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64 그룹


요세미티 국립공원 하프돔(반구형 산)의 사과 과수원. 1933년 4월. via Wikimedia Commons

f64 또는 f.64 그룹은 20세기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사진가 7인이 설립한 그룹으로, 특히 서양(미국) 시각으로 본 선명하게 초점이 맞춰지고 세심하게 구도를 잡은 이미지가 특징인 공통의 사진 스타일을 공유했다. 부분적으로는 20세기 초를 지배했던 회화주의 사진 양식에 반대하여 결성되었지만, 더 나아가, 자연 형태와 발견된 오브제의 정확한 노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모더니즘 미학을 촉진시키고자 했다.


배경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은 미국에서 사회적, 경제적 불확실성이 상당하던 시기였다. 미국은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사람들은 일상의 고단함을 벗어나 약간의 휴식을 찾고 있었다. 미국 서부는 후버 댐과 같은 대규모 공공 사업 프로젝트 덕분에 미래 경제 회복의 거점으로 여겨졌다. 대중은 서부의 소식과 이미지를 찾았는데, 이는 암울한 시기 속에서도 희망의 땅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 서부의 놀랍도록 디테일한 사진을 “영감과 구원하는 힘에 대한… 생생한 증언”으로 여겼던 앤설 애덤스(1902-1984) 같은 사진가들의 작업에 점점 더 매료되었다.

동시에 전국의 노동자들은 더 나은 임금과 노동 조건을 위해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력을 위해 함께 뭉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었고, 사진가들도 이러한 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은 f64 그룹이 결성되기 직전에 마르크스주의 예술가와 필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존 리드 클럽의 모임에 참석했다. 이러한 상황은 공통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뜻이 맞는 친구들이 모이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노력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f64 그룹은 단순한 예술가들의 클럽 이상이었으며, 자신들을 “억압적인 픽토리얼리즘의 물결”에 맞서 싸우는 전사로 묘사했고, 그 이름이 내포하는 모든 정치적 함의와 더불어 자신들의 선언을 의도적으로 ‘매니페스토(선언문)’이라고 명명했다.

이 모든 사회적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사진가들은 자신들의 매체의 모습과 표현해야 할 내용을 재정의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20년대까지 사진의 주요 미적 기준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1946) 등이 사진 예술의 최고 형태로 옹호한 픽토리얼리즘이었다. 1920년대 초 폴 스트랜드(1890-1976)와 이모겐 커닝햄(1883-1976) 같은 새로운 세대의 사진가들이 등장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지만, 그 10년이 끝날 때까지 일반적인 시각 예술 형식으로서 픽토리얼리즘의 후계자는 뚜렸하지 않았다. 웨스턴 같은 사진가들은 기존 시각 방식에 지쳐 있었고 자신들의 새로운 비전을 홍보하고 싶어 했다.


결성 및 참여자

 f64 그룹은 에드워드 웨스턴의 제자인 앤설 애덤스와 윌러드 밴다이크(1906-1986)가 공통의 미적 원칙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동료 사진가들을 조직하기로 결정하면서 만들어졌다. 1930년대 초, 밴다이크는 오클랜드의 683 브록허스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작은 사진 갤러리를 개설했다. 그는 683 갤러리를 “우리를 모르는 뉴욕 사람들에게 코웃음 치는 우리의 방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스티글리츠와 그의 이전 뉴욕 갤러리인 291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밴다이크의 집/갤러리는 친한 사진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고 결국 f64 그룹의 중심이 되었다.

전시 포스터. via Wikimedia Commons

1931년, 웨스턴은 샌프란시스코의 M.H. 드영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전시회에 대한 대중의 관심으로 밴다이크의 집에 모인 사진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모아 그룹 전시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드영 박물관 디렉터를 설득하여 공간을 제공받았고, 1932년 11월 15일에 많은 관중이 모인 가운데 f64 그룹의 첫 전시가 개최되었다. 전시회에 참여한 그룹 멤버는 앤설 애덤스(사진 10점), 이모겐 커닝햄, 존 폴 에드워즈(1884-1968), 소냐 노스코비아크(1900-1975), 헨리 스위프트(1891-1962), 윌러드 밴다이크, 에드워드 웨스턴(각각 사진 9점)이었다. 프레스턴 홀더(1907-1980), 콘수엘로 카나가(1894-1978), 앨머 러븐슨(1897-1989), 그리고 에드워드 웨스턴의 아들 브렛 웨스턴(1911-1993) 등 4명의 다른 사진가들도 전시회에 초대되어 각각 4점의 사진을 출품했다. 에드워드 웨스턴의 프린트는 장당 15달러였고, 다른 이들의 프린트는 장당 10달러였다. 이 전시는 6주 동안 진행되었다.

