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 (1965)

강기세


1. 서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라는 조직체 내에서 살아야 한다. 즉,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하물며 인간이 정신과 노동으로 창조하는 건축 과정도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사회란 어떠한 (일)개인의 힘이나 어떠한 절대자의 용단으로 이끌려나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어떠한 계층의 목적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적어도 보이지 않는 필연적 인과 관계의 힘으로 진행되며 그 결과 역사가 성립될 것이다. “아놀드 조셉 토인비”(1889~)는 “역사의 연속성은 어떠한 개인의 생명에 예시되는 것 같은 연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하는 여러 세대의 생명으로 된 연속성이다”, 또한 “역사 연구의 단위는 국민 국가도 아니고 전체로서의 인류도 아니고 우리가 사회라고 명명한 일정한 인간 집단이다”(『역사의 연구』에서)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역사를 사회와 분리시킬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건축물은 인간의 행위의 결과인 동시에 사회적인 행위의 결정체이다. 이러한 행위를 명확한 목적의식 아래 움직이는 동작, 곧 의지적 행동으로만 건축물이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나 좁은 의미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명확한 목적 관념이 있고 없고 간에 경향 내지 동기에 따라 행하여지는 모든 건축 동작을 통털어서 건축하는 행위라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건축은 비대인(非對人)적이다. 즉, 건축 자체가 영향을 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영향에 의하여 비로서 사회적인 것으로 된다. 비유하자면 원시 시대에 어떠한 섬에 건축물이 홀로 존재하였다가 기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발견되었다면 이것이 어떠한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물질적 가치나 과학적 가치는 인정될 망정 사회적 가치는 인정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과학 면에서 건축을 정의한다면 건축이란 반드시 인간이 창조한 것으로서 서로의 상호작용, 즉 건축 간에 교섭이 있으면서 영향에 의하여 나타나야만 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미루어 보면 건축사를 고찰하는데 건축 외적인 원인(사회과학적인 면)을 경시하고는 올바른 평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건축 외적인 면에서 건축사를 연구하는 방법이란 사상을 그 구체적인 형상에서 관찰하여 무한히 다양한 사상들 가운데서 그 개성과 원인을 밝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한 어떠한 타당적 합리적 법칙을 찾으며 이 법칙으로서 미래를 측정하는데 도움이 되고 건축사를 연구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상기한 전제하에 건축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을 사회과학적인 여러 현상 가운데서 경제발전 과정과를 비교연구하려고 한다.

이러한 초점에서 처음에 사회경제 형태에 따라 건축의 생산 과정과 건축 생산자의 신분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연구하고 다음은 전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건축의 성쇠 과정을 연구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음은 건축, 조각, 회화간에 우세와 이들 간의 관계를 연구하며 끝으로 “콘-위너”가 말한 건축의 두 가지 근본 양식을 경제발전 과정에 따라 어떻게 변천하여 나왔는가를 연구하려 한다.


2. 본론

2.1. 건축의 생산 과정과 생산자

일반적으로 조각과 회화는 제작됨에 있어 가내 경제의 개인적 수요때문이었든지 혹은 주문에 의하여 나타났든지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 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조형예술사에서 조각과 회화와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는 건축도 이러한 과정으로 나타났는가 또는 나타났다면 경제 발전과는 어떻게 병행하여 나왔는가를 연구하려고 한다.

수렵 시대는 건축이 개인적 수요에 의하여 발생하였으므로 인간 대 인간(개인 대 개인)이 횡적 유대는 있었으나 종적인 유대는 없이 건축물이 자급자족으로 생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적·신정적·봉건적 사회에서는 왕후귀족의 세습 경제로 인해 건축 생산자는 노예이거나 가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로서는 고대 애굽(이집트)의 “아메넴헤트 4세”가 애굽의 수부(수도)를 엘-아마르나에 천도하였을 때 “아메넴헤트 4세”를 위하여 모든 예술적인 생산을 수행한 일단의 건축가(주로 조각 및 건축기술공)가 그를 따랐고(“도메니코 파로디”(1668~1740), 『고대 이집트 예술사론』) 마스타바(분묘)를 비롯한 피라미드에 종사한 사람들은 노예 및 가신이었다. 또한 봉건적 고대 희랍(그리스)의 건축 생산자도 같은 지위에 있었다.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에는 건축물의 조각을 만드는 제작소가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추측할 수가 있다.(“조르조 바사리”(1511~1574), 『그리스 조각』)

또한 동일한 현상은 자연 경제에 의하여 생활하고 건축물의 생산이 봉건적 영지의 범위 내에 국한되어 있었던 당시의 신구라파(유럽)에서도 반복되었었다. 9, 10세기의 서구에서 가장 전진적이요, 조직적인 경제였으며 그와 동시에 문화의 ◯권으로 되어 있었던 수도원도 동일한 현상이었다. 건축기술공들은 수도원 내에 거주하면서 수도원을 위하여 건축물을 생산하였으며, 이들은 수도사로서 일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9세기의 독일에 있어서의 “생 갈” 수도원도 역시 동일하였으며, 15세기의 세속적인 영주의 경제 내에 “불그돈侯”(아마도 영국의 찰스 1세)가 자기 저(택) 내에 미술가, 조각가, 건축가인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를 초빙하고 가신의 칭호를 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하우젠스타인”, 『예술과 사회』)

이렇듯이 자연 경제와 농업적·신정적·봉건적 혹은 귀족 제도의 사회에 있어서의 건축 생산자는 가내 경제의 일부요 농노 또는 가신이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건축 생산자에 한하여 만들어진 건축물은 주인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었으며 혹은 영주가 생활하고 제작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 경제의 필요를 만족시킨 것이었다.

