 개조했다.


공작연맹과 표현주의

이 스타일의 초기 예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독일의 현대적 면모를 제공하려는 도이처 베르크분트(독일공작연맹)의 노력 아래 등장했다. 1910년대에는 많은 건축가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활동했으며, 유리 표면과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을 활용했습니다.  이에 대한 예로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아돌프 마이어가 1911년에 설계한 파구스 공장, 또는 브레슬라우(브로츠와프)에 있는 한스 푈치히의 백화점(1912) 등이 있다. 그렇지만, 전쟁의 여파로 이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브루노 타우트 같은 다른 건축가들)은 혁명적인 예술노동평의회에서 활동하며, 특히 비밀스러운 글라스 체인(Glass Chain) 그룹을 통해, 표현주의 건축을 개척했다. 좀머펠트 하우스 같은, 바우하우스의 초기 작업은 이러한 태도에서 이루어졌다. 표현주의의 역동성과 유리의 사용(투명도 또는 색상 효과 여부)이 신즉물주의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데 스테일과 구성주의의 영향

1920년대 중후반 들어 표현주의에서 보다 친숙한 모더니즘 스타일로의 전환은 네덜란드 아방가르드, 특히 데 스테일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 얀 빌스(1891~1972)와 제이콥 요하네스 피터 오우트(1890~1963) 같은 건축가들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로부터 파생된 아이디어를 큐빅 형태의 공공 지원 주택에 적용했으며, 이는 테오 반 되스버그(1883~1931)가 ‘기계 미학’이라고 부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독일 건축가들이 표현주의에서 벗어나도록 이끈 또 다른 영향은 러시아 구성주의, 특히 브후테마스와 엘 리시츠키(1890~1941)의 영향이었다. 엘 리시츠키는 1920년대 초반에 자주 베를린을 방문하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콘크리트 ‘시트로앙’ 주택 같은 작품도 중요한 요소였다. 한편, 에리히 멘델존(1887~1953)은 이미 표현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유선형이고 역동적인 형태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는 1921~22년에 지어진 모세하우스 신문사 건물과 글리비체 바이히스만 공장에서 드러난다.


초기 주택 및 단지

베를린에 있는 브루노 타우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via Wikimedia Commons

아마도 독일 내 ‘신구축’의 초기 사례는 1922 바우하우스 전시회에서 선보인 게오르크 무헤(1895~1987)의 하우스 암 호른, 그리고 같은 해 시카고 트리뷴 타워 설계경기를 위한 그로피우스/마이어의 설계안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새롭고 비-표현주의적 아방가르드 표현 양식에 대한 가장 완전한 초기 탐색은 (독일) 첼레에 있는 오토 해슬러(1880~1962)의 1923~24 ‘이탈리아식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평평한 지붕, 불규칙하고 비대칭적인 평면, 넉넉한 창문이 있는 남향 테라스와 회반죽을 바른 표면이 특징인 신축 공공 지원 주택 구역인, 최초의 모더니즘적 지들룽(문자 그대로 “정착[지]”, “단지”가 더 정확하지만)이었다. 나중에 국제주의 양식에 의해 대중화된 ‘흰 상자(화이트 박스)’ 아이디어와 달리, 이것들은 종종 밝은 색으로 칠해졌다. 이 주택 건축가 중 컬러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브루노 타우트(1880~1938)였다.


