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임의 아홉 가지 형식에 관한 잡설

이중용 건축편집자

건축이벤트들의 특성 구분 중 가장 쉬운 방법이 형식이다. 세미나, 포럼, 워크숍, 전시 등 이벤트의 형식을 통해 개별 이벤트의 분위기와 내용 등 많은 것들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간혹 내용에 부합하는 형식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이벤트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작업 과정을 제시하고 초빙한 전문가에게 견해를 듣는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콜로키움(규범 표기는 ‘컬로퀴엄’)이라는 용어를 명시하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세미나와의 차이점을 느끼기 어렵다거나, 전문가들이 성과를 공유하는 심포지엄 행사 같은데 포럼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필요한 내용을 얻을 수 있다면 형식 자체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포럼이 고대의 신전과 아고라에서 행해지던 포럼의 형식과 의미를 굳이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 형식이 없던 세대는 형식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지만 형식을 이미 공기처럼 편안히 느끼는 뒷 세대에게 중요한 건 내용일 뿐, 본래의 형식이 어떻게 변형되든 큰 문제는 아니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을까? 형식이란 왜 필요할까?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형식은 아무래도 좋을 텐데 어째서 몇 가지 형식만 남겨졌고 또 우리는 거기에 맞춰 이벤트를 만들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책을 쓰고 싶은 건 아니다. 형식의 유효함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다. 하나의 모임을 가정할 때, 해당 모임이 전문성을 유지하면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려면 이벤트 형식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을까? 간단한 트렌지스터 라디오를 분해하듯 하나의 생각 안에 제대로 작동하는 이벤트 형식의 구성을 밝힐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다만 다이어그램을 스케치하며 여러 잣대들을 넣고 빼는 과정에서 여전히 미진하지만 그나마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정리된 하나의 가정을 설명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아래 내용이다.

일단, 세미나가 가장 기본이 된다. 

세미나(Seminar) : 선생/전문가와 학생들/사람들이 모여 특정 주제에 대해 훈련, 토론, 연구하는 모임. 발표회, 연구회, 토론회 등.

세미나는 전문성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의 기본 단계부터 심화 단계에 이르기까지 가장 일반적이면서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형식이다. (초기에 반드시 세미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워크숍 전문 모임도 있을 수 있고 강연이나 전시 중심 모임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제시하는 방식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며, 특정 형식에 치우치기보다 다양한 형식을 두루 활용하는데 적합한 구성을 생각해 본 것에 불과하다.) 세미나는 다른 형식에 비해 비교적 유연하며, 참여한 사람들 모두 동일한 목표와 과정을 공유하는 한편 주체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고 장기적인 프로그램 구성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모임의 초기 형식으로 고려해 볼 만하다. 세미나라는 말이 ‘씨를 뿌리다'(seminare)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는 모임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꽤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이 이벤트 형식을 활용하는 이유는 지식 체계 구축, 최신 정보 습득, 다양한 견해 보완, 성과 공유 및 외부 확산, 연대 형성 등을 통해 전문성을 유지하고 새로운 방향과 방법을 열어나가기 위함이며, 이미 알려진 형식들의 유용함이 어느 정도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압축하여 두 개의 축(axis) 안에 배열할 수 있는데, 하나는 지향성에 의거한 ‘대내ㅡ대외’의 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강도와 관련한 ‘기본ㅡ심화’의 구분을 따르는 것이다. 아래 그림은 세미나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의 경우에 이미 알려진 다양한 형식의 이벤트들을 축의 특성에 따라 적당히 배열해 본 것이다.

어디까지나 모임 내부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세미나와 그 주변 형식들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컬로퀴엄(Colloquium) : 참가자가 주제와 범위를 정하는 세미나, 토론회 등의 교육 프로그램. 권위 있는 전문가를 초빙하여 다른 사람들의 미숙한 의견을 바로잡아주는 점이 세미나와 다름.

컬로퀴엄은 비교적 낯설기 때문에 사용 빈도가 낮은 형식의 명칭이다. 굳이 세미나와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만큼 명칭에 어울리는 행사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케임브리지 사전에는 컬로퀴엄을 많은 이들이 공식적으로 토론하는 회의 정도로 규정하고 있는데, 사실 그 정도로는 형식의 변별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국내에서 정의하고 있는 사전과 지식백과 등의 내용을 근거로 위와 같이 정리했고, 건축설계 과정으로 치면 ‘크리틱’과 유사하다. 발표와 토론이라는 세미나의 기본 구조를 보완, 확장하는 형식으로 보면 적당할 것 같다.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명칭을 전환함으로써 참여자들의 마음가짐을 좀 더 격조있게 만들 수 있다면, 바로 그런 것들이 형식 자체가 갖는 힘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콘퍼런스(Conference) : 공통 관심 사안에 대해 토론/협의하기 위한 개별 또는 여러 조직 구성원의 대규모 모임 또는 회의.

