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용 건축편집자
오늘의 지구촌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건축가를 꼽으라면 단연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1929~)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생산성과 공공성의 저하로 현대 도시의 재생과 회복력이 중요한 이슈가 된 오늘날,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의 중심 요인으로 거론되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등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건축을 대담하게 현실로 구현해내는 건축가가 바로 프랭크 게리다. 또한 그런 만큼 게리의 건축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격렬한 호기심과 격렬한 반발감의 양단으로 나뉜다. 2014년 한 기자회견에서 또 다시 제기된, 현란한 보여주기식 건축이라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가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장면은 곱게 캡쳐되어 지금도 인터넷 공간을 떠돌고 있다. 최고의 건축을 거론할 때면 빼놓을 수 없으면서도 필립 존슨(Philip Johnson, 1906~2005) 같은 건축계 대부가 먼저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건축 전문가들조차 확고한 지지를 보내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안정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준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친 요약일 수 있지만, 그는 건축가로서의 일반적인 한계들을 넘어섰고 자신을 존중하는 클라이언트와 더불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에 도달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라는 문제가 그대로 건축 분야에 옮겨진 것처럼 마치 1%를 위한 고급 건축이라는 장르가 별도로 존재하는 양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작업과 고민은 대다수 건축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간, 예산, 자재, 디테일, 시공 등 건물을 짓는 모든 과정을 컨트롤하기 위해 시스템을 갖추고 더 나은 방안을 모색하며 다양한 전문가들과 협력한다. 다만, 절약하기 위해 작업 과정마저 축소하는 걸 당연하게 수용하는 건축가들과 다르게 게리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보다 충실하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경험을 작업 안으로 수용하는 확산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떤 건축가는 확산적인 태도를 수용할 수 있는 클라이언트 – 때때로 패트론(후원자)으로 불리기도 하는 – 를 만나고, 몇몇은 그 상황을 확실한 레버리지로 만듦으로써 자기 작업의 한계 확장과 클라이언트의 만족을 동시에 높이는 기회로 전환시킨다.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수십 억 인구 중 소수의 건축가에게 결과론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929년 2월 28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한 프랭크 오웬 골드버그의 출발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유대주의 분위기에 고심하며 자신에게서 유대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름을 프랭크 오웬 게리(약자 표기 F.O.G.)로 바꾸는 20대 초반까지도 그의 삶은 안개(fog) 속이었다. 18세(1947)에 가족을 따라 이주한 미국 LA는 온화하고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에 속했지만 게리의 삶에 스며든 빈곤의 안개를 걷어내주지는 못 했다. 시간 당 75센트의 트럭 운전으로 가계를 도우며 학업을 잇는 나날들로 시작해야만 했고, 33세(1962)에 자신의 사무실을 개소할 때까지는 생존과 비전을 가리고 있는 안개를 막연히 걷어내고만 있었다. 예술가들과의 교분과 몇몇 프로젝트를 통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40대였던 1970년대 건축 분야에서 형성되고 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는 게리에게 닥친 또 하나의 안개였다. 그는 동시대 건축가들이 현대의 대안을 고전에서 찾고 있는 것에 상당히 당황했던 것 같다. 이 지점에서 그는 남들과는 다른 길로 나아간다. 과거로 가야 한다면 차라리 인간보다 훨씬 오래된 물고기를 살펴보겠다며 물고기 형태를 만드는 이중곡선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49세(1978), 흔히 게리 건축의 전환기로 거론되는 자신의 집을 리모델링한 프로젝트가 세상에 공개된다. 게리의 노선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지만, 현실은 또 다시 안개 속이다. 당시 여러 프로젝트를 의뢰한 클라이언트가 낯설고 거칠게 보였던 〈게리 주택〉을 본 후 함께 할 수 없다고 했고, 그는 곧바로 직원 50명 중 3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해야 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색깔이 서서히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개중에는 오랜 기간 계획에만 많은 돈을 투자한 클라이언트와의 만남도 있었다. 비록 지어지지는 않았어도 덕분에 게리의 독특한 곡면이 보다 다채롭게 표현되는 스터디 기회가 된다. 실제로 그 집을 위해 디자인한 말 머리 형상의 곡면 모델은 다른 프로젝트에 그대로 적용되어 유명해지기도 했다. 게리 스타일의 건축이 뭔지 알 수 있는 확실한 결과물들이 등장할수록, 이번에는 게리의 스케치가 점점 안개처럼 변해간다. 그는 고정되고 명확한 순간이 아니라 움직이는 모호한 과정을 붙잡고 싶어 한다. 58세(1987),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설계자로 선정된다. 그는 이제 유명한 건축가에서 거장 건축가로 호명되기 시작한다. 59세(1988), 필립 존슨 등이 기획한 「해체주의」 전시에 7인의 건축가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한다. 60세(1989), 건축계 노벨상인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다. 이미 정상에 올랐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그는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자신의 스케치와 결과물 사이의 피드백 속도를 높이고 다양한 실험을 빠르게 진행하는 한편 실무적 통제가 가능한 환경을 조성한다. 62세(1991)에 시작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이 68세(1997)에 개관한다. 그는 더 이상 미국의 건축가가 아닌 세계적인 건축가다. 90세(2019)에는 〈루이비통 메종 서울〉을 리모델링하며 한국과도 건축 프로젝트로 인연을 맺었고,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는 그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지구 곳곳을 채우고/움직이고 있다. 프랭크 게리의 거점 지역인 미국 LA는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 물결과 더불어 경쾌하게 세상을 노래했던 팝메탈(일명 LA메탈)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세대의 얼터너티브 장르 출현과 함께 팝메탈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풍경은, 과거 강력했던 시각과 논리 중심에서 새롭게 주목을 얻기 시작한 촉각과 경험 중심으로 초점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의 건축 문화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대를 풍미했던 포스트모던, 해체주의 등 현대적인 건축 양식들이 이름 없는 건축의 안개 뒤로 가려졌다. 거세된 토속성과 전통을 되돌아보며 지역주의와 세계화 사이의 장단점을 저울질하는 동안에는 아이콘적 건축을 생산하는 프랭크 게리 역시 끊임 없이 비관론의 피고, 낙관론의 스타로 소환되고 소진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게리는 여전히 건재하다. 현실과 시대의 안개 속에서, 그는 자신을 증명했고 지금도 증명하고 있다.
- 글 출처 : 《WEALTH》 2021년 1월호 게재.
-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