뉴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에른스트 마이의 〈지그재그 하우스〉. via Wikimedia Commons

이것의 주요한 확장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사회민주당 행정부에서 에른스트 마이(1886~1970)를 도시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 설계자로 임명하면서 이루어졌다. 마이는 영국의 전원 도시 설계자인 레이몬드 언윈(1863~1940)에게 훈련 받았고, 그의 ‘지들룽’은 오픈 스페이스의 사용에서 전원 도시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햄스테드 전원교외 같은 언윈의 프로젝트에 대한 향수어린 스타일을 완전히 거부했다. 마이의 ‘뉴 프랑크푸르트’는 눈에 띄는 외관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도시 빈곤층을 신속하게 재-수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이후의 신즉물주의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그 선진 기술이 종종 건설 업계를 소외시켰는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장식의 부족과 빠른 시공 속도로 인해 불필요하게 되었다. 마이는 (프랑크푸르트 키친을 개발한) 마르가레테 슈테 리호츠키(1897~2000)와 마트 스탐(1899~1986) 같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다른 건축가들도 고용했다. 마이의 작업의 즉각적인 효과는 조립식 기술도 개척했던, 데사우에 있는 (더 유명한 바우하우스 건물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그로피우스의 1926 지들룽 데사우-토르튼에서 볼 수 있다. 독일이 ‘신구축’ ㅡ 소위, ‘새로운 건축’에 우선하여 ㅡ 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공작연맹의 1927년 바이센호프 단지에서 확인되었는데, 여기서 코르뷔지에와 JJP 오우트의 참석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독일어를 사용했다. 더 나아가, 공작연맹 단지-전시는 그 후 수년간 브로츠와프와 빈에 설치되었다.


기능주의와 최저 주거

브루노 타우트가 설계한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에 있는 아파트. via Wikimedia Commons

신즉물주의 건축가들은, 부분적으로 독일의 전후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 부분적으로는 모든 독일인을 위한 “건강한 주거”를 대비했던 1919 바이마르 헌법 155조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비용 효율적인 주택을 짓는 데 열정을 쏟았다. 이 구절은 최소-허용 바닥 면적, 밀도, 신선한 공기, 녹지 공간으로의 접근, 대중 교통으로의 접근, 그리고 기타 거주 문제의 측면에서 에크시스텐츠미니뭄(최저 생활 주거)의 기술적 정의를 주도했다.

동시에 독일 도시 전반에 걸쳐 이 스타일이 크게 확장되었다. 베를린에서, 건축가-도시 계획 설계자인 마틴 와그너(1885~1957)는 노동조합건물협회(GEHAG)의 후원을 통해, 1925 편자 단지, 1926 ‘톰 아저씨의 오두막’(옹컬-톰-휘터) 및 ‘칼-레기엔-지들룽’ 같은 아파트와 테라스 하우스의 다채로운 개발에 대해 이전의 표현주의자인 브루노 타우트 및 후고 하링(1882~1958)과 함께 작업했다. 타우트의 디자인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모던한 평평한 지붕, 태양, 공기 및 정원에 대한 인도적인 접근, 가스, 전등, 욕실 같은 넉넉한 편의 시설을 특징으로 한다. 정치적 우파 비평가들은 이러한 발전이 ‘일반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 호화롭다고 불평했다. 진보적인 베를린 시장인 구스타프 보스(1873~1946)는 그들을 변호했다: “우리는 사회의 낮은 계층을 더 높은 곳으로 데려오기를 원한다.” 빈의 거마인더바우(지자체 건물) 같은 도시사회주의에서의 유사한 실험들은 양식적으로 더 절충적이어서,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 당국은 새로운 양식에 대한 대중의 승인을 얻기 위해 도박을 하고 있었다.

