擬洋風建築
의양풍 건축(기요우후우켄치쿠)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에서, 주로 근세 이후 기술을 익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들이 설계·시공한 건축을 말한다. 종래의 목조 일본건축에 서양 건축의 특징적 의장이나, 때로는 중국풍의 요소를 혼합하여, 서민들에게 문명 개화의 숨결을 전달하고자 각지에 건설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의양풍 건축은, 메이지 10년 전후에 피크(절정)를 맞이하고 메이지 20년 이후 사라졌는데, 그 시기가 문명개화와 맞물려 있다.
擬洋風建築(ぎようふうけんちく)とは、幕末から明治時代初期の日本に於いて、主として近世以来の技術を身につけた大工棟梁によって設計施工された建築である。従来の木造日本建築に西洋建築の特徴的意匠や、時には中国風の要素を混合し、庶民に文明開化の息吹を伝えようと各地に建設された。明治の開始と共に生まれた擬洋風建築は、明治10年前後にピークを迎え明治20年以降に消えており、その時期は文明開化と重なっている。
개요
概要
메이지유신 이후, 호텔, 서양식 공장, 초등학교, 관공서, 병원 등 새로운 기능을 갖춘 시설들이, 처음에는 대도시에 그리고 머지 않아 전국적으로 요구되기 시작했다. 서양적인 기능을 갖추며 견뢰성(견고함)이 요구된 이들 시설은, 서양식 건축으로 지어질 필요가 있었다. 영빈관이나 조폐국 등 주요 시설은 고용(된) 외국인의 손에 설계·감리를 맡겼으나, 기타 관청사나 지방의 시설은 지역 목수의 손에 맡겨졌다.
明治維新以降、ホテル・洋式工場・小学校・役所・病院など新しい機能を持った施設が、はじめは大都市にやがて全国に求め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く。西洋的な機能を持ち堅牢性を求められたこれらの施設は、洋式建築として建てられる必要があった。迎賓館や造幣局など主要な施設はお雇い外国人の手によって設計監理されたが、その他の官庁舎や地方の施設は地域の大工の手に委ねられた。
하지만, 목조건축의 전통으로 육성된 일본의 목수들에게, 돌에서 유래한 서양식 건축(조적조)은 미지의 존재였다. 건축 양식은 고사하고 그 용도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전통 기술을 익힌 목수들은, 전통의 측면에서 서양식 건축을 해석하고 곁눈질로 흉내내어 서양식 건축을 건설한다. 니시키에1나 실물의 견문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지어진 의양풍 건축은, 당시 우연히 접한 건물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절충이나 창조가 더해져, 탑옥(누각)이나 포치(현관) 등 대략적인 형태는 공통적이면서도 건물마다 다른 디자인이 생겨났다.
しかし、木造建築の伝統に育まれた日本の大工にとって、石に由来する洋式建築(組積造)は未知の存在だった。建築様式はおろかその用途すら分からない状況の中で、伝統技術を身につけた大工たちは、伝統の側から洋式建築を解釈し、見よう見まねで洋式建築を建設する。錦絵や実物の見聞を通じて得た情報をもとに建てられた擬洋風建築は、その時たまたま出会った建物をベースに自由な折衷や創造が加わり、塔屋や車寄せなど大まかな形は共通しながらも、一つ一つの建物で異なるデザインが生まれた。
요코하마의 서양식 건축을 참고하여 도쿄에서 태어난 의양풍 건축은, 다수의 니시키에에 묘사되어 대중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야마나시, 야마가타 등 구(舊) 정치 체제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정부에서 토목현령이라 불리는 민완 지도자를 파견하여, 식산흥업정책(메이지 정부의 신산업 육성 정책)과 병행하여 의양식 건축으로 공관 지구를 새롭게 건설했다. 또한, 폐불훼석(불교를 배척하고 절·불상을 부숨)에 의해서 해체된 절터에는 초등학교가 지어졌다. 의양풍 건축은, 문명개화의 상징인 동시에 지배체제의 전환을 상징하는 기념물이기도 했다.
