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용건축편집자
어릴 때는 물론 ‘정의’라는 두 글자가 가슴을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의문만 가득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주저앉힘’이라는 주제와 함께 인간을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하도록 멈춰세우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곤 했는데, 정의도 그 중 하나였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에 기반한 행동을 제어할 통제 논리로서 인간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만 하는 그것 ㅡ “이것이 정의다! 정의를 따르라!” ㅡ 은, 결과적으로 현실에서 그것에 반대하거나 다른 쪽을 향해 빠져나가려는 이들을 억누르는 압력의 형태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옳다(저울)고 생각하는 정의가 항상 힘(칼)과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가 항상하게 예비된 반동의 기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짝을 이룬다. 저울의 결과에 억눌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울의 결과를 자신들의 바램과 일치시키기 위한 봉기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감정을 제거하는 약을 먹일 것인가?(이퀼리브리엄) 사실은 각자 좋은 걸 선택해서 각자 행복하게 살면 될 일인데, 사회라는 확장된 영역과 상황에서 그 ‘각자’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평등이 더 중요한 과제로 보이지만, 지난 세기 치러진 냉전으로 인해 평등은 현실에서 거론하기 불편할 정도로 오염돼 버렸다. 하지만 결국 롤스의 정의론이 평등론인 것처럼, 고대의 정의가 개인의 감정에 기반한 집단적 믿음에 머물렀듯 현대의 정의는 타인의 인정에 기반한 집단적 합의 과정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합의는 하고 있다. 인정을 안 할 뿐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의 도움 받을 권리도 인지하지 못한 채 사라져간 어느 세 모녀는, 모르긴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울 정의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정의는, 화가 났거나 화를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니까 말이다. 그리고 화의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의 중요한 토대 중 하나는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이므로,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일수록 자기 정의에 대한 주장 역시 희박할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오늘날 힘 있는 누군가가 정의를 내세운다면, 그는 힘 없는 누군가의 삶과 무관한 자기 이익에 국한된 정의를 외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정의가 힘 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런 곳일수록 정의의 정체 ‘따위’가 아니라, 개개인에게서의 소외를 읽어내는 것과 그 소외를 극복할 방법을 만드는 것이 더더욱 필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칼을 든 사람일수록 상대/대상의 정체에 집착하는데, 마찬가지로, 정체를 따지는 사람은 여전히 칼을 버리지 못 하는 구태의연한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정체(WHAT)가 아니라 방법(HOW)이 필요하다. 저울과 칼을 든 신 혹은 그러한 신과 같은 존재가 되려는 인간이 아니라, 더불어 느끼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만들고 살아내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 작성 : 2022.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