카를 슈나이더가 설계한 함부르크 아파트(1929). via Wikimedia Commons

다른 지역에서는 카를 슈나이더가 함부르크에서 주택 단지를 설계했으며,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는 베를린의 아프리카니셰 슈트라세에서 저비용 주택을 설계하고, 1926년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설계했다. 한편, 다머슈토크에서는 오토 해슬러, 그로피우스 등 여러 건축가의 설계로 직선적으로 배열되고 비평가들에게는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평을 받은 차일런바우(대상[좁고 길게 되어 띠와 같이 생긴 모양] 주택 건축) 아파트가 지어졌다. 기능주의라는 용어는 신객관주의의 다소 엄격하고 불필요한 요소가 없는 정신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1925년 아돌프 베네(1885~1948)가 그의 저서 『데어 모데르너 츠베크바우』(근대의 기능 본위 건축물)에서 처음으로 언급했다. 1926년, 거의 모든 모더니즘적 독일 건축가들이 ‘데어 링’(반지회)이라는 단체로 조직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데어 블록’을 결성한 파울 슐체 나움부르크(1869~1949) 같은 나치 건축가들로부터 곧  비판을 받았다. 1928년에는 CIAM이 결성되었고, 초기 회의에서는 독일 건축가들의 사회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어 에크시스텐츠미니뭄(최저 생활 주거)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신즉물주의의 확산

ADGB 노동조합 학교 학생 기숙사(1928-1930). via Wikimedia Commons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는 소위 ABC 그룹이라고 불리는 좌파 기술 지향적 운동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마트 스탐과 (가장 위대한 작업이 로테르담에 있는 반 넬레 공장의 유리 같은 넓은 공간인) 하네스 마이어(1889~1954) 같은 엘 리시츠키의 협력자들로 구성되었다. 신즉물주의의 깔끔한 선은 또한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이에 의한 학교와 공공건물, 베르나우에 있는 하네스 마이어의 ADGB 노동조합학교에서 그리고 막스 타우트(1884~1967)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마틴 와그너 아래 베를린에의 경찰 행정 청사에도 사용되었다. 스트림라인 모던 양식의 영화관에 큰 영향을 미친 영화관은 에리히 멘델손(키노-우니베르줌, 1926)과 한스 푈치히(키노 바빌론, 1928~29)가 디자인했다. 보다 전통적인 석조 건물에 새로운 형태를 사용한 복합 양식은 푈치히가 베를린의 방송국과 프랑크푸르트의 IG 페르번 빌딩으로, 그리고 에밀 파렌캄프(1885~1966)가 물결 모양의 베를린 셸-하우스에서 개발했다. 한편, 에리히 멘델손의 건축은 베를린의 콜룸부스-하우스(1950년대 철거), 슈트트가르트(1960년대 철거)와 켐니츠 및 브로츠와프에 있는 쇼켄 백화점 같은 곡선형 백화점에서 볼 수 있는, 상업을 위한 ‘역동적 기능주의’로 발전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뮌헨의 건축 주류가 여전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하이마트슈틸”(고향/본국 양식)을 선호하는 동안 뮌헨에서 로베르트 보르횔저(1884~1954)와 로베르트 푀베를라인(1883~1968)은 ‘바이에리슈 포스트바우슐레’를 설립하고 많은 모더니즘 우체국을 건설했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에 대한 독일의 재정적 의존도 때문에 ‘신구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0년에 마르크스주의 바우하우스 디렉터인 (동료인 루트비히 힐버사이머(1885~1967) 및 마트 스탐과 함께 노동 계급과 집합주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하네스 마이어가 해임되어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투겐트하트 주택으로 부자에게 사치품을 공급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 바우하우스를 사립 학교로 전환시킨) 미스 판데어로에로 대체된 것이 상징하듯 건축계가 정치적으로 양극화되는 동안,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서 계획된 많은 단지와 프로젝트들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해산 및 망명

