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십서』

De architectura


체사레 체사리아노가 번역하고 그림을 그린 1521년 이탈리아어판 『건축십서』. via Wikimedia Commons
비트루비우스에 대한 필사본. 1390년경 양피지. via Wikimedia Commons

건축십서(건축에 관한 10권의 책. 원제는 ‘데 아르키텍투라’)는 로마의 건축가이자 군사 기술자인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에 의해 집필된 건축에 관한 논문이며, 그의 후원자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건물 프로젝트를 위한 안내서로 헌정되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일한 건축 관련 논문으로, 르네상스 시대 이래 건축 이론에 관한 최초의 책이자 고전 건축의 규범에 대한 주요 자료로 여겨져 왔다.

여기에는 그리스와 로마 건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뿐만 아니라 군대 병영, 도시, 크고(수로, 건물, 욕장, 항구) 작은(기계, 측정 장치, 기구) 구조물의 계획과 디자인에 대한 처방이 포함되어 있다. 비트루비우스의 책은 교차 볼트, 돔, 콘크리트 및 기타 제국 로마의 건축과 관련된 혁신 이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그의 10권의 책에는 로마의 건물 디자인 및 기술의 이러한 특징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

본문에서 언급된 것을 통해, 우리는 원본에 적어도 몇 개(아마도 8개)의 삽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중세 필사본에는 이 중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결함은 16세기 인쇄 판본에서 보완되었는데, 그 판본에는 많은 전면 삽화가 그려졌다.


유래 및 내용

기원전 30~2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건축, 예술, 자연사, 건설 기술에 대한 그리스와 로마의 많은 고대 작가들의 지식과 견해를 결합한 것이다. 비트루비우스는 본문 전체에 걸쳐 많은 권위자들을 인용하며, 그리스 건축가들이 신전 건물과 그 오더(도릭, 이오닉, 코린티안)를 발전시킨 것에 대해 칭송하고, 원시 오두막에서의 건물-짓기의 기원에 대한 주요 설명을 제공한다.

건축과 관련된 그의 유명한 “3대 요소” 특성 ㅡ 우틸리타스, 피르미타스, 베누스타스(유용성, 내구력, 아름다움) ㅡ 으로 자주 인용되지만, 후대의 논문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미학적 원칙은 제3권에 요약되어 있다. (키케로와 바로를 통해) 라틴어 수사학으로부터 부분적으로 파생된, 오더, 배치, 비례, 의도된 목적을 위한 적합성에 대한 비트루비우스적 용어들은 수세기 동안 건축가들을 이끌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 로마의 저자는 건축가의 자격(1권)과 건축 도면의 유형에 대해 조언한다.

십서 또는 두루마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건축십서』 – 건축에 관한 열 권의 책

De architectura – Ten Books on Architecture

  1. 도시 계획, 건축 또는 토목 전반, 그리고 건축가 또는 토목기사에게 요구되는 자격
  2. 건물 재료
  3. 신전 그리고 건축의 오더 (다빈치의 드로잉으로 이어진 신체 비례에 관한 부분 포함)
  4. 3권의 계속
  5. 민간 건물
  6. 주택 건물
  7. 포장 도로 및 장식용 회반죽
  8. 상수도 및 수로
  9. 건축에 영향을 끼친 과학 ㅡ 기하학, 측량, 천문학, 해시계
  10. 기계의 사용 및 건설 ㅡ 로마식 공성 기관, 물레방아, 배수 기계, 로마 기술, 승강 장치, 기력학(氣力學)

로마 건축가들은 공학, 예술, 손재주를 결합하는 데 능숙했다. 비트루비우스는 이러한 유형의 건축가였으며, 『건축십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건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주제를 폭넓게 다루었다. 여기에는 수학에서 천문학, 기상학, 의학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무관해 보일 수 있는 많은 측면이 포함되었다. 로마의 개념에서는, 건축은 인간과 그 주변 환경의 육체적, 지적 생활에 관계된 모든 것을 고려해야 했다.