横浜の洋式建築を参考に東京で生まれた擬洋風建築は、多数の錦絵に描かれ大衆の反響を呼ぶ。一方、山梨や山形といった旧政治体制の影響力が強い地域では、土木県令と呼ばれる敏腕指導者が政府によって送り込まれ、殖産興業政策と平行して擬洋風建築による官庁街が新たに建設された。また、廃仏毀釈によって解体された寺の跡地には小学校が建てられている。擬洋風建築は、文明開化の象徴であると共に支配体制の移行を象徴するモニュメントでもあった。
역사
歴史
요코하마의 화양절충건축
横浜の和洋折衷建築
막부 말기의 일본에 온 외국인 상인들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에서 친숙해진 생활 양식을 영위하기 위해 외국인 거류지에서도 베란다를 둘러친 건물을 지었다. 그들은 간단한 건축도면을 일본인 목수에게 보여주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지었기 때문에, 커다란 기와지붕의 일본풍 건물이 출현했다. 이 예로서 로레이로(포르투갈 영사 호세 로레이로) 저택(덴토상회대리점, 1862년, 시미즈 키스케), 영일번관(1863년), 프랑스해군병원(1865년), 프랑스군주둔소(1864년경), 헵번(미국 선교사. 최초의 일영 사전 편찬자) 저택 등을 들 수 있으며, 화양절충이라고는 하지만 일본풍인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幕末の日本にやってきた外国人商人たちは、インド、東南アジア、南中国で慣れ親しんだ生活様式を営もうと外国人居留地でもヴェランダを巡らした建築を建設した。彼らは簡単な建築図面を日本人大工に示し、周辺で容易に入手できる材料で建設したため、大きな瓦葺屋根の日本風の建物が出現した。この例としてロレイロ邸(デント商会代理店、1862年、清水喜助)、英一番館(1863年)、フランス海軍病院(1865年)、フランス軍駐屯所(1864年頃)、ヘボン邸などがあげられ、和洋折衷といえども和風な箇所はみられなかった。
그렇지만, 1866년 돼지고기 요리점 화재 사건(부타야카지)로 인해 이들 건물이 소실되고, 거류지의 도시적 정비의 진전이나 외국인 기술자의 등장에 따라, 내화성능을 중시한 건물로 대체되어 갔다. 1867년에 개항한 고베에서는 처음부터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이 세워졌고, 요코하마와 동시에 개항한 하코다테도 개척사(메이지 초기 홋카이도 행정·개척을 맡은 관청)가 미국계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서양식(양풍) 경향이 강해져 간다. 외국인 거류지 개설 초기부터 요코하마에서는 일부 건물(영국 영사관 유치장 등)에 목조석첩(목구조에 돌 붙임)구법이 사용되었으나, 돼지고기 요리점 화재 사건 이후, 간편한 내화피복으로 나마코카베(외벽에 평평한 기와를 붙이고 그것들의 틈 사이를 석회로 불룩하게 만든 벽)가 더 유행했다.
だが、1866年の豚屋火事によってこれらの建物は焼失し、居留地の都市的整備の進展や外国人技術者の登場によって、耐火性能を重視した建物に取って代わられていった。1867年に開港した神戸では当初から本格的な洋式建築が建てられ、横浜と同時に開港した函館も開拓使がアメリカ系の技術を採用したことで洋風化傾向が強まっていく。外国人居留地開設当初から横浜では一部の建物(イギリス領事館留置場など)に木造石貼構法が使われていたが、豚屋火事以後、簡便な耐火被覆としてなまこ壁がより流行した。
시미즈 키스케의 건축
清水喜助の建築
개항과 동시에 요코하마에 점포를 연 목수이자, 초대 시미즈 키스케(시미즈 건설 창업자와 그 데릴사위가 자칭한 이름)의 뒤를 이어 막부가 공인한 4명의 청부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2대 시미즈 키스케는, 1862년에 로레이로 저택을 짓고, 그 후 미국인 건축기사 리처드 퍼킨스 브리젠스(1819~1891)와 함께 일하면서 서양건축을 배워, 영국 임시 공사관을 시공했다. 이후, 시미즈 키스케는, 도쿄에 츠키지호텔관(1868)과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1872)의 두 큰 서양식 건축물을 지었다.