한스 샤로운이 설계한 베를린-지멘슈타트의 아파트. via Wikimedia Commons

1930년대 초반까지 독일 내에서 중요한 작업이 계속되었으며, 특히 베를린의 ‘링’의 지멘스쉬타트 단지는 눈에 띄는 사례였다. 이 단지는 한스 샤로운(1893~1972)이 설계했으며, ‘존재 최저(Existenzminimum)’ 공식을 보다 개별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분위기는 점점 악화되었고, 공개적인 적대적 언론 보도와 함께 유대인 또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건축가들에게 독일을 떠나라는 직접적인 압력이 가해졌다. 많은 독일의 저명한 모더니스트들이 소련으로 이주했다. 1920년부터 모스크바에는 러시아 국영 기예 학교인 브후테마스가 설립되어 있었으며, 이는 바우하우스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 엘 리시츠키를 통한 교류로 양측 간의 중요한 문화적 연결이 이루어졌다. 당시 러시아는 노동자 주택으로 이루어진 도시 전체를 건설하려는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의 전문 지식을 습득하는 데 눈을 떴다. 에른스트 마이, 마르트 스탐, 마르가레테 슈테 리호츠키는 1930년에 소련으로 이주하여 마그니토고르스크 같은 신도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후 하네스 마이어의 소위 ‘바우하우스 여단’과 브루노 타우트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실험은 시작되기도 전에 거의 끝나버렸다. 작업 조건은 절망적이었고, 자재 공급은 불가능했으며, 노동자들은 미숙하고 의욕도 없었다. 1932년 2월, 소비에트 궁전 설계 공모전에서 ‘퇴행적’으로 간주된 작품이 채택되자, 이는 국제 모더니스트 커뮤니티, 특히 르코르뷔지에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써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가장 큰 고객을 잃게 되었다. 러시아 내부 정치로 인해 건축가 연합들 간에 치열한 내부 갈등이 발생했으며, 외국 ‘전문가’들에 대한 악의적인 캠페인도 전개되었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경험에서 살아남지 못 했다.

다른 사람들은 독일을 떠나 일본으로 가거나, 이스탄불에 있는 상당한 규모의 독일-망명 커뮤니티로 떠났다. 모더니스트 커뮤니티의 주요 건축가들은 결국 케냐, 멕시코, 스웨덴 같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했다.

아돌프 라딩이 설계한 브로츠와프에 있는 약국. via Wikimedia Commons

다른 사람들은 이소콘 프로젝트와 영국 내 기타 프로젝트를 위해 떠났다가, 결국 미국으로 갔는데, 발터 그로피우스, 브로이어 및 베를린 도시 계획가 마틴 와그너가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한 세대의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더 대중적으로, 미국에서는 필립 존슨(1906~2005)과 헨리-러셀 히치콕(1903~1987)의 획기적인 ‘국제양식’ 모마 전시와 1932년 책의 출판이 미스, 그로피우스, 르코르뷔지에에 중점을 둔 이 양식의 공식적인 “캐논(규범; 계율)”을 확립했다. 이들 세 사람에 대한 관심은 ‘노이에스 바우엔’의 사회민주주의적 맥락과 국가 지원 대량 생산 주택의 건축적 논리에 대한 관심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존슨과 히치콕은 ‘미래의 일부 프로레타리아 슈퍼맨’을 위해 건축을 한다고 비난한 하네스 마이어 같은 ‘광신적인 기능주의자’들을 조롱했다. 비록 미국에 수입될 때 그 사회적 의미와 지적 엄밀함이 제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즉물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전후 현대 건축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즉물주의를 처음부터 건축 양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실무자들로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로피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건물이 “거짓말과 게임이 없는 내부의 법칙에 따라 형성되어야” 하며, 구축의 관행이 장식의 사용과 모든 양식적 분류를 초월해야 한다고 믿었다. 에르빈 안톤 구트킨트(1886~1968)의 1919년 저서로부터 시작된 독일어 문구인 ‘노이에스 바우엔’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 ‘바우엔’이 ‘건축’이 아닌 ‘건설’의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갤러리

브루노 타우트, 〈톰 아저씨의 오두막〉, 베를린. via Wikimedia Commons
1923년에 에리히 멘델존이 개조한 〈루돌프 모세 출판사〉. via Wikimedia Commons
브로츠와프에 있는 한스 푈치히가 설계한 백화점. via Wikimedia Commons
1928-29년 한스 푈치히가 설계한 베를린의 〈키노 바빌론〉.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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