세미나보다 주기를 짧게 하여 공통의 이슈를 공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컨퍼런스(규범 표기는 ‘콘퍼런스’)가 적합하다. 트렌드나 사건이 빠르게 회전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모임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 체계를 활용하여 상황의 요약 정보 제시와 그에 따른 궁금증을 바로바로 해소할 수 있는 형식이 필요하다. 세미나가 공통의 목표 아래 주제들을 나누고 구성원 제각각이 나아가는 과정을 공유하여 모임의 질을 높인다면 컨퍼런스는 모임 전체가 공통적으로 대처해야 할 최신 정보들을 공유하는 장에 가깝다. 방향은 지극히 내부적인데 더러 외부 행사에서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에도 대개는 주최측 및 관련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숙지해야 할 최신 정보를 다루는 쪽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주로 공통의 의견을 확인하는데 유용한 형식이다. 전문 분야 정보를 제공하는 뉴스레터 서비스도 일종의 동종 업계 컨퍼런스를 대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동향과 용어 변화 등을 꾸준히 체크해야 하므로, 컨퍼런스 형식의 모임을 갖추기 어려울 때는 별도의 정보 공유 채널이나 매체를 정해서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강연(講演, Lecture) : 청중 앞에서 강의 형식으로 일정한 주제를 말하는 것.

강연은 가장 중성적이며 보편적인 성격의 형식이다. 모임이 내부적으로 지적 정체를 느낄 때 적절한 강연을 듣는 것은 영감과 도전의식을 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너무나도 많은 분야를 섭렵해야 하며 스페셜하게 제너럴하고 제너럴하게 스페셜해야 하는 현대의 전문가들은 제대로 일가를 이룬다는 것이 꿈처럼 먼 일이다. 다양한 관점을 모두 연구하고 체험하여 터득할 수는 없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한 분야에서 좋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강연으로 일반적인 정보를 채워둘 필요가 있다. 세미나는 선생 등 이끄는 사람의 역량이 영향을 미치고 개인적인 주제에 몰두하기 쉽다. 컨퍼런스는 상황을 파악하기는 좋지만 깊이를 얻기는 어렵다. 따라서 다양한 형식의 이벤트를 접하기 어려운 여건에서는 강연이 한 시대와 인물들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는 대표적인 형식이 될 수 밖에 없다. 강연을 통해 청중은 자신의 길에서 넘어야 할 인물들의 수준, 도전의 영역을 파악할 수도 있다. 강연은 지식과 경험 면에서 앞에 선 사람과 뒤를 따르는 사람이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강연자와 청중의 관계가 지극히 비대칭적일 확률이 높다. 어중간한 강연자가 와도 청중이 평가하기 어렵고 내용은 포장되기 쉬우므로 강연 프로그램 기획자의 판단이 중요하다. 모임이 내부적으로만 몰두할 경우 자체적인 충족감은 가질 수 있어도 그것이 세계 안에서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심포지엄이나 포럼 등의 형식을 통해 성과의 학술성과 사회적 필요를 인정 받는 등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중간중간 자기 점검과 세계의 수준을 살펴본다는 측면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강연은 되도록 많이 접하는 게 좋다. 정기적인 행사로 기획하여 대내적인 긴장과 대외적인 홍보의 촉매로 활용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겠다.

포럼(Forum) : 공개 토론회. (해결이 필요한 문제, 특히 공익적 관심 사안에 대해) 상충되는 입장과 논점을 공유하고, 의견과 질의응답을 주고받으며, 전문가와 청중을 포함한 참가자들이 해당 문제에 대한 인식을 넓히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