이와 같이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에 관한 많은 이론적 문제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건축십서』의 2권에서, 그는 벽돌로 작업하는 건축가들에게 소크라테스-이전의 물질 이론을 숙지하여 자신들의 재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라고 조언한다. 9권에서는 플라톤의 추상 기하학을 측량사의 일상 업무와 관련시킨다. 점성술은 인간 삶의 조직에 대한 통찰력으로 인용되는 반면, 천문학은 해시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비트루비우스는 방명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크테시비우스와 아르키메데스를, 음악을 위해 아리스톡세누스(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를, 연극을 위해 아가타르쿠스를, 그리고 건축을 위해 바로를 인용한다.

건물

비트루비우스 이후의 그리스 주택 계획. via Wikimedia Commons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기풍(에토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작품의 질은 작품 자체의 형식이나 솜씨가 아니라 작가 작업의 사회적 관련성에 달려 있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건축십서』의 가장 유명한 선언은 건축가들이 여전히 인용하는 선언일 것이다: “좋은 건물에는 견고함, 편익, 기쁨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이 인용문은 헨리 워튼(1568~1639) 경의 1624년 버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책에 있는 구절을 정확히 번역한 것이지만(I.iii.2), 그 이후로 특히 “commodity”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영어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 태그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현대 영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읽힐 것이다: “이상적인 건물은 튼튼하고, 유용하며, 아름답다는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비트루비우스는 또한 인간 비례를 연구했으며(3권) 그의 캐논(규범) 중 이 부분은 나중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도안인 호모 비트루비아누스(“비트루비안 맨”)에 채택 및 적용되었다.

주택 건축

비트루비우스는 종교건물, 기반시설 및 기계에 대한 설명에는 충실한 반면, 주택건축에 대해서는 엇갈린 메시지를 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비트루비우스는 건축가의 개입 없이 직접 집을 지은 집주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주택건축에 대한 그의 양면성은 6권 도입부의 첫 문단에서 가장 또렷하게 읽힌다. 6권은 전적으로 주택건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건축 이론가 사이먼 위어가 설명했듯이, 비트루비우스는 주거의 미덕이나 가족 또는 가정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에 대해 쓰는 대신에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그리스 윤리 원칙인 크세니아에 관한 일화를 쓴다.


로마의 기술

로마의 발리스타(노포). via Wikimedia Commons

『건축십서』가 중요한 이유는 승강 장치, 기중기, 도르래 등 공학 구조물에 사용되는 다양한 기계와 투석기, 노포, 공성 기관 같은 전쟁 기계에 대한 설명 때문이다. 비트루비우스는 또한 해시계와 물시계의 제작, 대기의 공기 이동(바람)의 성질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으로 기력솥(최초의 증기 기관)의 사용법을 설명하기도 했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가르 수도교. via Wikimedia Commons

『건축십서』의 8, 9, 10권은 로마 기술에 관하여 알려진 많은 것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현재 프랑스 남부에 있는 가르 수도교 같은 현존하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더욱 보강되고 있다.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이러한 거대 구조물들이 존재하며, 이는 로마 공학의 힘에 대한 증거다. 로마 수로 건설에 대한 비트루비우스의 설명은 짧지만, 특히 그것들을 측량했던 방식과 필요한 재료의 신중한 선택에 대한 주요 세부 사항을 언급한다.

그의 책은 서기 1세기 후반에 로마의 많은 수로를 관리하도록 임명된 장군, 프론티누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프론티누스는 1세기 로마 수로에 대한 최고의 논문인 『데 아콰이둑투』(수로에 관하여)를 집필하면서, 수로에 불법 파이프를 삽입해 물을 우회시킴으로써 취수량과 공급량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프랑스 바르브갈에 있는 16개 이상의 물레방아 유적에서 알 수 있듯, 로마 제국은 수력의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방앗간은 매우 효율적인 방식으로 곡물을 제분했으며, 훨씬 후대에 세워진 히에라폴리스 제재소 같은 많은 다른 공장이 현재 알려져 있다.

