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비트겐슈타인


〈하우스 비트겐슈타인〉. via Wikimedia Commons

하우스 비트겐슈타인(스톤보르흐 하우스 또는 비트겐슈타인 하우스라고도 함)은 오스트리아 빈의 쿤트만 거리에 있는 모더니즘 양식의 주택이다. 이 주택은 “디테일에 대한 집착과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요구 사항을 완전히 무시하는 점에서 놀랍도록 유사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 집은 마가렛 스톤보르흐-비트겐슈타인(1882-1958)이 건축가 파울 엥겔만(1891-1965)에게 자신의 타운하우스를 디자인해 달라고 의뢰했다. 스톤보르흐-비트겐슈타인은 이 디자인을 돕도록 자신의 동생인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을 초대했다. 결국 그는 조력자보다 설계자에 더 가까워졌다.


의뢰

1925년 11월 스톤보르흐-비트겐슈타인은 엥겔만에게 큰 타운하우스의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녀는 후에 동생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디자인 작업에 참여시켜 돕게 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1926년 4월 하이트바우어 사건(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한 소년을 때렸고,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짐.)을 둘러싼 스캔들로부터 부분적으로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비트겐슈타인은 1926년부터 1929년까지 〈하우스 비트겐슈타인〉에서 일했다. via Wikimedia Commons

초기의 건축가는 비트겐슈타인이 올로모우츠에서 포병 장교가 되기 위해 훈련 받던 중 알게 된 폴 엥겔만이었다. 엥겔만은 아돌프 로스의 스타일을 따라 세 개의 직사각형 블록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모더니즘 주택을 디자인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프로젝트와 엥겔만의 계획에 큰 관심을 보였고 2년 넘게 프로젝트에 몰두해, 엥겔만 자신도 비트겐슈타인을 최종 생산물의 설계자로 여길 정도였다. 그는 창문, 문, 문 손잡이, 라디에이터 등 모든 디테일을 자신이 지정한 대로 정확하게 만들 것을 요구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지칠 정도로 집중했다. 집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그는 방이 그가 원하는 정확한 비례를 갖도록 천장을 30mm 높였다.

건축가들 중 한 명인, 자크 그로크(1892-1962)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최악의 다툼, 논쟁, 속상함으로 하루를 보낸 후 두통을 안고 매우 우울한 상태로 집에 돌아오는데, 이런 일이 자주 있어요. 주로 저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에요.”

(알렉산더) 워는 마가렛이 결국 루트비히가 계속 요구한 변경 사항에 대한 비용 지불을 거부하자, 비트겐슈타인이 그런 식으로 비용을 지불하기를 바라며 복권을 샀다고 썼다. 그는 문 손잡이를 디자인하는 데 1년이 걸렸고, 라디에이터를 디자인하는 데 또 1년이 걸렸다. 각 창문은 비트겐슈타인이 디자인한 도르래로 움직이는 150kg의 금속제 망으로 덮여 있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건축』의 저자인 베른하르트 라이트너는, 인테리어 디자인 역사상 이와 비교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비싼 만큼 독창적이다. 바닥으로 내릴 수 있는 금속제 커튼.”


완공

이 집은 1928년 12월에 완공되었고, 가족들이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에 그곳에 모였다. 루트비히의 맏누이인 헤르미네는 이 작업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비록 나는 그 집을 매우 감탄했지만, 항상 그곳에서 살고 싶지도 않고,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집은 정말로 나 같은 작은 필멸자(인간)보다 신들의 거처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루트비히의 동생,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그 집을 싫어했고, 마가렛의 조카가 그것을 팔러 왔을 때,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그녀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렇게(싫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그 집이 너무 간소하다고 생각하며, 품위는 있지만 원초적인 생명력이나 건강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가가 되겠다는 생각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1933년에서 1938년 사이 빈 시민 명부는 그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박사, 직업: 건축가”로 기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집은 러시아 군인들을 위한 병영과 마굿간이 되었다. 철거를 위해 디벨로퍼에게 매각된 1968년까지, 집은 마가렛의 아들인 토마스 스톤보르흐가 소유했다. 이후 2년 동안 이 집은 철거의 위협 아래 있었다. 빈 랜드마크 위원회는 베른하르트 라이트너의 캠페인 후 집을 구해냈고, 1971년에 국가 기념물로 지정했다. 1975년 이래로 이 집은 불가리아 대사관의 문화부가 입주해 있다.


갤러리

지금은 불가리아 대사관 문화부로 쓰이는 〈하우스 비트겐슈타인〉의 명판. via Wikimedia Commons
비트겐슈타인이 디자인한 창문 걸쇠. via Wikimedia Commons
비트겐슈타인이 디자인한 문고리.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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