포럼은 공개 토론회다. 공개적으로 오가는 말을 사용하는 자리다. 이는 사적 언어가 아닌 공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의미고, 다양하게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논의를 한다는 것은 당연히 공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다. 따라서 모임의 사안이 어느 정도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갖추어지고 그것의 중요성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할 때, 혹은 사회적 문제 안에서 모임의 의견을 개진하고 여타 다양한 의견과 비교·검토하려고 할 때 포럼의 형식을 활용하면 된다. 하나의 주요 견해를 섭렵하는 정도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형식과 다르게 다양한 견해를 유사한 무게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이 경우, 관련 정보들에 대한 폭 넓은 인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대화 자체를 다룰 줄 아는 역량이 요구된다. 다른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고 그 안에서 문제에 대한 인식을 다채롭게 하며 나은 대안을 생각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앎이 많은 것보다 모름을 인정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 포럼이 가장 민주적인 형식이라면 포럼의 특징 또한 민주주의의 특징을 닮을 수밖에 없다. 수준의 높고 낮음이 뒤섞이는 경우 중심이 강력한 집단에서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의 의견으로 쏠리는 경향이 생기듯 중심이 약한 집단에서는 강한 의견으로 인정 받을 수 있을 정도까지 집단화 할 수 있는 의견이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실보다 동의에 유용한 감성적 공감으로 문화가 하향 평준화되는 경향이 생긴다. 참가자 전체의 인식을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포럼도 마찬가지 길을 걷기 쉽다. 그러지 않기 위해 고급 언어와 사유 체계 안에서의 논의를 이어간다면 결과적으로 높은 인식과 낮은 인식은 분리되고 단절되어 서로에게서 소외되고 만다. 따라서 포럼은 그것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좋은 결론을 모색하는 것과 동시에 전체적으로 도달해야 할 인식의 수준과 사람들의 수준에 부합하는 표현을 모색하는 것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다른 이벤트 형식도 마찬가지겠지만) 사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연구와 목표가 지나치게 순수하고 내부화 되기 쉬운 모임의 경우라면 포럼이라는 형식의 이벤트를 통해 공익에 대한 기여 지점과 폭 넓은 소통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회(展示-會, Exhibition) : 쇼.

일반적인 경우라면 모임의 대외적인 행사 형식으로 컨벤션(convention)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분야가 아닌 하나의 모임 정도를 상상한다면 전시 정도의 스케일로 족하다. 전시는 작업 결과를 공개하는 과정을 통해 내부 성과를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특히 건축 분야 모임에서 힘을 발휘하곤 하는데, 기록으로 남은 한국의 건축 모임들 중 최강인 ‘4.3그룹’도 세미나와 답사로 유대와 기반을 다지고 전시로 존재를 알렸듯 오늘날 파빌리온 등의 작업을 선보이는 학생 모임들에 이르기까지 전시는 건축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형식이다. ‘내어 보임’으로써의 전시는 ‘보여짐’으로써의 관람에 상응하므로 내어 보이는 이가 보여지는 이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될 소지가 위험으로 항존한다. 이미 너무 많은 이미지에 노출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서는 새롭게 꺼낼 만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전시는 기간 한정이고 인생은 계속되므로 깔끔하게 완결되어 보이는 것보다는 거칠더라도 자신의 생각·이야기를 꺼내고 다듬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작업자 자신에게 편안하기도 하고 관람자 입장에서 가능성을 보기에도 좋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란 ‘첫 장면’이고 사람들의 관심은 바로 그 순간에 붙고 떼어지는 결정에 이르게되므로 자신이든 작업이든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진 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하지만 전문 집단의 경우 유혹의 기술 하나만으로는 지속적으로 붙들어 맬 수 있지 않다. 온당한 성과가 핵심이지 않으면 일회성 관람객은 움직일 수 있어도 상시적인 팬은 만들 수 없다. 오늘날에는 전문가들도 공유 소통 채널 없이 단톡방 수준의 모임, 이야기, 정치의식 등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과거처럼 이슈 하나로 전문 계통 전체의 관심을 모으는 일은 불가능한 미션에 가깝다. 포럼이라는 형식도 이상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형식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을 가진 모임들을 한 자리에 모으면서 대외적인 홍보 채널까지 구축하는 방법으로 전시의 활용을 생각해 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를 테면, 전시는 활이라기보다는 화살이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고 어디에 꽂혔는지 같은 순간적으로 보이는 정보지만 좋은 활과 좋은 태도는 평소에 갖추어야 하는 것이고 전문가들이 느끼고 싶어하는 부분도 바로 화살의 상태에서 유추되는 궁수의 상태다. 이미지화 되는 결과를 다루는 모임에서 전시는 필수적인 형식이지만 과정보다 결과에 몰두하는 모임은 이해득실을 따지기 쉽고 오래 가기가 어렵다. 긴 과정 중 잠시 머무르는 순간의 감각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심포지엄(Symposium) : 특정 분야에 지식이 많은 사람(전문가)들이 관심 주제를 논의하는 공식 행사. 주로 학술 토론회를 의미.