봉건적 장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도시에 수공업적 조합과 단체가 있는 곳이나, 또는 장원을 침식하고 있는 도시에 있어서의 경제가 수공업적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던 곳, 환언하면 봉건 사회와 함께 또는 그 위에 수공업 사회가 존재하고 있었던 곳에는 주문에 의하여 건축물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최초는 전도시적 집합단체 또는 수공업적 조합 전체의 주문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후에는 상업자본주의 계층의 대두와 함께 개인의 주문에 의하여서도 생산된 것이었다. 그리고 건축 생산자는 직인이었다.

예를 들면 기원전 오~6세기 고대 희랍에서의 건축 생산자는 직인이었으며 직업은 자손으로 물려 내려갔다.(“조르조 바사리”(1511~1574, 『희랍의 조각』)

그리고 아크로폴리스 건설을 위하여 “페리클레스”(BC 495경~429)가 초빙한 건축 생산자들은 직인으로서 도시적 국가가 각 개인에게 대하여 아직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는 전 도시의 집답단체의 주문에 의하여 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기원전 4세기에 자본주의적 개인주의가 아테네인의 시민적 감정을 해퇴시키고 개개의 당호(당대 호걸)가 우선적 역할을 서게 되었을 때, 주택과 같이 개인의 주문에 의하여서도 건축물이 산출된 것이었다.

중세기 시대의 구라파의 건축 생산자도 직인으로서 조합적으로 조직된 전 도시적 집단의 주문을 받아서 생산에 종사하였다. 건축기술사나 조각사도 석공조합에 가입되어 있었다.

조금 뒤 이태리의 다른 도시, 다른 구라파 제국(여러 국가)에서도 조합이 조직되었다. 공업조합에 가입한 12, 13세기경의 건축 생산자는 주문에 따라 개개의 조합을 위하여 주로 사원의 건립과 장식에 종사하였었다.(“베네딕트 드레이어”(1495~1555), 「미술시장」)

또 15세기 이태리에 있어서도 건축 생산자로서의 직인은 조합에 복무하고 조합의 주문에 의하여 종사하였었다.(“베네딕트 드레이어”, 「미술시장」) 15세기에 플로렌스에 있어서 성 미셸 빌라(벨몬드 빌라 산 미셸)의 벽감에 조상을 안치하기 위하여 각 조합 간에 경쟁이 일어났었다. 육상(肉商)조합은 성 베드로의 조상을 “도나텔로”(1386~1460)에서 주문하고 목수조합은 “성 마르코”의 조상을 주문하고 무기조합은 “조르쥬”의 조상을 각기 주문하였다. 또 “로렌초 기베르티”(1378~1455)가 제작한 22,000프랑이나 하는 플로렌스의 침례교회당의 제1문(하늘 나라의 문이라고 칭함)과 같은 것은 한 조합의 자금으로 조영된 것이었다.

문예부흥기 이전의 이태리 건축 생산자는 실제로는 직인이요 예술가로서의 건축가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장기간 일함으로써 놀라운 기술과 정비신중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기베르티”는 제1문을 제작하는데 21년간 걸렸고 제2문은 더 오래 걸렸던 것이다. “루카 델라 로비아”(1400~1482)는 플로렌스 중앙사원의 성가소를 제작하는데 거의 10년 걸렸다.(엘 자이칙(?), 「문예부흥기의 사람과 예술」)

상업자본주의 발달의 정도에 따라 수공업 사회가 상업자본주의 계층 때문에 압추되는(억눌리고 내쫓기는) 정도에 따라서 또 개인주의적 감정이 증대하는 정도에 따라서 직인으로서의 건축 생산자는 점차 건축가로서의 귀족으로 그 지위가 변하였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근육노동직공은 천하게 여기고 모욕하는 태도를 가졌으며 그는 호화로운 방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음악이나 시의 낭독을 들으면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노예적인 일’은 제자에게 시키고 자신은 다만 그림이나 건축의 계획만 하였던 것이다.(엠 헷펜드(?), 「레오나르도 다빈치」)

만약 수공업 시대의 건축 생산자가 무명으로 제작하였었다면 상업자본주의에 접근하면 할수록 이들은 집단으로부터 독립하여 개인의 창조적 인격으로 이름이 밝혀진 것이다.

예를 들어 건축사를 연구하여보면 봉건적 사회였던 그 많은 로마네스크 식과 고딕 식 사원의 건축 설계자의 이름은 극히 알기 어려우나 상업자본주의 시대에 접근할수록 많은 건축의 이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고대 희랍 시대를 돌아보아도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봉건적 사회의 희랍과 수공업을 거치고 상업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오면서부터는 “익티누스”, “칼리크라테스”, 코수티우스와 같은 건축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반면 농업적 신정적 애굽 사회에서는 그 많은 건축물의 설계자를 거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차츰 개인적 명예심을 여러 가지로 유지하게 되어 기사 및 귀족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이었다.