재료

비트루비우스는 다양한 건축물에 사용된 여러 가지 건설 자재뿐만 아니라 치장벽토(스터코) 바르기 같은 디테일에 대해 설명했다. 시멘트, 콘크리트, 석회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는데, 장수한 많은 로마 건축물은 건물 재료와 디자인에 대한 그들의 기술력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추진기를 위한 디자인. via Wikimedia Commons

그는 식수를 운반하는 데 납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점토 파이프를 선호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당시의 납 파이프 주조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질병에 걸리는 것을 경험적으로 관찰한 후 『건축십서』의 8권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로마와 많은 다른 도시에서 사용되는 물의 대부분은 (미네랄이 곧 파이프의 내부 표면을 코팅하여 납 중독을 감소시키는) 경수(센물)였다.

비트루비우스는 아르키메데스와 그가 왕관에서 불순물 섞인 금을 간파한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르키메데스가 수조에서 발생하는 변위에 의해 왕관의 부피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유레카!”라고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갔고, 이 발견을 통해 그는 왕관의 밀도를 순금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왕관이 은으로 합금되었고 왕이 사기 당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배수기

히우친투 광산의 배수 바퀴. via Wikimedia Commons
히우친투에서 발견된 배수 바퀴의 순서. via Wikimedia Commons

비트루비우스는 비록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10권에서 아르키메데스 나선 양수기의 구조를 설명했다. 그것은 밭에 관개를 하거나 광산의 물을 빼기 위해 물을 끌어올리는 데 널리 사용된 장치였다. 『건축십서』에 언급된 다른 승강 기계로는 무한-양동이-사슬과 역 상사식-수차 등이 있다. 물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된 물레방아의 잔해는 스페인에 있는 히우친투와 웨일즈 서부에 있는 돌라우코티 같은 오래된 광산에서 발견되었다. 히우친투의 수차 중 하나는 현재 대영 박물관에 있고, 후자의 수차는 웨일즈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유적은 이들 광산이 현대적인 채굴 시도로 다시 열렸을 때 발견되었다. 이 수차들은 수직으로 배열되어 사용되었을 것이며, 16개의 수차가 지하수면 위로 최소 29m 이상 물을 끌어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각 바퀴는 광부가 바깥 쪽 가장자리에 밧줄걸이(용 막대)를 사용하여 바퀴의 상단에 있는 장치를 밟으며 작업했을 것이다. 그들이 광산에서 그러한 장치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밀을 빻는 것뿐만 아니라 목재를 톱질하고 광석을 부수고 다듬이질 등 다양한 활동의 동력을 개발하기 위해 수차로 완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밀펌프

크테시비우스는 밀펌프의 발명가로 알려져 있는데, 비트루비우스는 이 펌프가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밸브가 있어 기계 위에 수두(水頭)를 형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장치는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자신의 저서 『프네우마티카』에서도 설명하고 있다. 이 기계는 레버를 위아래로 움직여 손으로 작동한다. 그는 그것을 저수지 위의 분수에 물을 공급하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언급했지만, 더 일반적인 용도로는 간단한 소방차로도 사용할 수 있다. 하나는 영국의 칼레바 아트레바툼(로마 실체스터)에서 발견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것들의 기능은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비트루비우스가 설명한 것처럼, 둘 다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비트루비우스는 또한, 크테시비우스가 유용한 기능을 제공하기보다는 오락과 즐거움을 위해 발명한 몇 가지 아우토마톤(자동기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중앙난방

로마 빌라 바닥 아래의 하이포코스트 유적: 엑세드라 아래 부분이 가려져 있다. via Wikimedia Commons

비트루비우스는 거주자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건물 디자인에 적용된 많은 혁신에 대해 설명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불에 의해 발생한 뜨거운 공기를 공공 욕장과 빌라의 바닥 아래와 벽 내부로 보내는 중앙난방의 일종인, 하이포코스트(히포카우스툼)의 개발이다. 그는 연료 효율성이 최대화되도록 그러한 건물을 디자인하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칼다리움(온탕)은 테피다리움(미온탕) 옆에 있고 그 다음에 프리기다리움(냉욕장)이 있다. 그는 또한 뜨거운 방의 열을 제어하기 위해 일종의 조절기를 사용하도록 조언했는데, 원형의 구멍 아래 지붕에 청동 디스크를 설치하여 도르래로 올리거나 내릴 수 있도록 하여 환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직접 제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과 카라칼라 욕장 같은 더 큰 테르마이(온천장)에서는 역방향 상사식-수차 같은 배수 장치를 사용하여 물을 압력 조정 탱크로 끌어올리는 데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측량 기구