開港と同時に横浜に店を開いた大工・初代清水喜助の跡を継ぎ、幕府公認の4人の請負人の一人に選ばれた2代目清水喜助は、1862年にロレイロ邸を建設し、その後アメリカ人建築技師リチャード・ブリジェンスと仕事をしていく中で西洋建築を学び、イギリス仮公使館を施工した。その後、清水喜助は、東京に築地ホテル館(1868年)と海運橋三井組(1872年)の2大洋風建築を建てた。
츠키지호텔관(1868)은, 구 막부 시대에 계획된 외국인 전용 호텔로서 브리젠스가 기본설계를 담당했다. 전면에 나마코카베를 온통 둘러치고, 중앙에 단계별로 차례로 줄어드는 3층탑을 두고 있다. 탑옥(옥탑에 지은 작은 시설물)에는 화두창(카토우마도)을 내고,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아매고, 석조 아치의 정문에는 키바나(들보 따위의 끝이 기둥 밖으로 내민 부분)를 달았다. 나마코카베는 브리젠스의 기본설계에 있던 것이지만, 세부의 일본식 의장은 시미즈 키스케에 의한 것이다.
築地ホテル館は、旧幕府時代に計画された外国人向けホテルで基本設計をブリジェンスが担当した。全面になまこ壁を張り巡らし、中央に逓減を持たせた三重の塔を据えている。塔屋には華頭窓があけられ、軒先には風鐸をつるし、石造アーチの表門には木鼻がとりついている。なまこ壁はブリジェンスの基本設計にあったものだが、細部の和風意匠は清水喜助による。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는, 미쓰이 조직이 새로 창설한 은행을 위한 건물이다. 목골석조(목재-뼈대 석재-벽체)에 베란다가 붙은 서양식 2층으로 된 건물 골조에, 복잡하게 접은 겹겹이 쌓인 지붕이 얹혀 있다. 지붕에는 당파풍(중앙은 활꼴이며 양끝이 곡선형으로 된 박공 종류)·천조파풍(지붕의 흐름 면에 붙는 파풍의 일종)을 설치하고, 사각형·팔각형의 탑을 겹겹이 쌓고 있다. 더욱이 그 양쪽에는 작은 탑까지 놓여 있다. 초기의 안에서는 보통 지붕의 오소독스한(정통의) 서양식 건축이었으나, 미쓰이 조직의 희망으로 이러한 무국적 디자인이 되었다.
海運橋三井組は、三井組が新たに創設した銀行のための建物である。木骨石造にベランダのついた洋風2階建ての軀体に、複雑に折り重ねられた屋根が乗っている。屋根には唐破風・千鳥破風を取り付け、方形・八角形の塔を重ねている。さらにその両側には小塔まで置かれている。初期の案では普通の屋根のオーソドックスな洋風建築だったが、三井組の希望でこのような無国籍なデザインになった。
의양풍 건축의 시발점이 된 이 두 건물은, 순식간에 도쿄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고, 다수의 니시키에에 묘사되어 일본 전역에 널리 퍼졌다. 지방에서 구경 온 사람들 중에는, 카시와데(신을 배례할 때 양손을 마주쳐서 소리 내는 일)를 두드리거나 새전(신불에 참배하여 올리는 돈)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시미즈 키스케는 또한, 제일국립은행에 강제로 양도된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를 대신할 스루가쵸-미쓰이구미(1874)도 지었다.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와 달리 단정한 서양식 건축이지만, 옥상에는 샤치호코(용마루 양단에 장식하는, 머리는 호랑이 같고 등에는 가시가 돋친 물고기 모양 장식물)가 자리잡고 있어, 이쪽도 니시키에의 소재가 되어 있다.
擬洋風建築の始点となったこの二つの建物は、たちまち東京の新名所となり、多数の錦絵に描かれ日本中に広まった。地方から見物に来た人々の中には、柏手を打ったり賽銭を上げる人もいたという。清水喜助はさらに、第一国立銀行に強制的に譲渡させられた海運橋三井組の代わりとなる駿河町三井組(1874年)も建設した。海運橋三井組と違い端正な洋風建築だが、屋上には鯱が鎮座しており、こちらも錦絵の題材になっている。
하야시 타다히로의 목조관청건축
林忠恕の木造官庁建築
요코하마에서 유래한 서양식 건축을 도입한 목수로는, 시미즈 키스케 외에 하야시 타디히로가 있었다. 대장장이, 톱질꾼을 거쳐 목수로 전향한 하야시 타다히로는, 요코하마에서 브리젠스, 휘트필드, 도슨 등 서양인 기사 밑에서 일하며 영국 임시 공사관의 공사에도 참가했다. 그 후, 1871년 말에 발족한 공부성에 고용되어, 관청 건축의 영선을 담당했다. 1873년에는 고용 외국인 토머스 제임스 워터스(1842~1898)가 통솔하는 대장성 영선요로 옮겨, 일본인 기술자의 필두(선두주자)가 된다. 워터스가 벽돌과 돌의 본격적인 건축을 맡아서 하는 동안, 하야시 타다히로는 대장성(1874), 내무성(1874), 고베하가시 세관관청(1873), 우체국(1874), 대심원(최고 재판소, 1877)과 같은 목조 관청사를 맡았다.