15세기 초두 시에나의 중앙사원 건립에 으뜸이 되었던 명장들은 기사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1370~1427경)는 베니스 공화국에서 귀족의 칭호를 받았었으며, 보로니아 시는 “프란체스코 프란치아”(1450경~1517경)를 ‘국민장관’의 한사람으로 임명하였다. 또 “도나토 다뇰로 브라만테”(1444~1514)의 장례식에는 법왕청의 전원이 열석하였다.(엘 자이칙(?), 「문예부흥기의 사람과 예술」)

상업자본주의는 일정한 발전 과정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는 독재군주정체의 형태로 조직되었다. 정치적 문화적 중심은 국왕의 궁전으로 옮겨 갔었다. 이 시대의 건축가는 다시 봉건적 가내 경제에서와 같은 상태에 있었다. 다만 틀리는 것은 건축 생산자는 이제 노예도 가신도 아니었다. 즉 현물적 보수 대신에 일정한 금전을 받아서 임시로 궁정에 초빙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 나타났던 것은 희랍사회사의 헬레니즘 기의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후계자의 시대였다. 동일한 현상은 16·7세기의 구라파에서도 또한 18세기에서도 반복되었다.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밀라노의 공작의 저택에서 제작하였고,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건축가 “쥘 아르두앙 망사르”와 “피에르 Gadier”(?~1531)가 활동하였고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는 법왕청에서 활동하였다.

발달한 상업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건축 생산이 시장을 위하여 생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전 영역에 있어서 주문에 의한 생산 방법이 자본주의적 시장 때문에 생산에 압축되어 있었던 구라파의 모든 나라에 점차 확대되었다.

일방으로부터는 자본의 대량이 각 개인에게 집중되고 타방으로부터는 개인적 자본가와 병행하여 집단적 자본가가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성열기에 있어서 건축 기업가는 예외의 형태에 있어서만 주문에 의한 각 개인을 위하여 건축하였을 뿐 그 기업의 주된 것은 시장을 위한 가옥과 각 시구(도시와 구역)의 건축물이었다. 또한 반대로 많은 건축가들이 동일한 건축물을 위하여 경쟁을 하게 된 것도 자본가가 한 건물을 위해 많은 건축가 중 한 명을 선택한 것도 일종의 시장을 위한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투기적 목적으로 건립된 집, 혹은 건축 중의 집 하나를 시장에서 기성품을 선택하는 것과 같이 선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많은 건축가들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상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시공을 초과하여 수렵 사회의 건축은 개인적 수요에 의하여 자급자족되었고 농업적·신관적·봉건적 사회에서는 주인의 필요로 가내 경제의 일부인 농노 또는 가신이 건축에 종사하였으며 수공업 사회에서는 주문에 의하여 직인의 신분으로서 건축 생산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신흥 상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귀족으로서의 건축가가 명예를 걸고 주문에 의하여 건축물을 생산한 것이었으며 상업자본주의 사회로서 정치적으로 독재군주정체에 있었던 사회에서는 초빙에 의하여 분신은 가신이 아닌 가신과 같은 행동을 금전으로서 대우받으며 건축에 종사하였었다. 끝으로 발달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시장화된 건축이 자본가와 동일한 분신으로서의 건축가에 의하여 건립된 것이었다.

상기와 같이 건축사를 통하여 나타난 건축 생산 과정과 생산자의 사회적 신분의 변천(?) 과정은 기원을 전후로 반복된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사회경제 발전과 우연히도 일치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2.2. 건축의 성쇠

만약 여러 세기에 걸쳐 나타난 건축사를 본다면 여기에 건축이 어떤 나라에서 어떻게 융성하고 쇠퇴하였는가? 또 건축 생산 면에 있어서 헤게모니가 어떠한 나라로부터 다른 나라에 어떻게 추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융성기에 있는 건축의 외적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첫째 수량적으로 풍부한 건축 생산, 둘째 유명한 건축 생산자나 건축가의 배출, 셋째 그 나라의 건축에 의하여 제공된 새로운 문제, 넷째 어떠한 나라의 건축이 다른 나라의 건축에 끼친 강대한 영향들이다. 그 반면 쇠퇴기에 외적 특징은 융성기의 특징이 결여되고 있을 때 쇠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성퇴의 변천 과정은 사회경제 현상과 어떠한 종속 관계가 있을 것인가?