비트루비우스가 측량에 능숙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은, 특히 수위(水位) 또는 코로바테스(수준기; 水準器)에 대한 그의 설명에 의해 알 수 있는데, 그가 다림줄을 사용하는 장치인 그로마(측량의 조준기)와 비교하여 호의적으로 묘사했다. 그것들은 모든 건설 작업에 필수적이었지만, 특히 수도교 건설에서, 수로의 벽을 손상시키지 않고 정기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균일한 경사도가 중요했다. 그는 포이팅거 지도 같은 정확한 여정 개발을 위해 필수적인 기계이며 본질적으로 도로를 따라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장치인 주행거리계에 대해 설명했다.

『건축십서』의 4권 1장 4절에는 오늘날 터키에 있는 (고대 국가가 있던 지역인) “카리아의 땅”인, 소아시아 내 13개 아테네 도시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이들 도시는 다음과 같다: 에페수스, 밀레투스, 뮈우스, 프리에네, 테오스, 콜로폰, 키우스, 에뤼드라이, 포카이아, 클라조메나이, 레베도스, 미틸레네, 그리고 14번째 도시인 스미르나. 세 번째 도시인 뮈우스는 “오래 전에 물에 잠겼고, 의례와 참정권을 신성시했다.”고 묘사된다. 이 문장은 비트루비우스가 저술 당시에 해수면 변화 및/또는 지반 침하가 발생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들 도시의 배치는 일반적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되어 있으므로 뮈우스가 위치해야 할 곳은 내륙으로 보인다. 만약 이 경우라면, 『건축십서』의 집필 이후, 이 지역은 지반이 융기하거나 해수면의 하강을 경험한 것이다. 해수면 변화나 그에 대한 추측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 후기에 많은 로마 항구들은 현대 작가들이 ‘침전’으로 묘사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항구를 준설해야 하는 지속적인 필요성은 국고에 큰 부담이 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이 비용이 제국의 궁극적인 붕괴에 크게 기여했다고 추측했다. 오늘날 영국 에식스에 있는 로마 소금 공장은 이곳이 해안선이었음을 암시하는 5미터 등고선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관측은 『건축십서』의 집필 이후 해안선 변화에 영향을 미친 침전 및 토양 반등의 정도를 나타낸다.


유물 및 재발견

필사본

비트루비우스의 작업은 9세기 초 샤를마뉴의 궁전 기록실에서 살아남은 라틴 문헌의 많은 예들 중 하나다. (이러한 고전 원고[필사본]를 찾고 복사하는 활동은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것의 일부다.) 비트루비우스의 현존하는 작품들 중 상당수는 그곳에서 다시 쓴 현존하는 원고인 대영 도서관 원고 ‘할리 2767’에서 유래했다.

이들 텍스트는 단지 복사된 것이 아니라, 샤를마뉴의 역사가이자 주교인 아인하르트가 방문했던 영국 성직자 알쿠인에게 몇 가지 전문 용어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면서, 그의 궁정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 외에도, 다음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거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신, 라바누스 마우르스, 라히네나우의 헤르만, 생 빅토르의 휴고, 멜키의 제르바시오, 맘스베리의 윌리엄, 생 트롱의 테오도리크, 페트루스 디아코누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필리포 빌라니, 장 드 몽트루이, 페트라르크, 보카치오, 조반니 데 돈디, 도메니코 디 반디노, 피렌체의 산로렌초 바실리카에 사본을 남긴 니콜로 아치아이올리, 힐데스하임의 베른바르트 주교, 성 토마스 아퀴나스. 1244년, (프랑스) 보베의 도미니카 수도사 빈센트는 중세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 “스페쿨룸 마이우스”에서 『건축십서』에 대한 많은 언급을 했다.

8~15세기에 걸쳐 쓰여진 『건축십서』의 많은 사본들은 중세 시대 내내 많은 필사본 형태로 존재했으며, 92종은 여전히 공공 소장처에 남아 있지만, 아마도 비트루비우스가 사용한 많은 전문 라틴어 용어의 노후화와 텍스트의 일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10개의 삽화 원본이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체사레 체사리아노의 ‘비트루비안 맨’ 삽화, 1521. via Wikimedia Commons

비트루비우스의 작품은 1414년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포지오 브라치올리니(1380~1459)가 스위스 생 갈 수도원 도서관에서 그것을 발견하여 “재발견”되었다. 그는 고전 문화 및 과학 유산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던 르네상스 사상가들의 수용적인 청중에게 이 원고를 공개했다.

