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tremère de Quincy
앙트완-크리소스톰 카트르메르 드퀸시(1755.10.21 ~ 1849.12.28)는 프랑스의 탁상공론형 고고학자이자 건축 이론가, 프리메이슨, 그리고 유능한 예술 행정가이자 예술에 대해 영향력 있는 저술가였다.
Antoine-Chrysostome Quatremère de Quincy (21 October 1755 – 28 December 1849) was a French armchair archaeologist and architectural theorist, a Freemason, and an effective arts administrator and influential writer on art.
생애
Life
파리에서 태어난 카트르메르 드퀸시는 법학을 공부한 후, 콜레주 루이-르-그랑에서 미술과 역사를 공부했고 기욤 쿠스투 더 영거(1716~1777)와 피에르 쥘리앙(1731~1804)의 아틀리에에서 잠시 견습생으로 일하며, 조각 예술에 대한 실무 경험을 쌓았다.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와 함께 나폴리를 여행하면서 그리스와 로마 건축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Born in Paris, Quatremère de Quincy trained for the law, then followed courses in art and history at the Collège Louis-le-Grand and apprenticed for a time in the atelier of Guillaume Coustou the Younger and Pierre Julien, getting some practical experience in the art of sculpture. A trip to Naples in the company of Jacques-Louis David sparked his interest in Greek and Roman architecture.
그는 프랑스 혁명의 문제에 연루되었다. 그는 1791~1792년 입법의회에서 왕당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정치적 견해는 군주제와 가톨릭이었다. 혁명의 공공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전 아카데미의 존속이 의문시되었던 시기(1971년)에 그는 「프랑스 내 디자인의 예술에 대한 고찰」 세 편을 국회에 제출했고, 파리 살롱을 개방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그들의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1791~1792년에 그는 (장-바티스트 롱들레의 지시 아래) 파리에 있는 상트-주느비에브 교회에 영묘(능)의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창문을 채워 판테온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조직했다. 1795년에 그는 포도월(방데미에르) 13일의 왕당파 반란 준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He was involved in the troubles of the French Revolution. He was a royalist in the National Legislative Assembly of 1791–1792, and his politics were monarchist and Catholic. As a member of the Revolutionary Committee of Public Instruction his set of three Considerations on the arts of design in France was offered before the Assemblée Nationale at a time (1791) when the continuation of the former academies was under question; he offered a program for their reform in part by opening up the Paris salons. In 1791–1792 he orchestrated the conversion of the Church of Ste-Geneviève in Paris (under the direction of Jean-Baptiste Rondelet) into the Panthéon, infilling the windows to give it the character of a mausoleum. In 1795 he was accused of taking part in the preparations for the royalist insurrection of 13 Vendémiaire and condemned to death, but subsequently acquitted.
1796년 7월, 그는 로마로부터 예술 작품을 몰수하려는 프랑스의 계획에 반대하며 유럽 열강이 예술과 지식을 보호하기 위해 교황청에 일정 금액을 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짜-서신 논문을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로마의 예술품을 옮겨 놓는 것의 이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크-루이 다비드를 포함한 47명의 파리 예술가들이 서명한 탄원서의 배후에 있었으며, 비록 신중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공식적인 반응은 냉담했다.
In July 1796, he wrote a pseudo-epistolary treatise against the French plans to seize works of art from Rome, arguing that European powers should instead contribute a sum to the papacy for protecting art and knowledge. Shortly afterward, he was behind a petition signed by forty-seven Parisian artists including Jacques-Louis David which questioned the benefits of displacing art from Rome; although prudently worded, there was a vituperative official response.
같은 해에 그는 센 지방의 오백인 평의회에 선출되었다가, 왕당파 쿠데타에 가담한 후 숨어 지냈다. 독일에서 망명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미학 이론에 영향을 미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와 고트홀트 레싱(1729~1781)을 읽는다. 1800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센 의회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816년부터 1839년까지 미술원(아카데미 데 보자르)의 종신 총무로 일하며 공적인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고, 1818년에는 국립도서관(비빌리오테크 나쇼날)의 고고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820년에 잠시 정계에 복귀했다. 1826년에는 네덜란드 왕립 연구소의 준회원이 되었다.
In the same year he was elected to the Council of Five Hundred for the Seine department, then went into hiding after taking part in a royalist coup. While in exile in Germany, he read Immanuel Kant and Gotthold Lessing, whose philosophy informed his own theories of aesthetics. In 1800, back in Paris, he was appointed secretary general of the Seine council. From 1816 until 1839 he was perpetual secretary to the Académie des Beaux-Arts, which gave him great influence upon official architecture, and in 1818 he became a professor of archaeology at the Bibliothèque Nationale. He briefly returned to politics in 1820. In 1826 he became an associated member of the Royal Institute of the Netherlands.
카트르메르 드퀸시는 수많은 기사와 책을 저술했다. 1788년부터 1825년까지, 그는 체계적대항목 백과사전의 건축 3권을 저술했다. 그의 『건축 역사 사전』은 1832~1833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안토니오 카노바(1823), 라파엘(1824), 미켈란젤로(1835) 등 여러 예술가들의 전기를 썼다.
Quatremère de Quincy was the author of numerous articles and books. From 1788 to 1825, he wrote the three Architecture volumes of the Encyclopédie Méthodique. His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rchitecture was published in 1832–1833. He wrote biographies of several artists: Antonio Canova (1823), Raphael (1824) and Michelangelo (1835).
그는 언어로서의 건축이라는 단순한 은유를 건축의 구조를 재개념화하기 위한 틀로 변형시켰다; “토착” 건축, 또는 바로크 양식의 “관용구” 또는 고전주의의 “어휘”를 기술하는 현대의 작가들은 카트르메르 드퀸시에게 빚을 지고 있다.
He transformed the simple metaphor of architecture as language into a framework for reconceptualizing the structure of architecture; modern writers describing “vernacular” architecture, or the Baroque “idiom” or the “vocabulary” of Classicism owe a debt to Quatremère de Quincy.
1785년 금석학․문학 아카데미 공모를 위해 쓴 그의 에세이 「드 라쉬텍튀르 에집시옌(이집트 건축)」은 「데스크립숑 드 레집트(이집트 지)」를 준비하던 중인 1803년에 출판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역사적 순진함보다는 건축의 기원에 관한 이론적 고찰로, 신고전주의 건축의 이집트 복고 단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리스 조각과 건축에서 다색 장식의 사용을 최초로 지적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조원술(造園術)을 순수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최초의 조경된 묘지 조성에서 핵심 인물이었으며, 영어로 번역된 그의 에세이 「예술에서 모방의 본질, 목적 및 수단」은 존 클라우디우스 루돈(1783~1843)에게 영향을 미쳤다.
His essay De l’Architecture Égyptienne, written for a competition posed by the 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in 1785 and published in 1803, just as the Description de l’Egypte was in preparation, nevertheless was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Egyptian Revival phase of Neoclassical architecture, for its theoretical observations concerning the origins of architecture rather than for its historical naiveté. He was among the first to point out the use of polychromy in Greek sculpture and architecture. Though he insisted that landscape gardening could not be admitted among the fine arts, he was a key figur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first landscaped cemeteries, and his essay, translated into English as The Nature, the End and the Means of Imitation in the Fine Arts influenced J. C. Loudon.
- 출처 : 「Quatremère de Quincy」, Wikipedia(en), 2022.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