어떠한 학자는 그 원인은 공기나 기후 가운데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어떠한 학자는 정치조직 가운데 그 나라를 지배하는 자유로운 정치조직 하에서만 융성할 수 있다고 관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후 조건이 상이한 고대 애굽과 서구 중세기 중기의 건축은 다 같이 융성하였었다. 그리고 민주 체제 하에 있었던 고대 희랍 중기와 불란서의 전제군주 시대는 정치 조직 및 통치 형식이 가장 상반하고 있으면서도 건축은 실제로 융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건축의 융성과 쇠퇴의 참된 원인은 기후나 국가의 정치조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면으로 관찰하건데 경제적 행복의 여유가 없는 곳과 충분한 경제적 보장이 없는 곳에는 건축은 융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고석기 시대의 수렵 사회에서의 건축이라고 칭하는 것과 여기에 부수되는 동굴의 조각을 비롯한 회화는 비교적 고도에 달하고 풍부하게 발달한 것은 언제나 그들이 생존하기 위하여 노골한 노력을 한 나머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위험한 장소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종족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보장된 경우에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관찰하건데 비록 융성했었다고 간주하기는 어려우나 융성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충분한 여건으로 보아 융성기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농업적 신정적 봉건적 사회에서는 지주나 영주가 농노나 노예의 무보수적 노력을 요구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건축은 융성할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애굽의 신정적 봉건적 건축은 수만의 오예가 지배자에게 (신신과) 노동으로서 봉사하지 않았던들 융성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노예 전군(전체 무리)의 손에 의하여서만 피라미드나 카르나크의 굉장한 신전을 건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대 희랍의 건축은 아테네 시민이 노예를 건축 공사에 가담시키고 또 다른 방면에서는 자국에 속하여 있었던 많은 식민지로부터 조금도 거리낌 없이 물품을 가져왔기 때문에 찬연하게 빛났을 것이다.

또 고딕 건축으로 서구에 발생하여 극도로 융성하게 되었던 것도 들(野) 일에 종사하고 있던 수도사들이 건축 공사에 가담함으로써 충분한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궁정 건축이 가장 성하였던 전제 치하의 불란서, 서반아, 영국은 국왕이 국민적 수입의 주요 부분을 스스로 취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공업 사회에 있어서도 그들은 일정한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만이 경향을 실현할 수가 있었다. 즉 중세기의 불란서 도시의 수공업 사회에 건축급 조각에 그러한 진전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그 일부를 건축가와 조각사에게 분여하였기 때문이다.

상업이 농업의 상위에 서게 되어 시장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이 선진적 경제 형식이 되면서부터는 또한 건축은 융성하였던 것이다. 고대 희랍 중기나 로마 전성기 그러고 서양과 동양의 세계무역로의 중심지였던 비잔틴(동로마)이나 신흥 자본주의 사회였던 이태리를 비롯한 독일 불란서 화란 등의 제(여러)국가들도 건축이 융성하였던 것이다.

즉 회화, 조각과도 달리 특히 경제의 감수성이 큰 건축이 융성하여지려면 다만 상당한 경제 지반(어떠한 형태이었던)을 예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회의 경제적 융성과 오랜 세월 동안 의존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경제적 쇄징(쇠퇴 징후)과 함께 건축도 쇠퇴하였던 것이다.

2.3. 건축과 조각, 회화와의 융화 관계

경제적 융성에 뒤따르는 건축은 조형예술사에 있어서 두 가지의 근본적 전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떠한 때는 각 종의 타예술(조각, 회화)이 건축과 혼연일체가 되어 형성된 때가 있었고, 반면에 이 종합이 분열되어 건축, 조각, 회화가 개개로 존재하고 독자적으로 발달한 때도 있었다.

전자는 종합적 예술의 근본적 핵심을 건축으로 하여 규모의 웅대함과 전환의 미를 특장(특별한 장점)으로 하고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후자는 반대로 분화된 건축으로서 대규모와 대비약의 점이 없고 분화적이고 비기념비적이며 우아한 성질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관계가 사회경제 발전에 따라 어떻게 변천하고 내려왔는가?

종합적·기념비적 건축은 자연 경제를 기초로 하여 생활한 사회에서 발생하고 발달하였으며 또한 수공업 사회(아직 봉건에서 탈피 못한)에서도 그 존재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 반면 분화적·비기념비 건축은 발달한 상업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업자본주의 사회가 만약 정치상 절대전제의 형태로 조직되고 개인의 활동에 대하여 일정한 제한을 설정하고 있는 경우에는 건축은 기념비적 종합적 전형과 분화적 비기념비적 전형과의 중간 전형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애굽의 조영물인 피라미드나 신전에는 파라오의 조상과 원주 혹은 석관에 그려진 조상으로 보충되어 있다. 그리고 그 규모는 웅대하고 종합적이며 기념비적이다.

고대 희랍 전기의 크레타 섬 미케네의 건축도 이와 같은 기념비적 양식을 보이고 있다. 크노소스 또는 티린스에 있어서의 벽화로 장식된 굉대한 궁전 같은 것은 즉 이러한 예이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초두 희랍(희랍 전성기)의 “무네시클레스”에 의해 개축된 수호신을 모신 에레크테이온이 있다. 이 수호신은 황금의 상으로서 “페이디아스”가 만든 장대한 조상으로서 그 손에 ‘승리의 여신’을 받들고 있다. 또 파르테논 대신전의 박공은 많은 신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현재는 잔존해 있지 않으나 그 신전에는 벽화로 둘러싸인 낭하가 있었다.)

