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세


유리세(glass tax)는 영국에서 징수한 세금이다. 유리의 원재료에 대한 과세이지만, 사실상 유리에 대한 직접세로서, 1695년부터 1699년까지 그리고 1746년부터 1845년까지 징수되었다. 17세기의 유리세는 빈곤층의 실업을 유발하여 4년 만에 폐지되었고, 18~19세기의 유리세는 거듭된 세금 인상으로 영국의 유리공업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1835년의 감세를 거쳐 제2차 필(로버트 필) 내각 시기인 1845년 폐지되었다.


17세기의 유리세

17세기 왕정복고시대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유리공업이 정착되어 양적, 질적으로 진보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프랑스산 유리제품이 유행하고 있었다. 1688년 대동맹전쟁(9년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에서 유리 수입이 금지되어 영국의 유리공업이 번창하였으나, 1695년 제정된 1694년 세법에 따라 유리와 유리 제조에 필요한 석탄에 세금이 부과되었다. 장기 공채의 재원 확보를 목적으로 한 과세로 모든 유리제품이 과세되었고, 당시 이미 널리 퍼져있던 유리병도 과세를 면할 수 없었다.

유리공업에 있어 유리세가 큰 부담인 것은 분명하고, 사과주 용기가 유리병에서 나무통으로 되돌아갔다. 또 유리 제품을 수출할 경우는 유리세를 환급받을 수 있지만, 절차가 번잡한데다 국내 수요 감소로 인해 수출 제품 가격을 낮출 수 없어 많은 해외 판로를 잃었다.

1698년에는 서민원(영국 의회 하원) 조사위원회에서 유리공업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유리세 세율이 절반으로 낮아졌고 유리병의 라이벌인 석기와 도기에 대한 세금도 함께 철폐되었다. 그러나 이 시책은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했고, 유리 공장들은 유리 생산량을 줄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에 따라 유리공업에서 사용되는 석탄의 양이 크게 저하되어, 원래 세금 징수가 어려웠던 것을 석탄세의 세수 감소로 세금 징수 자체가 채산성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또 유리공업의 축소로 인해 빈곤층이 일자리를 잃는 문제도 생겼다. 그 결과, 유리세는 1699년에 폐지되었다.


18~19세기의 유리세

유리세를 도입한 헨리 펠럼 총리 초상화 (1751). via Wikimedia Commons

오스트리아 계승전쟁과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진압을 위한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1746년 헨리 펠럼(1694-1754) 총리가 다시 유리세를 도입했다. 당시 유리세에서는 유리 수입 관세를 부과하고, 국내에서 생산된 유리에는 원재료에 대해 과세했다. 세율은 판유리, 크라운 유리, 플린트 유리 등 백색 유리에 대해서는 1헌드레드웨이트(영국 112파운드에 해당; 50.8 kg) 당 9실링 4펜스, 유리병 등 녹색 유리에 대해서는 1헌드레드웨이트 당 2실링 4펜스였다. 유리세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서 징수되었으며 아일랜드 왕국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유리 공장의 소유자는 유리 제조에 사용하는 공장, 용광로, 유리 저장소를 관세국에 등록하고, 조업 개시 전에 신고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당국의 감독 하에 운영했다. 19세기 역사가 스티븐 도웰(1833-1898)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는 영국의 유리 산업이 펠럼이 도입한 유리세로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1777년, 수상이었던 프레드릭 노스(1732-1792) 경은 유리 원료의 수입 관세를 폐지하고, 대신 유리 제품의 수입 관세율을 인상했다. 국내에서 제조된 유리에 사용되는 원재료에 대한 과세에서는 세율을 약 2배 인상하여 판유리, 플린트 유리, 스테인드글라스는 18실링 8펜스, 크라운 유리, 박판 유리는 14실링, 브로드 시트 유리는 7실링, 유리병용 유리, 원예용 유리는 3실링 6펜스로 정했다. 이후 노스 내각 시기인 1779년, 1781년, 1782년, 제1차 피트 내각 시절인 1794년, 제2차 피트 내각 시절인 1805년, 퍼시벌 내각 시절인 1812년에 세금이 인상되었다. 1812년의 증세 후 세율은 플린트 유리가 4파운드 18실링, 크라운 유리와 박판 유리는 3파운드 13실링 6펜스, 브로드 시트 유리는 1파운드 10실링, 유리병용 유리는 8실링 2펜스였다.