横浜由来の洋風建築を持ち出した大工には、清水喜助のほかに林忠恕がいた。鍛冶、木挽きを経て大工に転身した林忠恕は、横浜でブリジェンス、ウィットフィールド、ドーソンなどの西洋人技師のもとで働き、イギリス仮公使館の工事にも参加した。その後、1871年末に発足した工部省に雇われ、官庁建築の営繕を担当した。1873年にはお雇い外国人のトーマス・ウォートルスが率いる大蔵省営繕寮に移り、日本人技術者の筆頭となる。ウォートルスが煉瓦や石の本格的な建築を手がける一方、林忠恕は大蔵省(1874年)、内務省(1874年)、神戸東税関役所(1873年)、駅逓寮(1874年)、大審院(1877年)といった木造官庁舎を手がけている。
건물의 내용을 보면, 브리젠스나 시미즈 키스케와 같은 목골석조가 아니라, 보통의 벽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아치나 코너스톤(모퉁이돌)에만 돌을 붙이는 목골석조의 생략형이다. 건물의 모습도, 일본식 지붕을 얹거나 탑을 세우거나 하지 않고 단조로운 사각형 안에 담았으며, 유일하게 페디먼트와 열주가 붙은 커다란 포치(현관)가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에는 팔라디아니즘을 선호한 워터스의 영향이 보인다. (이것들은) 의양풍의 건축 표현으로는 얌전하지만, 중앙 관청의 건축이라는 점에서 지방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하며, 포치만을 강조한 팔라디아니즘 붕괴의 구성은 지방 관청의 정형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建物の内容を見ると、ブリジェンスや清水喜助のような木骨石造ではなく、普通の壁には漆喰を塗りアーチやコーナーストーンにのみ石を貼る木骨石造の省略形となっている。建物の姿も、日本屋根が乗ったり塔が付いたりせず単調な四角形の内に納まり、唯一ペディメントと列柱のついた大ぶりな車寄せが張り出している。こうした構成にはパラディアニズムを好んだウォートルスの影響が見られる。擬洋風の建築表現としてはおとなしいが、中央官庁の建築ということで地方への影響力は強く、車寄せだけを強調したパラディアニズム崩しの構成は地方官庁の定型として広まっていった。
목조-회반죽의 초등학교
木造漆喰の小学校
학제(일본 최초의 근대적 학교 제도를 정한 교육법령) 공포를 기점으로, 초등학교뿐 아니라 군청, 현청, 경찰서 등 지방의 공공건축도 서양식화를 요구받게 된다. 각지의 도편수(우두머리)는 도쿄,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에서 의양풍이나 베란다콜로니얼의 서양식 건축을 보고 듣고, 고향에 초등학교나 관공서를 지었다. 목골석조계의 의양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 목조 회반죽 마감의 의양풍은, 중부 지방의 나가노, 야마나시, 시즈오카의 3개 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学制発布を境に、小学校だけでなく郡役所、県庁、警察署といった地方の公共建築も洋風化を求められるようになる。各地の棟梁は東京、横浜、長崎などで擬洋風やベランダコロニアルの洋式建築を見聞し、国許に小学校や役所を建てた。木骨石造系の擬洋風から一歩進んだこれら木造漆喰仕上げの擬洋風は、中部地方の長野、山梨、静岡の三県で最もよく盛り上がった。
그중에서도 특히 활기를 띤 곳은 야마나시로, 현령 후지무라 시로(1845~1908)에 기인하여 후지무라식 건축이라 불리는 일련의 의양풍 건축이 지어졌다. 후지무라 시로는 야마나시 부임 전에, 초등학교 발상지인 교토를 거쳐, 오사카에서 의양풍의 초등학교 건설을 추진한 인물로, 타쿠미학교(1874)와 료오보쿠학교(1874)를 시작으로 다수의 의양풍 건축을 지었다. 정육면체의 주체부에 태고루(북을 달아맨 누각)를 얹은 형식을 가진 초등학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타쿠미학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오사카의 토다이구미 제19구 초등학교(1873)나 시가현 나가하마의 카이치학교(1874)가 지어졌다는 점에서 이 형식의 발원지는 오사카로 추정된다.