인쇄판

인쿠나불라(기원, 요람) 버전(에디티오 프링켑스)인 최초의 인쇄판은 1486년 베로나의 학자 사(師) 조반니 술피티우스에 의해 출판됐지만(1495년 또는 1496년에 두 번째 판본이 출간됨), 삽화는 전혀 없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 사(師) 조반니 조콘도(1433~1515)는 1511년 베니스에서 목판화로 삽화를 넣은 첫 번째 버전을 제작했다. 이 책은 철저한 철학적 접근 방식과 탁월한 삽화가 돋보였다.

1520년대에 이탈리아어 번역본이 유통되었는데, 1521년 코모에서 인쇄된, 건축가 브라만테의 밀라노 친구인 체사레 체사리아노(1475~1543)의 새로운 삽화가 들어간 번역본이 최초의 인쇄본이다. 이 책은 다른 유럽 언어로 빠르게 번역되어 1547년 최초의 프랑스어 버전이 출판되었고, 1548년에는 최초의 독일어 버전이 뒤를 이었다. 최초의 스페인어 번역본은 1582년 미구엘 데 우레아와 후안 그라시안에 의해 출판되었다.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는 판본은 1664년 장바티스트 콜베르(1619~1683)의 의뢰로 클로드 페로(1613~1688)가 1673년에 프랑스어로 출판한 것이다.

존 슈트(~1563)는 1563년 초에 자신의 저서 『건축의 최초 및 주요 근거』을 위해 이 텍스트를 참고했다. 헨리 워튼 경의 1624년 작업인 『건축의 요소』는 이 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각색본에 해당하며, 1692년 번역본은 상당 부분 축약되었다. 영어권 사람들은 처음 다섯 권의 전체 번역을 보기 위해 1771년까지, 전체 번역을 보기 위해서는 179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인쇄술 덕분에, 비트루비우스의 작업은 매우 상세하고 설명을 제공하는 삽화와 함께 해석학의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후 여러 판본 중 1914년 하버드대학교 고전철학 교수인 고(故) 모리스 H. 모건 박사가 번역한 『건축십서』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와 인터넷 아카이브에서 모두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안 맨’, 1485-1490. via Wikimedia Commons

영향

비트루비우스의 작품이 재발견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후 수 세기 동안 고전 건축이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니콜리, 브루넬레스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같은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장인의 기량을 강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지식 분야를 과학적 학문으로 끌어올리는 근거를 『건축십서』에서 발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가장 잘 알려진 도안 중 하나인 ‘비트루비안 맨’은 3권의 첫 번째 장, 「대칭(균제비례)에 관하여: 신전과 인체에서」에서 비트루비우스가 개발한 신체 비례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영국 건축가 이니고 존스(1573~1652)와 프랑스인 살로몽 드 카우스(1576~1626)는 비트루비우스가 건축의 필수 요소로 간주했던 학문인 수와 비례에 기반한 예술과 과학을 최초로 재평가하고 구현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16세기 건축가 팔라디오는 비트루비우스를 그의 스승이자 길잡이로 여겼고, 자신만의 건축적 계율을 구상하기 전에 그의 작업을 기반으로 몇 가지 도안을 만들었다.

아스트롤라베

잘츠부르크에서 발견된, 비트루비우스의 설명과 일치하는 아나포릭 시계의 조각. via Wikimedia Commons

『건축십서』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클렙시드라 또는 물시계로 추정되는) 아나포릭 시계를 설명하면서 기계에서의 입체 투영법을 사용한 최초의 증거를 제공한다. 이 시계에는 하루의 시간을 나타내는 와이어 프레임 뒤에 회전하는 별의 장이 있었다. 와이어 프레임(거미)과 별의 위치는 입체 투영법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유사한 구조가 잘츠부르크와 프랑스 북동부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그러한 메커니즘은 로마인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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