1786년 이든 조약(영·불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영국의 유리 제품이 프랑스로 수입되기 시작했고, 1793년 시점의 세수는 잉글랜드에서 170,612파운드, 스코틀랜드에서 12,777파운드였다. 1794년의 증세로 유리공업이 쇠퇴하여, 1815년 시점의 세수는 424,787파운드(수출용 유리로 환급된 세금 428,346파운드를 뺀 값)가 되었다.

거듭된 증세로 판유리 세수가 대폭 저하되었기 때문에 1819년에 판유리 세율이 3파운드로 인하되었고, 1825년에도 재차 감세되었다. 이후 1828년 시점의 세수가 572,892파운드(수출용 유리로 환급된 세금 379,365파운드를 뺀 값)가 되었지만, 영국의 유리공업이 회복되지는 못했고, 1830년 제4대 준남작 헨리 퍼넬 경이 「금융 개혁에 대하여」에서 유리세가 유리산업에 미치는 악영향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그레이 백작 내각의 재무장관 올트랩 자작 존 스펜서가 1831년 예산안에서 유리세 폐지를 제안했지만 가결되지 않았다. 이 해의 세수는 잉글랜드에서 461,882파운드, 스코틀랜드에서 70,256파운드였다.

1835년 관세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리세가 유리공업에 대한 직접세와 같은 효과를 가졌기 때문에 유리의 사용이 줄어들고 유리공업의 발달을 방해하여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장애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유리세를 ‘이보다 더 반대할 이유가 많은 세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폐지를 권고했다. 이 밖에 렌즈 공장에서는 징세 기준으로 인해 악영향을 받았다. 즉, 대략적으로는 유리가 만들어질 때마다 세금이 징수되었기 때문에, 렌즈의 제작에 실패해, 한 번 녹여 다시 제작하는 경우는 렌즈 유리가 2매 만들어진 것으로서 징세되어 버린다. 이에 따라 조지 돌런드(1774-1852)의 돌랜즈사(Dollond’s) 등이 여러 번 세금을 징수당하는 형태가 됐고, 결국 고품질 광학렌즈나 소형 유리장식품이 유리세를 면제받을 수 있도록 규정이 변경됐다.

1835년 보고서에 따라 플린트 유리의 세율이 6파운드에서 2파운드로 낮아지자 탈세 플린트 유리가 거의 소멸되고 폐업한 공장이 조업을 재개했으며 새로운 공장도 건설되었다. 그리고 제2차 필 내각기인 1845년에는 유리세가 폐지되었다. 이 해의 유리세 세수는 약 60만파운드였다고 한다.

유리세가 폐지되었을 때, 유리세는 의학 잡지 《란셋》에서 ‘300% 이상이라는 거액의 유리세는 위생면에서 볼 때, 정부가 국가에 가하는 가장 잔혹한 타격이며, 곡물법 등 필수품에 대한 세금과 동등한 잔혹함이다. (중략) 시내 주거에 빛이 결핍된 이유 중 하나로 유리의 막대한 가격을 들 수 있으며, 도시의 불건강함의 주된 원인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라고 비판받았다.

수정궁. via Wikimedia Commons

윌슨 월에 의하면, 유리세의 폐지에 의해 렌즈의 제작 실패에 세금이 부과되는 일이 없어져, 신제품의 개발에 걸림돌이 없어졌다. 이로써 찬스브러더스가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 장소인 수정궁에 사용할 유리를 공급할 수 있었다. 태드 로건에 따르면, 유리세가 폐지된 뒤 잉글랜드 유리업체들은 그동안 보헤미아 유리가 주류를 이뤘던 유색유리 생산에 뛰어들 수 있게 됐고, 하이엔드(고급형)에서는 토머스 웹, 제임스 포웰, 크리스토퍼 드레서 등의 미술품 같은 유리 장식, 미들엔드(중저가형)에서는 화병을 주로 하는 장식품이 자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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