또한 로마의 신전은 바실리카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 문의 정면이 종교적 내용을 가진 커다란 구도로서 장식되고 원주나 주두나 박공은 인간이나 동물의 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서구 중세기의 고딕식 대가람은 마천루와 같은 굉장한 건물로서 현관과 낭하와 성가대는 엷은 부조로 덮혀 있고 세장한 창은 채색된 모양으로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 애굽, 고대 희랍 전기, 중세기 초두와 같이 농업적·신정적, 봉건적 사회와 고대 희랍 중기, 중세 중기의 서구와 같은 수공업적 사회에서는 건축이 조각과 회회가 유기적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기념비적 종합적 건축으로서 사회성이 풍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업자본주의가 발달됨에 따라 간 곳마다 전일(통일)의 예술적 유기체와 종합적 건축은 쇠퇴로 인도되고, 동시에 건축은 기념비적으로부터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는 비기념비적·개인적·분화적인 건축이 적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 나타난 때는 기원전 4~5세기의 희랍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났고, 그 후 15세기의 자본주의적 이태리 사회에서 반복되었고, 다시 19세기의 자본주의 구라파에서 재현되기 이전 17세기 화란(네덜란드)에서 그 최정점에 달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희랍인의 최고 관념은 수호신에 수호되어 있는 조국의 도시였다. 그러나 이 이상은 상업자본주의 시대의 희랍인에게 있어서 이미 생생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웅변가 “리쿠르고스”(BC 390경~324)는 어떠한 연설 가운데 ‘… 이러한 사람들은 출생으로 말하면 시민이나, 사상적으로는 자기의 이익만 발견된다면 어떠한 나라라도 조국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조국은 국가가 아니요, 재산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개인주의가 시민성 위에 승리를 얻은 것과 동시에 사회적 건축은 개인적 건축에 그 지위를 양보하였으며 “리쿠르고스”가 공공 건물의 장식을 촉진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또한 “데모스테네스”(BC 384~322)는 어떠한 연설 가운데서 페르시아 전쟁 시대나 영웅적 시민성의 시대를 회고하면서 ‘… 당시 장사들(“밀티아데스”(BC 550~489))의 저택은 별로 훌륭한 것이 아니었고 주랑과 신전과 병기고와 공공 건물이 당시 건설되었다. 그런데 금일의 국가적 건축 사업은 벽락(벼락)부자의 저택은 그 광휘와 혁미함에 있어서 사회적 건축물을 침식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만약 기원전 5세기에 “페이디아스”가 도시국가에 봉사하였다고 한다면 4세기에는 “프락시텔레스”와 “스코파스”는 개인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조각가들의 조상은 “페이디아스”의 조상처럼 사회적 건축물의 일부분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락시텔레스”가 제작한 〈디오니소스를 안고 있는 헤르메스〉나 혹은 “리시포스”가 제작한 〈아폭시오메노스의 모작〉의 조상은 여하한 건축학적인 틀(Form)도 필요치 않았다. 그리하여 조각은 건축물의 벽으로부터 격리되고 집단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개체로수 구별되고 자족적이며 가동적인 것으로 화하였다.

문예부흥기의 건축은 개인의 가옥과 저택의 건립이 많았다. “기베르티 로렌초”는 전혀 사회적 교육적 건축에 봉사하고 있었으나 “도나텔로”는 공공적 수요뿐만 아니라 개인적 수요를 위하여서도 그 조각을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플로렌스(피렌체)의 귀족 혹은 베니스의 총독의 저택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나 수도원을 위하여서도 벽장이나 꽃상자나 침대를 연애적인, 혹은 수렵적인 장면의 묘사로서 장식하였다. 그리고 조각은 건축학적 종합체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인 예술적 개체로 되었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의 회화는 이들이 제작한 건축의 벽화보다 정밀하고 우수하다는 의미에서 분화를 뜻하는 것이다.

최후에 이 비기념비적, 개인적 분화적 건축이 세 번째 부활을 보게 된 때는 17세기의 자본주의적 화란이다. 화란은 상업도시로 당시 발전하였으나 대건축물은 별로 건립되지 않았으며, 풍토와 잘 조화된 주택의 실내 장식 등에는 매우 훌륭한 것들이 있었다.