심포지엄은 특정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가진 전문가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청중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세미나, 컨퍼런스, 포럼, 심포지엄 등의 형식을 채용하는 대부분이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기도 하기 때문에 확실한 변별점을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을 경우 굳이 그 형식을 채용하는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개인적인 의견은 심포지엄의 경우 학술적인 토론회로 범위를 한정시키는 것이 다른 모임 형식들과 함께 정리할 때 편안하다는 것이다. 물론 심포지엄의 어원이 함께(syn) 마신다(posis)는 의미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는 너무나도 딱딱한 해석이다. 하지만 여성을 열등하다고 믿었던 시대의 생각을 오늘에까지 전부 받아들일 이유가 없듯 용어들의 위상도 시기 별로 적절히 옮김으로써 당대의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쪽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 역시 없다. 학술적 토론의 의미는 학문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논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에도 포럼에서는 직접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의견을 논제로 다룰 수 있지만 심포지엄에서라면 전통적으로 관련 내용을 규정해 온 맥락과 용어들을 비교하고 대결하며 현실 속의 새로운 현상을 전문가들의 주요 관심 주제로 등록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심포지엄에서 다뤄지는 내용의 현실과의 갭을 이해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인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현상들을 체계적인 사례로 다루는 만큼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현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심포지엄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데, 현실에 마음이 밀착된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해할 마음이 없는 전문가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일반인은 물과 기름처럼 나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의 상황에 몰두하더라도 항상 타인(사회)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약 그 두 마음을 동시에 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아무리 학술적인 성취를 논하는 심포지엄이라 하더라도 차라리 포럼으로 형식을 바꿔서 뜨겁게 논의해보는 것도 좋겠다. 심포지엄이라는 형식은 그 시대의 생각이 기존의 사유체계 위에서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차갑고 냉철한 자리에 있을 때 어울린다. 사유의 입장에서 보면 먼저 나아가는 거북이를 10배 빠른 아킬레스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식의 가정(제논의 역설)도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듯 느리게 체계를 구축해 가는 학문도 어느 순간 레퍼런스가 불분명한 상태로 마구 아이디어를 펼치는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온다. 현실에서 각광 받는 생각들도 학문 자체보다 성공학으로 변질된 유사 학문이 많은 것처럼 어느 순간 학술적인 것의 의미는 진보의 최일선이거나 아니면 보수의 최일선 정도로 일상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오늘의 전문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학교가 역할을 하고 있고, 학교의 과정이 학술적인 것으로 채워지는 이상 여전히 그 중요성은 간과될 수 없다. 어쩌면 학교가 사라지는 날, 포도주를 나누며 화기애애하게 담론을 나누던 오래된 심포지엄의 의미를 되찾게 될 지도 모르겠다.

워크숍(Workshop) : 참가자들이 실제 업무 관련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는 실습 경험. 공동 수련. 단기성 특정 교육.

학원에서 개념정리반과 문제풀이반을 나누듯 전문가들의 모임 안에서 다루는 내용도 이론 부분과 실습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완만하게 진행되는 생각의 진전은 때로 단기간 실습을 통해 기술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특히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새로운 기술 못지 않게 비효율적인 행태나 습관을 함께 교정하는 게 좋지만 의외로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워크숍처럼 단기 집중 교육의 형식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대내적인 워크숍은 실력을 집중적으로 기르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대외적인 워크숍에서는 외부인들과의 교류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소셜하다는 것이 곧 네트워킹을 의미하면서 사회적인 척도가 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모든 이벤트에서 네트워킹 측면이 고려될 수밖에 없는데, 체감되는 관계의 밀착 강도가 높은 워크숍의 경우라면 더더욱 참가자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보여주는 전시가 때로 영혼 깊숙히 찔러넣은 바늘이 되어 우발적인 관계를 엮어내기도 하지만 워크숍은 만남 자체를 기획하는 일이다. 그리고 만남이란 상상 외로 대단한 일이 될 수 있다. 오리들 틈에서 백조가 자신을 오리로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듯 백조들 틈에서 오리는 자신을 백조로 인식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과거로 갈수록 자신의 조건이 자신을 규정하지만 미래로 갈수록 자신의 인식이 자신을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감을 가져라.)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의 종류는 상상력에 비한다면 매우 적고 그 안에서 하나의 인생을 통해 나아갈 수 있는 범위 역시 대체로 비등하다. 흔히 거론되는 특별한 유명인들의 성취는 뉴턴의 말처럼 한 분야 내에서 ‘고대라는 거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축적된 결과들 위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최고 전문가, 권위자를 만나 그에 준하는 태도와 자신감을 갖추는 일이 당연하게 중요해 보이는 만큼, 오랜 시간을 해당 분야에서 흥미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개인에게는 더 없이 중요하다. 건축 분야의 모임에서는 전시의 형식을 통해 워크숍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워크숍이 답사나 파티의 의미로 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성과가 참가자들 개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평가되는 이벤트보다는 객관적인 지표를 따라 실력 향상이 보장되는 이벤트가 워크숍 주제로 적당하(-ㄹ 것 같으)며, 이 경우 워크숍의 의미가 좁아질 수 있겠지만 실행과 효과를 보다 엄정히 생각함으로써 추진 시에도 보다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측면도 있다. 행동에 힘이 있으려면 생각에 힘이 있어야 하고, 생각에 힘이 있으려면 언어에 힘이 있어야 하고, 언어에 힘이 있으려면 언어가 담고 있는 내용이 적을수록 좋다. 신념이 맹신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가뜩이나 협소해진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바로 그때가 전문가로서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워크숍이라는 말에 워크숍만큼의 의미만 담겨 있을 때 혹은 담을 수 있을 때 기대도 결과도 명료해진다.

