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다 루이스 헉스터블


에이다 루이스 헉스터블, 1976 ©Lynn Gilbert. via Wikimedia Commons

에이다 루이스 헉스터블(결혼 전 성은 ‘랜드먼’; 1921.3.14.~2013.1.7.)은 건축 비평가이자 건축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헉스터블은 북미에서 건축 및 도시 디자인 저널리즘을 확립했고 도시 환경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였다. 1970년, 그녀는 사상 최초로 비평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81년, 그녀는 맥아더 펠로우로 지명되었다. 1984년에 역시 건축 비평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폴 골드버거는 1996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이다 루이스 헉스터블 이전에는, 건축이 대중적인 소통의 영역이 아니었다.” 예일대 건축학장인 로버트 A. M. 스턴은 “그녀는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이자 위대한 보존론자이며 모든 다른 비평가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중심 행성이었다.”고 평가했다.


초기

헉스터블은 1921년 3월 14일 뉴욕시에서 리아 로젠탈 랜드먼과 마이클 루이스 랜드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941년 헌터 칼리지를 우등으로 졸업한 후, 뉴욕대학교 미술학부에서 건축사를 공부했다. 헌터 칼리지 재학 중에는 대학 연극 제작을 위한 무대 디자인도 맡았다.

1942년, 그녀는 산업 디자이너 L. 가스 헉스터블과 결혼했으며, 1942년부터 1950년까지 뉴욕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계속했다. 1950년부터 1951년까지 그녀는 미국-이탈리아 풀브라이트 위원회의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에서 1년을 보냈다.


1962년 펜 스테이션의 중앙홀, 철거 2년 전. 헉스터블은 이렇게 썼다: “펜 스테이션이 파르테논 신전은 아니지만, 그것은 마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금으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는 뛰어난 디테일의 트라버틴으로 된 9에이커 크기의 건물을 지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가치는 차치하고서라도, 훌륭한 건축의 상실된 예술을 기념하는 기념물이다.”. via Wikimedia Commons

경력

그녀는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뉴욕 현대미술관(모마)에서 건축 및 디자인 부문 큐레이터의 어시스턴트로 근무했다. 그녀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탈리아 건축과 공학을 연구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모마를 떠났다. 1958년, 그녀는 또한 구겐하임 펠로우십을 받아 미국 건축의 구조 및 디자인 발전을 연구했다. 그녀는 1950년부터 1963년까지 《프로그레시브 아키텍처》와 《아트 인 아메리카》의 객원편집자로 활동했으며, 1963년에는 《뉴욕타임스》의 첫 건축 비평가로 임명되어 1982년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그녀의 건축 저술은 인문학적 의미와 예술적 힘에 대한 것이었지만, 시민 참여가 누락된 프로젝트에 대한 불만도 담겨 있었다. 그녀는 《뉴욕타임스》의 1면에 등장하면서 건축을 대중 소통의 더 일반적인 부분으로 끌어올렸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그녀의 대중적인 의견은 큰 영향을 미쳐 《뉴요커》 카툰에서 기념될 정도였다. 그녀는 『그들이 과연 브루크너 대로를 완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포함하여 다수의 프로젝트에 대해 그레이엄 재단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그녀는 1974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펠로우로 선출되었고 1989년 미국철학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81년, 헉스터블은 맥아더 펠로우십을 받은 후 《뉴욕타임스》를 떠났다. 그녀는 1974년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펠로우로 선출되었으며, 1989년에는 미국 철학 학회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96년에는 뉴욕시 박물관으로부터 도시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4 달러’ 어워드를 수상했다.

헉스터블은 1997년부터 2012년까지 《월스트리트 저널》의 건축 비평가로 활동했다. 그녀의 마지막 기사는 2013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게재되었다.

공공 미학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저술한 존 코스토니스(1937-)는 그녀를 영향력 있는 미디어 비평가의 대표적인 예로 사용했으며, “[그녀의] 일요일 칼럼에서 쏟아진 끊임없는 포화로 인해… 뉴욕의 디벨로퍼, 정치인, 관료들이 몇 년 동안 몸을 숨겼다.”고 언급했다. 그는 기초와 몇 개의 대들보가 있는 건설 현장의 바닥에서 건설 노동자들이 “에이다 루이스 헉스터블이 이미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카툰을 재현하기도 했다.

카터 와이즈먼(1945-)은 “헉스터블의 지적 엄격함과 높은 디자인 기준에 대한 고집은 그녀를 국가 건축계의 양심으로 만들었다.”라고 썼다.

그녀는 2004년 ‘펭귄 라이브스’ 시리즈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전기를 포함하여, 건축에 관한 10권 이상의 책을 썼다. 그녀는 1965년에 뉴욕시 랜드마크보존위원회 설립의 주역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동시에, 그녀는 1968년에 도시의 과거를 다루는 것에 대해 엄한 비평가이기도 했으며, 1968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옛 도시를 그 자리에 두고, 그곳에서 유령이 편히 머물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발 부탁입니다. 신사 여러분. 마차, 의상, 가발, 무대 세트, 귀엽고 오래된 가게,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재창조’, 가짜 꼬마-뉴욕 같은 것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것은 보존이 아니라 왜곡입니다.

린 길버트(1938~)가 쓴 헉스터블의 구술 전기는 『특별한 열정: 우리 시대를 형성한 여성과의 대화』에 수록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건축계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어 수많은 심사위원과 위원회에 초대되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프리츠커 건축상(미국)과 다카마쓰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일본)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그녀는 또한 게티 센터, 게티 빌라 등 여러 건축 선정 및 건물 디자인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죽음 및 아카이브

헉스터블은 2013년 1월 7일 맨해튼에 있는 메모리얼 슬론 케서린 암센터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사망 직후, 게티 연구소는 1921년부터 2013년까지 헉스터블의 원고와 필사본, 보고서, 서신, 문서, 메모, 스크랩, 복사본, 특히 현대 사진가들의 건축 및 디자인 원본 사진으로 가득한 연구 파일 등 93개의 상자와 19개의 파일 서랍으로 구성된 헉스터블 아카이브를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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