19세기의 전 구라파 제국(여러 국가)은 자본주의적 관계가 견고하게 되었을 때 분화적 비기념비적 개인적인 건축이 종래에 비하여 어디던지 많이 존재하게 되었다. 즉 건축은 조각 회화 등과 개별적이요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는 종합적이요 기념비적 건축물을 기도(기획)하였더라도 계획과 고안으로 종지부를 찍고 말았던 사실도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노동기념비,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노동기념비’와 같은 사회적 기념비적인 것은 단편적 유물 혹은 단지 계획으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로댕”은 건축공사의 계획(낮과 밤, 각각의 직업탐상부의 노동의 상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계획)을 만들어 종합적 기념비적 건축을 창조하려고 하였으나, 이 목적을 위하여 국제적 협회가 조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공사비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불란서의 예술가 “외젠 카리에르”(1849~1906)sms “로댕”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던 것이다. ‘… 존재하고 있지 않은 대전당의 건립에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은 종합적 기념비적 대예술의 건립에 필요한 요건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우젠스타인”은 같은 의견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하였다. “로댕”의 조각에 건축학적 소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전 사회의 죄다. 부르주아 사회의 이 객관적 결점 때문에 “로댕”은 아무 것에도 기대어서 있지 않고 공간에 쓸쓸히 고립하고 있는 개개의 원형 조상의 제작에 자기의 모든 정력을 집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종합적 기념비적 건축은 불가능하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건축의 이 두 가지 극단인 전형의 중간에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독재전제적 형식의 정치 조직을 요구한 시대의 건축이었다. 이러한 건축은 전제군주가 국가의 관념을 구현하고 있을 경우에는 기념비적 사회적이요, 이 관념이 일개의 인물 가운데 구현하고 있을 경우에는 개인적 비기념비적이었다. 즉 동일한 건축으로 어떤 경우에도 더 많이 기념비적이다. 그와 동시에 전자의 경우에는 건축의 종합적 성질이 후자의 경우보다 더 많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건축의 전형은 희랍사(그리스 역사)의 헬레니즘 시대 희랍 제국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탈로스” 왕조와 “에우메네스” 왕조의 페르가몬 성랑(성곽 망루)은 종합적·기념비적 건축으로 전제군주의 전공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신구라파에 있어서 이러한 건축 전형은 17세기의 서구의 궁전 건축의 형체 가운데 나타나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과 같은 건축은 조가과 회화를 의연 상호히 보충하여 그 결합 가운데 하나의 혼연한 종합적 기념비적 건축을 형성하였고 “르브룅”(1619~1690)에 의하여 제작된 천정의 문채(무늬와 채색)나 벽장식의 회화는 장대한 윤랑 가운데 기념비적 성질이 엿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쇠퇴기에 있었던 전제주의의 17세기, 서반아 여러 왕의 궁전 건축 가운데도 “루이”14세기의 불란서의 종합성도 기념비적 성질도 없다. 서반아의 “필립” 4세의 궁전에도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벨라스케스”(1599~1660) 1인의 초상화에 의하여 대표되고 있을 뿐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과거에 있어서 자연 경제 뒤에 이루어진 수렵 사회나 봉건적·농업적 사회급 수공업적 사회와 같은 유기적 사회에서는 일정한 건축 전형, 즉 종합적 기념비적 사회적 전형이 적합하고 있었다. 전제 치하의 궁전 건축은 ㅡ 적어도 그 어떤 나타남에 있어서 ㅡ 이와 반대의 전형으로 추이하고 있으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이 전형과 관계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발달된 상업자본주의 사회 형체에서는 건축적 표현으로서 분화적 비기념비적 건축이 적합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건축의 타예술과의 융화 관게를 연구하여 본 결과, 기원을 전후로 반복된 현상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우연히도 사회의 경제 발전과 일치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2.4. 건축과 조각과 회화의 우열 관계

조형예술사를 통하여 보면 시대 시대마다 건축이 우월할 때와 조각이 아니면 회화가 우월한 때가 있었다. 즉 이들 중에 하나가 어떠한 시대에 융성한 때를 가르쳐(가리켜) 우월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월 관계는 사회경제 발전에 따라 어떻게 변천하여 나왔는가를 연구함으로써 건축의 시대적 가치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대 희랍사에 있어서 조형예술 중 우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건축이다. 즉, 신이 주거하는 성전과 신전이 바로 건축이다. 그러나 신전과 성전은 점차로 조각으로 장식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건축과 조각은 동렬에 이르게 되었으며, 희랍 후기는 조각이 패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적 조각 위에 시민적 조각이 나타났고, 이로써 건축은 전기나 중기에 비하여 쇠퇴의 길을 걸은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중세기로부터 17세기까지의 서구에서도 가장 명료하게 그려지고 있다. 중세기 초두의 패권은 전혀 건축에 있었다. 10세기의 기독교 사회, 특히 이태리에서 건축열이 왕성했으며 또 각처에서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았던 교회가 개축되었다. 이러한 건축열은 12, 3세기에도 계속되었다. 당시 공간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종의 기적인 장려한 대사원이 곳곳에 건립되었다. 로마네스크 식 사원 고딕 식 사원은 건축 그 자체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조각에 의하여 장식되었다.

이러한 건축과 조각의 종합이 분리되었을 때, 이태리의 조각은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의 융성을 반복하면서 건축과 동열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예술의 패권은 건축 조각으로부터 떠나서 회화로 옮아 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조각가에 가까웠으나 최고의 예술은 조각이 아니라 회화라고 인정하였고,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1472)는 전문적인 건축가이었으나 회화는 예술 중 가장 가치 있는 또 관심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말하고 회화의 우월성을 지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의 구라파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완전이 패권은 회화에 속하여 있었고 (공업적 양식이 세력을 차지하기 이전) 건축은 전에 비하여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면 건축이 건축조각(조상)으로 다음은 조각으로 그 다음은 회화로 추이하여간 행정(진행) 가운데 어떠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희랍과 신구라파 예술의 초기에서는 사원의 형체로서의 건축이 많이 건립되었으나 이러한 건축 지배는 종교적 세계관의 지배와 일치하고 있었고 나아가서는 종교적 세계관은 농업 경제의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표현이었다.