中でも特に盛り上がったのは山梨で、県令藤村紫朗のもと藤村式建築と呼ばれる一連の擬洋風建築が建てられた。藤村紫朗は山梨赴任前に、小学校発祥の地である京都を経て、大阪で擬洋風の小学校建設を推進した人物で、琢美学校(1874年)と梁木学校(1874年)を皮切りに多数の擬洋風建築を建設している。立方体の主体部に太鼓楼を載せた形式を持つ小学校は他の地域ではあまり見られないが、琢美学校とほぼ同時期に大阪の東大組第十九区小学校(1973年)や滋賀県長浜の開知学校(1874年)が建てられていることから、この形式の発信源は大阪にあるとみられる。
야마나시에 이어, 시즈오카에는 미츠케학교(1875)나 호우츄학교(1875), 니시노시마학교(1875)가, 나가노에는 나카고미학교(1875)나 카이치학교(1876)가 지어졌다. 카이치학교는 설계에 있어 도쿄나 야마나시의 의양풍을 참고하여, 뒤이어 지어진 스와 분지의 타카시마학교(1879), 산 하나 건너의 카쿠치학교(1878), 이웃 마을의 야마베학교(1885) 등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선진지(다른 곳보다 발전이 앞서거나 진보한 지역)에 세워진 초등학교는 주변 지역에 영향을 주어, 목조 회반죽 계열의 의양풍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山梨に続いて、静岡には見付学校(1875年)や坊中学校(1875年)、西之島学校(1875年)が、長野には中込学校(1875年)や開智学校(1876年)が建てられた。開智学校は設計に当たって東京や山梨の擬洋風が参考にされており、後を追って造られた諏訪盆地の高島学校(1879年)、山一つこえた格致学校(1878年)、隣村の山辺学校(1885年)などに影響を与えている。このように先進地に建てられた小学校は周囲の地域に影響を与え、木造漆喰系の擬洋風は全国に広まった。
시타미이타의 의양풍
下見板の擬洋風
회반죽 계열의 의양풍이 절정을 맞이할 때쯤, 시타미이타(외벽널, 물막이판자)에 페인트를 칠해 마무리하는 의양풍이 등장해, 의양풍의 말기에 널리 퍼졌다. 시타미이타 계열의 의양풍은 야마가타와 도쿄에서 시작됐지만, 질과 양에서 영향력은 야마가타가 더 크다고 생각된다.
漆喰系の擬洋風がピークを迎える頃、下見板にペンキを塗って仕上げる擬洋風が登場し、擬洋風の晩期に広まった。下見板系の擬洋風は山形と東京から始まるが、質と量から影響力は山形の方が大きいと考えられる。
야마가타에서는 초요오학교(1876)를 시작으로, 현청사(1877), 사범대학(1878), 제생관(병원, 1879)과 같은 큰 작업이나 지역 내 니시다가와군청(1881), 쓰루오카경찰서(1884) 등이 지어졌다. 건설 러시는 1876년부터 1881년까지 5년간 지속되었고, 지어진 건물은 주요한 것만 28건에 이른다. 삿포로와 쓰루오카 사이에서 기술 교류가 있었던 야마가타에서는, 개척사로부터 시타미이타의 서양식 건축이 전해져 이러한 의양풍 건축이 지어졌다. 건설을 주도한 현령 미시마 미치쓰네(1835~1888)는 전임처에서도 후쿠시마의 다테군청(1883)이나 미나미아이즈군청(1885), 토치기의 현청사 등 시타미이타의 의양풍 건축물을 계속 지었다.
山形では朝暘学校(1876年)を皮切りに、県庁舎(1877年)、師範学校(1878年)、済生館(1879年)といった大作や、郡部に西田川郡役所(1881年)、鶴岡警察署(1884年)などが建てられた。建設ラッシュは1876年から1881年まで5年間続き、造られた建物は主なものだけでも28件に及ぶ。札幌と鶴岡の間で技術交流があった山形では、開拓使から下見板の洋風建築が伝わりこうした擬洋風建築が建てられた。建設を主導した県令三島通庸は、転任先においても福島の伊達郡役所(1883年)や南会津郡役所(1885年)、栃木の県庁舎など下見板の擬洋風建築を建て続けた。
도쿄에서는, 공부성(1874)이 시타미이타의 의양풍 제1호지만 한동안 후속이 없었고, 1877년(메이지 10년)이 되어서야 학습원(1877), 고마바농학교(1877), 히토쓰바시강당(1877), 원로원(1878) 등이 지어졌다. 이들은 대장성 영선요에 의한 것으로, 목골석조 계열을 짓고 있던 중앙 관청의 기술진은 메이지 10년에 접어들면서 시타미이타 계열로 전환했다.