좌담회(Roundtable) : 원탁회의. 특정 주제에 대하여 둘 이상의 사람들이 동등하게 참여하여 의견을 나누는 형식.

대담이나 좌담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경우가 많다. 건축 매체에서도 건축가 특집을 다룰 때 건축가의 작업과 근황을 적절한 내용으로 풀어서 설명하기 위해 대담자를 선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더러 라운드테이블 형식으로 정해진 주제 안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형식의 기획들이 있었다. 객관적이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건축계의 좌담회 빈도가 상당히 줄었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실제로 회수가 줄었거나 아니면 관심 있는 좌담을 만나는 빈도가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좌담회가 변별력을 가지려면 내용을 전문적인 범위로 한정하는 것과 좌담 참여자가 지식과 대화 측면에서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분분한 의견과 좁은 지식, 편중된 가치관 등은 좌담의 가치를 떨어트린다. 포럼이 공감의 과정이라면 좌담은 정리의 과정이(면 좋)다. 논쟁의 과정 속에서도 필요한 정보들이 압축적으로 정리되어 가는 과정을 함께 보여준다면 좌담회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모임의 입장에서 좌담은 특별한 게스트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기획될 확률이 높다. 인물에 대한 기대가 좌담회의 시작이자 끝일 수 있다.

전문가들의 전문성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학교를 다니고, 사회에서 일하고, 일을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걸까? 전문가들의 세계도 변하고 클라이언트들의 세계도 변하고 기술과 환경, 인간과 정치도 변한다. 모임의 형식은 빈 시간을 채울 아이템의 선별 요건이 되기도 하지만 변하는 세계 속에서 적절한 때 적절한 이벤트를 통해 자신을 키워가는 적절한 방법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세상에 보여지는 것들은 주로 결과들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기본적인 제작 도구들의 성능이 나쁘지 않아서 호기심이 생기면 곧바로 결과를 내고 싶어지고 실제로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성실히 보려 하지 않을 뿐 이미 세상에 남겨진 도전의 흔적은 넘쳐나고 특정 전문 분야의 줄기는 무성하게 분화되어 있다. 간단히 인정 받을 수 있기보다는 오히려 소통의 적정 지점을 찾지 못 하고 방황하게 되는 경우를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역사를 버리기 전에 역사에 대한 감각을 알고, 이슈를 무시하기 전에 이슈의 감각은 알고 있는, 최소한 그 정도 범위에서라도 자신이 속한 전문 계통과 어느 정도는 발을 맞추고 대화하며 나아가기 위해 해당 분야의 이벤트와 이벤트 형식, 그리고 그 안에서 다뤄지는 내용들을 살펴보는 약간의 노력은 필요하다.

이벤트가 꼭 위와 같은 형식을 갖추어야 할 이유는 없다. 유용한 도구들도 많고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도 훨씬 넓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포럼이나 심포지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형식 자체라기보다 공통의 지식과 공감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형식을 고민한다는 것은 몸을 어떤 틀에 맞출까를 고민하는 것과도 같다. 하나의 틀(형식)을 받아들일 때 그와 관련한 내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익힐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형식의 효용이라고 할 수 있다. 태권도의 정권 지르기 자세에서 최고의 니킥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에서도 적합한 품새가 있기 마련이다.

내용의 퀄리티는 어느 때나 중요한 문제인 반면 형식의 다변화는 새로움에 도전하는 힘들이 왕성할 때 나타난다. 형식 자체만으로도 웃게 하는 ‘미친 형식’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그때가 ‘대단한 시절’ 아닐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기대해 본다. (끝)


  • 작성 :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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