농업공동단체로부터 지주·영주가 점차로 확연하게 분리됨에 따라서 또한 주인과 노예와의 극단한 대립에 서게 된ㄴ데 따라서 그리고 봉건적 귀족 계층에 있어서 지배적 인격의 의식이 증가함에 따라서 조각예술의 사회심리적 지반이 형성되어 조상적 조각이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계층적 자각의 소산인 조상적 조각도 자기에게 유리한 사회적 지반만을 발견하면, 봉건적 사회가 상업자본주의 사회로 변하였어도 역시 그 존재를 계속하고 융성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건축이나 조각보다 회화가 대리석이나 청동이나 목재보다도 창조적 ‘자아·개성’의 표현을 구속하지 않았으며 ‘자연에 충실’하겠다는 환상 가운데 사실주의적 요구에 영합하면서 좀 더 잘 세계와 인생과를 다면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보다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던 사물까지도 건축이나 조각보다 더 잘 묘사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회화가 우월한 위치에 놓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건축의 우얼기를 찾아 본 결과, 건축의 융성기와 일치하고 있으며, 이는 기원을 전후로 반복된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사회경제 발전 과정과 일치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2.5. 건축의 양식

양식의 문제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되는 통일적인 표현 형식 요소의 총체를 뜻하며, 이는 특정의 시기 민족에게 공통된 정신태도 표현 방법을 나타내는 것, 또는 작품의 특징적 경향을 나타내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1717~1768)은 처음으로 희랍 미술에 양식 개념을 적용하였으나 본 장에서는 상기한 방법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역사적 경제 발전에 따른 양식 문제를 고찰하고 건축의 성쇠 패권 등과 어떠한 관계를 이루고 나아가는가를 알아 볼려고 한다.

독일의 미술사가 “에른스트 콘 위너”(1882~?)는 그의 유명한 저서 『조형예술에 관한 양식발전사』 가운데서 건축과 실용적 예술의 발달에 있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두 가지의 근본 양식을 설정하고 있다. 그는 그 양식의 하나를 ‘축조적 혹은 구성적’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하나를 ‘장식적과 장식모양적 혹은 비구성적’이라고 하였다.

“콘-위너”는 축조적 구성적 양식이란 술어로서 모든 건물에 나타나고 있는 실용적인 목적 적합성의 총화 가운데 볼 수 있는 양식을 의미하고 있다.

‘… 축조적 양식의 구조의 각 부분은 어느 것이나 그 사명을 가지고 있어 서로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전체도 편리하게 또는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기 때문에 내부의 구성과 외부의 구조와는 완전히 서로 조응하고 각 부분은 같이 엄밀하게 사명에 따라서 구분된다. 벽과 주(기둥)는 명백히 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그 구조에 있어서도 명료하다. 벽으로 이루어지는 주요한 것은 평면인 것이다. 그것을 수평선으로 국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중력에 제약된 돌의 수평층으로 평면을 구분하는 주요한 선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평면적 장식은 구조의 명료함을 지도하는 논리적 감정으로부터 생긴다. 동일의 법칙은 실용적 예술 가운데 움직이고 있다…. 단지 열세를 보이기 위하여서만 필요한 허식(겉치레)적 궁전은 건립할 수 없고…’

이러한 축조적 혹은 구성적 양식의 전형으로서 “콘-위너”는 희랍의 도릭 오더와 중세기의 로마네스크식, 이태리의 초기 르네상스 식을 지칭하고 있다.

“콘-위너”는 장식적 혹은 비구성적 양식이란 장식의 요소가 실용적 사용적 편리성의 관념을 몰각(아주 없애버림)하고 압도하고 있는 양식을 의미하고 있다.

‘… 건축물의 제(여러) 부분이 여기에서는 기능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다. 원주, 벽주, 벽은 평면으로부터 돌출하고 있는 회화적 장식과 축조술을 몰각한 건축적 형식과 문양 장식과 군상적 조형술에 의하여 파괴되어 있다. 여기에는 벌써 그 기능적 사명에 상응하는 각부의 구별이 없다. 중력과 지주 같은 것도 거기에는 서로 구별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건물의 사명 이상의 인상을 이것에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벽은 아무런 구별도 없이 건물의 내부를 둥그런 선과 같이 두르고 있다. 즉 고딕 식의 높은 창의 형태를 한 회화적 창문, 혹은 로코코 식의 거울이 만들어지고, 천정은 대담하게 축조된 둥근 지붕에 뻗혀 넓히고 혹은 회화적 족자처럼 솟아 있다. 이것과 같이 회면적 구조에 있어서는 필요상 이루어진 지붕의 선적 구분을 돌출한 탑이나 장식적 화병이나 조상에 의하여 파괴하고 있다….’

“콘-위너”는 장식적 혹은 비구성적 건축 양식의 전형으로서 헬레니즘 시대의 양식, 고딕 양식, 바로크 로코코 양식을 지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콘-위너”는 건축 양식의 근본적 전형을 ‘구성적과 장식적’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분류한다면 두 가지의 건축 양식을 앞 장에서 연구한 내용들과 비교할 때 대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여할 수가 있다.