東京では、工部省(1874年)が下見板の擬洋風の第一号だがそのしばらく後続がなく、1877年(明治10年)になってから学習院(1877年)、駒場農学校(1877年)、一ツ橋講堂(1877年)、元老院(1878年)などが建てられた。これらは大蔵省営繕寮によるもので、木骨石造系を建てていた中央官庁の技術陣は明治10年に入ると下見板系に転じている。
전통의 목조기법으로 용이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일본의 풍설에도 강한 시타미이타의 의양풍은 메이지 10년대에 걸쳐 도호쿠 3현과 도쿄에 뿌리를 내린 후, 메이지 20년대에 들어 일본 열도 전역에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관이나 의원 등 전국에 남아 있는 시타미이타의 간편한 서양관은, 이 시타미이타 의양풍의 후예다.
伝統の木造技法で容易く作ることができ、日本の風雪にも強い下見板の擬洋風は明治10年代を通じて東北三県と東京に根付いた後、明治20年代に入って日本列島全域に広ま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写真館や医院など全国に残る下見板の簡便な西洋館は、この下見板の擬洋風の末裔にあたる。
의양풍의 종언
擬洋風の終焉
오리지널리티 높은 건축물이 만들어졌던 의양풍 건축이지만, 메이지 10년대 후반이 되면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된다. 탑옥이 없어지고, 우진각 지붕 형식 2층 건물의 동 중앙에 삼각 페디먼트를 얹은 2층 포치를 마련하는 형식이 일반화되어간다. 혼조경찰서(1883), 히카미군 각 읍면 쿠미아이리츠고등소학교(1884), 우와지마경찰서(1884) 등 지역적 편향 없이 같은 시기에 이러한 형식의 건축이 지어졌다. 정보 부족으로 인해 다양성을 낳았던 의양풍 디자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보가 증가하여 정형화되어간다.
オリジナリティの高い建築が作られていた擬洋風建築であるが、明治10年代後半になるとどこか似通った形をとるようになってくる。塔屋が設けられなくなり、寄棟造二階建の棟の中央に三角ペディメントを戴く二層車寄せを設ける形式が一般化していく。本庄警察署(1883年)、氷上郡各町村組合立高等小学校(1884年)、宇和島警察署(1884年)など、地域的な偏りがなく同時期にこうした形式の建築が建てられた。情報不足ゆえに多様性を生んでいた擬洋風のデザインは、時間の経過と共に情報が増加し定型化されていく。
관청사의 건축 형식이 표준설계화되어간 것도, 정형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1877년부터 1881년까지, 부현청사 건설비가 국비로 지원되면서, 신축 시 국가의 심사가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내무성 청사의 형식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 형식이 평준화된다. 1881년 7월에 공사 비용이 지방 부담으로 변경되는데, 이 무렵부터 관청사 설계에 건축가가 관여하게 되었고, 의양풍의 시대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官庁舎の建築形式が標準設計化していったことも、定型化を促す要因となった。1877年から1881年の間、府県庁舎建設費が国費支弁になり、新築に際して国の審査が厳しく行われるようになった。結果として内務省庁舎の形式がほとんど唯一の選択肢となり、形式が平準化していく。1881年7月に工費が地方負担に変更されるが、この頃になると官庁舎の設計に建築家が関与するようになり、擬洋風の時代は終焉に向かっていた。
초등학교 건축도, 1877년 전후부터 각 현에서 학교건축법이 제정되면서, 학교건축에 계획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다. 1890년에는 초등학교 설비준칙, 1895년에는 학교건축도 설명 및 설계대요가 제정되어, 이전까지 각 부현에서 지도하던 학교건축이 정부에 의해 일원적으로 지도받게 되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의 평면은 편복도의 동을 여러 동 늘어놓은 형식으로 수렴되어간다. 또한, 일본풍 교사에 비해 공사 비용이나 수선비가 높다는 점에서 의양풍 교사의 건설이 회피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초등학교 건축에서 디자인 의식 자체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小学校建築も、1877年前後から各県において学校建築法が制定され、学校建築に計画概念が導入されはじめる。1890年には小学校設備準則、1895年には学校建築図説明及設計大要が制定され、それまで各府県において指導されていた学校建築が政府によって一元的に指導されるようになった。その結果、小学校の平面は片廊下の棟を数棟並べた形式に収斂していく。また、和風校舎と比べ工費や修繕費が高く付くことから擬洋風校舎の建設が避けられるようになる。こうして、日本の小学校建築からデザイン意識そのものが急速に失われていった。
게다가, 1887년(메이지 20년)경부터 의양풍 건축에는 다양한 개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남방(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해 일본 기후에 맞지 않는 베란다는 창호를 끼워 실내화했고, 처마가 얕기 때문에 벗겨지기 쉬운 회반죽 벽은 시타미이타로 덮었다. 의양풍의 최대 특징인 탑옥이나 포치도, 보다 본격적인 서양건축에 접근하기 위해 철거 혹은 개편되어갔다.
