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충주의 건축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건축의 절충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고딕 양식의 요소와 자연에서 발견되는 아르누보 모티프 및 형태가 결합되어 독특하고 독창적인 구조가 탄생했다. 절충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1883~1926)에 설계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축 중이다. via Wikimedia Commons
스페인 부르고스에 있는 절충주의 건물(1922). 네오고딕과 아르누보, 신고전주의 스타일이 섞여 있다. via Wikimedia Commons
1882년 요제프 흘라브카가 디자인한 부코비니아와 달마티아 대주교의 거주지(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1882). 브릭 고딕 양식에 기초를 둔 작업. via Wikimedia Commons
준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영국 버밍엄 대학교의 애스턴 웹 빌딩(1900-12). via Wikimedia Commons

절충주의는 하나의 작업이 이전의 역사적 스타일의 요소를 혼합하여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만드는 19세기와 20세기 건축 양식이다.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이러한 요소에는 구조적 특징, 가구, 장식적 모티브, 뚜렷한 역사적 양식, 전통 문화 모티브 또는 다른 나라로부터 비롯된 스타일이 포함될 수 있으며, 혼합물은 일반적으로 프로젝트에 대한 적합성과 전반적인 미적 가치에 근거하여 선택된다.

이 용어는 또한 클라이언트 또는 건축가 자신의 바람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의 건물을 디자인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많은 건축가들에게도 사용되었다. 이 스타일은 전형적으로 복고적이었고, 각 건물은 선택한 스타일 또는 자체적으로 절충적인 혼합 내에서 대부분 또는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교회에서 고딕 복고 건축은 특정 중세 시대와 지역에서 비교적 “순수한” 복고 양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가장 강했던 반면, 신고전주의, 바로크, 팔라초 양식, 재커비던, 로마네스크 등 다른 복고 양식들은 좀 더 자유롭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역사

절충주의 건축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했으며, 건축가들은 이전의 역사적 선례를 유지하면서도 전에 없던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는 양식을 추구했다. 과거 양식의 가능한 최대의 목록을 바탕으로 다양한 양식을 혼합하고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은, 보다 자유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했고, 무한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다. 다른 디자인 전문가들(소위 ‘부흥주의자’)이 과거 양식을 꼼꼼하게 모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 절충주의는 창조를 주된 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달랐다. 이는 향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랑스 릴 시나고그(1891). 로마네스크, 고전주의(갓타), “무어”, 기타 양식의 요소가 보인다. via Wikimedia Commons
1910-1913년에 지어진 우크라이나 호로드키브카의 성 클레어 교회. 네오 고딕 양식과 20세기 현대 건축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via Wikimedia Commons
캘리포니아 유레카의 카슨 맨션은 퀸 앤 리바이벌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via Wikimedia Commons
인도-사라센 리바이벌 건축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기차역(1910). via Wikimedia Commons

유럽

절충주의 건축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작업에 대해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얻으려는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프랑스(보자르 건축), 영국(빅토리아 건축), 독일(그륀더차이트; 창업 시대) 등 유럽 대륙 여러 나라에서 처음 등장했다.

최초의 전문 건축 학교 중 하나로 여겨지는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는 엄격하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을 훈련시켜 그들에게 기술과 전문적인 위신을 갖추도록 했다. 에콜의 교사진은 프랑스의 선도적인 건축가들이었고, 이 새로운 교육 방식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전 세계의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많은 졸업생들이 이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보자르 교육을 새로운 절충주의적 디자인을 위한 기초로 활용했다.

이러한 스타일의 건축 양식이 널리 퍼졌(고 당시 건설된 많은 시청에서 볼 수 있었)지만, 유럽에서의 절충주의는 미국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열정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ㅡ 오래된 정통 건축물들의 존재가 새로운 건물에서의 역사적 모방의 매력을 감소시킨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북미