건축적인 것과 실용적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의 구조적 혹은 구성적 양식의 지배는 건축이 지도적 예술이었던 시대와 결합하고 있다.

도릭 식 건축은 조각과 회화가 제2류의 보조적 의의만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번영하고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교회나 영주의 성랑의 건설이 제1위에 서 있던 시대에 이루어졌고 이 현상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도 반복되었다. 당시 시민적 건축은 마치 교회적 건축이 희랍 혹은 중세기의 농업공동단체에 있어서 지배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신흥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우월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장식적 건축 양식은 건축적 사고가 회화적 사고에로 변하여 온 시대, 예를 들면 고대 희랍 후기 고딕 후기(이미 회화적 경향의 단서가 보였을 때) 특히 바로크 기 로코코 기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적 사고로부터 회화적 사고에의 추이의 배후에는 사회경제적 과정이 가로놓여 있다. 즉 발달한 자본주의의 영향에 의하여 봉건적·농업적·신정적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희랍의 도릭 식 원주의 주두는 지붕의 하중을 받는 일정한 실용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명을 가진 단순한 4각형이었다. 그러나 상업이 활발해지고 경제적인 여유가 늘어가자 아테네 시민은 이 실용적 편리성의 요소에 장식의 요소를 가미한 여러 가지 모양의 항판(項板; 아바쿠스)으로 바꿨다. 그리고 발달한 상업자본주의로 화한 때 이와 동시에 예술에 있어서는 조각보다 회화가 우월적으로 진출하였을 때 이오니아 식의 주두는 코린트 식의 주두로 변하였다. 즉 최초의 실용적 편리성은 아칸서스의 잎을 형상한 바구니의 형태로 화미를 극한 장식적 주두에 의하여 완전히 질식되었다.

또한 회화예술의 지배를 배경으로 하여 구성주의로부터 장식주의로의 이러한 변모는 고딕 건축의 발달 가운데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타오르는 고딕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는 그 최후의 시기는 최대 한도의 높이에 달하게 하기 위하여 탑 위에 탑을 쌓고 첨탑상 장식 위에 첨탑상 장식을 올리고, 전 구조를 망상 장식적 모양으로 변화시켰다. 거기에는 건축물 요소의 최초의 실용적 사명은 전혀 상실되어 버렸다.

“고딕 건축의 발달에 있어서 일방으로는 이 예술의 지지자인 수공업 사회 사람이 상업 발전의 영향과 자본주의적 변혁의 영향에 의하여 쇠퇴에 향한 때와 일치되어 있고 타방(면)으로는 예술적 영역에 있어서 회화적 사고의 지배가 확립되고 그와 동시에 생활의 새로운 요건과 개인주의와 함께 취미주의의 발달에 의하여 제약되고 회화의 지배가 확립된 시대와 일치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5세기로부터 10세기까지 중세기의 수공업 사회와 바꾸어 역사적 무대에 나타난 상업자본주의 계층과 귀족 계층은 고딕 식에 대항하여 자기의 건축 양식을 만들었다. 그것은 일방으로는 그들의 경제적 여유와 타방으로는 산업 혁명의 전야에 있어서 그들의 점차적 쇠퇴와 함께 드디어 회화예술의 진보적 승리의 분위기에서 구성주의로부터 장식주의로의 같은 진화를 체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7세기의 건축 양식인 바로크 건축은 곳곳에서 장식을 위한 장식을 무의미하게 쌓아 올려 장식주의의 도취 가운데 르네상스의 천재를 멸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건축의 구성적 장식적 양식은 일정한 사회의 경험 형태에 따라 적합하고 있으며 이렇게 나타난 양식은 건축의 성쇠와 또 건축의 패권 문제와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3. 결론

이상과 같이 서구를 중심으로 건축의 생산 과정, 생산자의 사회적인 신분, 건축과 조각, 회화와의 융화, 우열, 건축의 성쇠, 그리고 건축의 양식 등의 발전 과정을 사회경제 발전 과정과 비교 연구하여 보았다.

이 때 공통적으로 발견된 현상은 애굽 사회로부터 기원전까지 나타난 과정이 기원후 중세기 초두에서 18세기까지 나타난 과정과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수렵사회, 농업적, 신정적, 봉건적 사회, 수공업 사회, 신흥 상업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발달한 상업자본주의 사회마다 건축의 일정한 전형이 적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 역사를 통하여 두 번 발현됨으로써 경제발전 과정이 건축의 역사적 발전 과정의 요인 중 경시 못 할 인자로 인정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건축이 사회의 여러 현상과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받아왔고 현재도 그러하지만 사실 건축의 역사적 발달 과정의 제 요인이 ‘내적 존재냐’, ‘외적 존재냐’ 하는 문제와 존재의 원인을 수학을 풀듯이 과학적으로 해답을 구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오직 역사를 통하여 두 번 이상 일치함으로써 원인으로 간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경제 발전이 건축의 발달 과정의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 1965년 논문으로 본문 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한자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음역(2022.11.2.)한 것.
  • 출처 : 「건축의 역사적 발달 과정에 대한 연구 : 서구를 중심으로 사회·경제 발전 과정에 따라」, 강기세, 건축(대한건축학회지), v.9 n.2(1965-07) via AU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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