さらに、1887年(明治20年)頃から擬洋風建築には種々の改造が施されるようになる。南方起源で日本の気候に合わないベランダは建具をはめられ室内化し、軒が浅いために剥離しやすい漆喰壁は下見板で覆われた。擬洋風の最大の特徴である塔屋や車寄せも、より本格的な西洋建築に近づけるため撤去あるいは改変されていった。
평가
評価
의양풍 건축은 당시 ‘서양조’나 ‘양풍가조’, ‘西洋型家屋ニ模’한 것, ‘양풍 모조’ 등으로 불렸다. 동시대부터 ‘모조(모방)’로 인식되었지만, 이는 본래 석조, 벽돌조로 지어야 할 것을 목조로 대체한 것, 즉 양식상의 모조가 아니라 구조상의 모조로 인식되었다.
擬洋風建築は当時「西洋造」や「洋風家造」「西洋型家屋ニ模」したもの「洋風模造」などと呼ばれていた。同時代から「模造」だと認識されていたが、これは本来石造、煉瓦造で造られるべきものを木造で代用したもの、つまり様式上の模造ではなく構造上の模造として認識されていた。
메이지 10년대 후반 이후, 코오부대학교(공부성 직할 대학)를 졸업한 일본인 건축가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서양건축을 직사(있는 그대로 묘사함)한 건축이 지어졌다. 여러 외국과의 불평등조약을 해소하고자 했던 메이지 정부에게, 근대화란 성급한 서양화와 다름없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메이지 초기의 의양풍 건축은 양식적 정확성을 결여한 부끄러운 것으로 단죄된다. 비판 속에서 의양풍 건축은 일관성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모조의 대상도 구조에서 양식으로 바뀌었다.
明治10年代後半以降、工部大学校を卒業した日本人建築家たちが活動を開始すると、西洋建築を直写した建築が建てられた。諸外国との不平等条約を解消したい明治政府にとって、近代化とは性急な西洋化に他ならなかった。こうした趨勢の中、明治初期の擬洋風建築は様式的正確さを欠いた恥ずかしいものとして断罪される。批判の中で擬洋風建築はまとまりのあるものとして認識されるようになり、模造の対象も構造から様式に読み替えられた。
다이쇼 시기가 되면, 메이지 시기의 서양식 건축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건축가들이 자신의 표현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이 시기(에), 의양풍 건축도 독창성의 발로로 높이 평가받았다.
大正期になると、明治期の洋風建築を再評価する動きが活発に見られるようになる。建築家たちが自己の表現を強く意識しはじめたこの時期、擬洋風建築も独創性の発露として高く評価された。
전후, 의양풍 건축에는 ‘미요-미마네(눈썰미; 보고 흉내내는 중에 저절로 터득함)’라는 평가가 상투적인 문구처럼 따라붙게 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메이지 건축의 본격적인 연구에서도, 콜로니얼 스타일의 서투른 모방으로 자리매김했다. 1960년대부터 의양풍 건축의 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양식보다는 근대화에 공헌한 문화적 의의가 그 평가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戦後、擬洋風建築には「見よう見まね」という評価が決まり文句のように結びつけられるようになる。1950年代後半から始まる明治建築の本格的な研究においても、コロニアルスタイルの稚拙な模倣として位置づけられていた。1960年代から擬洋風建築が文化財指定されるようになるが、様式よりも近代化に貢献する文化的意義がその評価の中心に据えられていた。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모방에만 그치지 않는 독창성이 풍부한 건축이라는 적극적인 평가가 부활한다. 이후 전문가들은 ‘의양풍’이라는 말이 가짜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을 싫어하여, 다른 말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1970年代になると、西洋の模倣にとどまらない独創性に富んだ建築という積極的な評価が復活する。これ以降の専門家たちは「擬洋風」の語が、ニセモノとしてのニュアンスを感じさせることを嫌い、別の語に置き換える提案をしている。
용어의 유래
言葉の由来
쿠로다 토모노부(1885~1967)가, 1915년의 사진집 『도쿄 100 건축』에서 내무성 청사에 ‘의양식’이라는 양식명을 붙였는데, 이것이 양식으로서의 의양풍 건축을 지칭한 최초의 사용 예이다.