19세기 말에는 미국 건축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리처드 모리스 헌트(1827-1895)와 찰스 폴렌 매킴(1847-1909) 같은,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교육 받은 건축가들은 유럽에서 보자르 양식을 들여왔는데, 이는 미국 절충주의 건축의 초석으로 여겨졌다. 번영과 상업적인 자부심이 커지던 시대에, 전국의 대도시에서 많은 절충주의 건물들이 의뢰되었다. 이 양식은 과거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유럽 귀족 건축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역사적인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미국 건축에 더욱 풍부한 문화적·역사적 깊이를 더했다. 헌트와 다른 많은 절충적인 건축가의 경우, 그들의 ‘전형적으로 절충주의적인 관점’은 특정 프로젝트나 클라이언트에 맞게 스타일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유연한 적응력과 다양한 양식을 자유롭게 혼합시키는 능력이 절충주의 디자이너를 (그들의) 고객에게 더욱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고층 빌딩 및 교회, 법원, 시청, 공공 도서관, 영화관 같은 기타 대규모 공공 공간들이 조성되면서, 절충주의 디자인은 더 이상 상류층 구성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건물 중 (뉴욕시에 있는 원래의 펜실베니아 역과 최초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포함하여) 일부는 이후 철거되었지만, 이 시대의 남아 있는 프로젝트들은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 중 일부로 평가받고 있다.

확산

절충적 디자인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당시 해외 운송의 주요 수단이었던) 원양 정기선에서 볼 수 있었다. 호화로운 인테리어는 — 해외에서 여러 달 동안의 불편을 완화하고 확고한 웅장함의 환상을 만들기 위한 시도로 — 전통적인 스타일이 혼합되어 만들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그러한 선박들은 식민지 주민들을 세계의 미개발 지역으로 수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한 지역들의 식민지화는 서구 세계의 절충주의 건축을 더욱 확산시켰는데, 새로 정착한 식민지 개척자들이 흔히 로마 고전주의와 고딕 모티브를 특징으로 하는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정도는 덜하지만, 미국 보자르의 영향을 받은 학교에서 훈련 받은 일본과 중국 건축가들이 아시아 전역에 걸쳐 절충주의 디자인을 생산하기 위해 돌아오면서 다쓰노 긴고의 일본 은행(1895)처럼 아시아 전역에 걸쳐 절충주의가 등장했다. 인도-사라센 리바이벌 건축은 인도 전통 건축, 주로 무굴 건축의 디테일을 서양식 공공 건물과 궁전에 더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절충적인 양식이었다. 대부분의 건축가는 영국인이었다.

비판적 반응

너무 많은 창조적 자유를 제공하고 어떠한 지침도 없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성공적이지 못한 디자인을 만들 위험은 모두에게 명백했다. 다양한 스타일을 조화롭게 혼합하는 데 실패한 프로젝트는 전문가들(특히 이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쇠퇴

역사적 모방에 대한 열광은 1930년대 들어 쇠퇴하기 시작했고, 절충주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호하는 디자인 학교의 커리큘럼에서 단계적으로 폐지되었다. 레이트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브루탈리즘, 아르데코로의 전환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방가르드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당시  생산된 새로운 기술과 재료로 인해 더 큰 혁신이 가능했다. 절충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이후 건축을 위한 “혁신과 새로운 형태의 문을 다시 열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르헨티나 마르 델 플라타에 있는 마르 델 플라타 스타일의 주택으로 별장, 노르만 건축, 스페인 식민지 건축의 특징이 있다. via Wikimedia Commons

인테리어 디자인

절충주의 건축의 부상은 알맞은 동반 인테리어를 연출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한 기술, 이해, 지식을 갖춘 인테리어 전문가의 필요성을 야기했다. 이것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하나의 인정받는 전문 직종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시대(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의 저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는 엘시 드 울프(1865-1950), 로즈 커밍(1887-1968), 낸시 매클렐런드(1877-1959), 엘시 콥 윌슨, 프랜시스 엘킨스(1888-1953), 시리 몸(1879-1955) 및 도로시 드레이퍼(1889-1969) 등이 있다. 이 초기 디자이너들의 고객은 부유한 가문과 기업으로만 구성되었지만, 이러한 장식가들의 작업은 《하우스 & 가든》, 《하우스 뷰티풀》, 《레이디스 홈 저널》 같은 인기 간행물에 정기적으로 소개되었다. 이 장엄한 집들의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게시하는 것은 절충주의 스타일을 중산층에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덜 사치스러운 모방이나 유사한 장식 요소의 통합은 가정 장식에서 바람직한 특징이 되었다. 미국 전역에서 지역마다 미적 선호가 달랐는데, 캘리포니아에서는 스페인 스타일이 선호되었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아메리칸 콜로니얼 건축 양식의 요소들이 인기를 끌었다.


현대적 맥락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문화적 및 역사적 양식에서 도출된 스타일들을 느슨하게 “절충주의적”이라고 묘사하지만, 문헌이나 미디어에서 절충주의 건축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절충주의 운동과 더불어 건설된 건물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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