黒田朋信が、1915年の写真集『東京百建築』において内務省庁舎に「擬様式」という様式名を与えており、これが様式としての擬洋風建築を指した最初の使用例である。
그 후, 다이쇼 시기 이후의 메이지 서양식 건축의 재평가에서 기초적인 자료 수집을 했던 호리코시 사부로(1903~1982)가 「서양식 모방건축 60년기」(『건축과 사회』, 1930.6.)와 「메이지 시계대기(7권)」(『일본건축사』, 1931.5.)에서,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과 대비되는 말로써 ‘의양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その後、大正期以降の明治洋風建築の再評価において基礎的な資料収集を行った堀越三郎が「洋風模倣建築六十年記」(『建築と社会』1930年6月)や「明治時計台記(VII)」(『日本建築史』1931年5月)の中で、建築家の設計した建築と対比する語として「擬洋風」という語を用いている。
이 말은, 전후에도 계승된다. 세키노 마사루(1909~2001)에 의해 집필된, 최초의 일본 근대건축 통사 『메이지, 다이쇼, 쇼와의 건축』(『세계미술전집』 제25권, 1951)이나, 아베 키미마사(1921~2004)의 「메이지의 건축」(『메이지 문화사』 제8권, 1956)에서, 하야시 타다히로로 대표되는 일본인 기사가 제작한 건축을 ‘의양풍 건축’이라고 부른다.
この言葉は、戦後にも継承される。関野克によって執筆された、初の日本近代建築の通史「明治、大正、昭和の建築」(『世界美術全集』第25巻、1951年)や、阿部公正の「明治の建築」(『明治文化史』第8巻、1956年)で、林忠恕に代表される日本人技師の手になる建築を「擬洋風建築」と呼んでいる。
현존 건축 일람
現存建築一覧
2003년 시점에서 현존하는 주요 의양풍 건축 목록. → 해당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할 것.
2003年の時点で現存する主要な擬洋風建築の一覧。
일본 이외의 사례
日本以外の事例
19세기 후반, 유럽 여러 국가들은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각지에 거류지를 두었다. 하지만, 1843년 개항 직후의 상하이에서는 중국풍의 팔작집 지붕을 씌운 강해관 등의 의양풍적인 건물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 중국·한반도에서는 건축의 의양풍화를 찾아볼 수 없다. 20세기 초입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중화바로크라고 불리는 일군의 의양풍적인 건축이 지어졌고, 한국에서도 덕수궁 안에 베란다콜로니얼의 서양식 건축이 지어졌다. 이것은, 일본과 달리 중국이나 한반도에는 이미 석조건축이나 입식(의자 사용)이 존재해, 서양건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양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19世紀後半、ヨーロッパ諸国は東アジアへと進出し、各地に居留地が置かれた。しかし、1843年開港直後の上海においては中国風の入母屋屋根をかけた江海関などの擬洋風的な建築が建てられていたにも拘わらず、19世紀中の中国・朝鮮半島では建築の擬洋風化は見られない。20世紀初頭に入ってから、中国では中華バロックと呼ばれる一群の擬洋風的な建築が建てられ、韓国においても徳寿宮の中にベランダコロニアルの洋風建築が建てられた。これは、日本と異なり中国や朝鮮半島には既に石造建築や椅子座が存在しており、西洋建築を受け入れる素養があったためと考えられる。
- 출처 : 「擬洋風建築」, Wikipedia(en), 2022.7.12.
- 니시키에(にしきえ; 錦絵) : 풍속화를 색도 인쇄한 목판화(민중서림 엣센스 일한사전). 에도 시대 중기에에 확립된, 우키요에 판화의 한 형태(ja.wikiped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