1934년에 이 그룹은 “F:64 그룹에는 에드워드 웨스턴, 앤설 애덤스, 윌라드 밴다이크, 존 폴 에드워즈, 이모겐 커닝햄, 콘수엘라 카나가 등 유명한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라는 공지를 《카메라 크래프트》 잡지에 게시했다. 이 발표는 첫 번째 전시회에 참여한 모든 사진가들이 f64 그룹의 “멤버”였음을 암시하지만, 모두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카나가는 “에드워드 웨스턴, 이모겐 커닝햄, 윌라드 밴다이크, 앤설 애덤스와 함께 f64 전시에 참여했지만 나는 그룹에 속하지도 않았고 어느 곳에도 소속된 적이 없다. 나는 소속된 회원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일부 사진학자들은 f64 그룹을 처음 일곱 명의 사진가들로 구성된 조직된 파벌로 보고, 나머지 4명의 사진가들은 그들의 시각적 미학으로 인해 이 그룹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1997년 인터뷰에서 도디 웨스턴 톰슨(1923-2012)은 1949년에 f64 그룹에 합류하라는 초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한 1952년에 결혼한 브렛 웨스턴도 자신을 멤버로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 그룹의 변화하는 사회 구성의 비공식성에 비춰보면 멤버십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름 및 목적

그룹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밴다이크는 당시 카메라 렌즈의 아주 작은 조리개 스톱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유니폼 시스템’ 명칭인 “US 256”이라는 이름을 처음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밴다이크에 따르면, 애덤스가 이 이름이 대중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애덤스는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초점 시스템’의 해당 조리개 설정인 “f/64”를 제안했다. 그렇지만, 1975년 인터뷰에서 홀더는 오클랜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페리를 타고 가던 중 밴다이크와 함께 이 이름을 생각해냈다고 회상했다. 이 그룹은 원래 “그룹 f.64”라고 썼지만, 슬래시가 있는 표기가 점이나 마침표를 대신하면서 곧 “그룹 f/64”로 바뀌었다.

f/64라는 용어는 대형 포맷 카메라의 작은 조리개 설정으로, 피사계 심도를 확보하여 전경부터 배경까지 고르게 선명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조리개 값을 말한다. 이 같은 작은 조리개는 장노출이 필요하기 때문에 풍경이나 정물처럼 상대적으로 느리게 움직이거나 움직임 없는 피사체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밝은 캘리포니아의 빛 안에서는 (1930년대 액션 사진과 보도 사진에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던 소형 카메라에 비하면) 카메라의 엄청한 크기와 어색함보다 피사체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더 적다.

고른 선명도는 (뉴욕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유행하던 픽토리얼리즘 방법에 대응하여 이 그룹이 옹호했던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순수사진)의 이상과 일치한다.


선언문

f64 그룹은 1932년 전시회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그룹의 이름은 사진 렌즈의 조리개값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이 그룹 멤버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인 사진 이미지의 선명함과 명확함의 특성을 광범위하게 상징한다.

이 그룹의 주요 목적은 멤버들의 작업을 전시하는 것 외에도 이 그룹과 유사한 작업 경향을 보여주는 다른 사진가들의 사진을 포함해서 서양 최고의 현대 사진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자주 선보이는 것이다.

f64 그룹은 사진의 모든 스펙트럼을 커버하는 척하거나, 멤버 선정을 통해 전시에 포함되지 않은 사진가들에 대한 어떠한 비하적인 의견의 표시하는 척 하지 않는다. 사진계에는 이 그룹의 메티에(전문 기술)와 무관한 스타일과 테크닉을 가진 진지한 작업자들이 많이 있다.

f64 그룹은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을 통해 단순하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예술 형식으로서의 사진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업자들로 멤버 및 초대 작가를 제한한다. 그룹은 순수사진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전시하지 않을 것이다. 순수사진이란 다른 예술 형식에서 파생된 기술, 구성 또는 아이디어의 특성이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반면에, “픽토리얼리즘”의 산물은 회화 및 그래픽 아트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예술 원칙에 대한 헌신을 나타낸다.

f64 그룹의 멤버들은 예술 형식으로서의 사진은 사진 매체의 현실과 한계에 의해 정의된 선을 따라 발전해야 하며, 매체 자체의 성장보다 앞선 시대와 문화를 연상시키는 예술과 미학의 이념적 관습으로부터 항상 독립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본 그룹은 그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사진 분야의 진지한 작업에 관한 정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현대 사진 포럼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호의적이다.


미학

사진 역사가 나오미 로젠블럼(1925-2021)은 f64 그룹의 비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풍경, 번성하는 유기적 성장, 여전히 활력 넘치는 농촌 생활 등의 풍요로움에 초점을 맞추었다. 울타리 기둥, 헛간 지붕, 녹슨 농기구 등 많은 동부 도시인들의 예술적 의식으로부터 사라진 농촌의 사물에 렌즈를 들이댄 이들은 미국 동부 지역의 걸쇠나 용광로와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들 사물을 대했다. 그렇지만, 심지어 캘리포니아에서도 이러한 테마는 사라져가는 생활 방식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미지에 담긴 에너지는 많은 경우 기계 문화에 매료된 동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미래에 대한 강한 믿음보다는 형식적인 디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1933년에 애덤스는 《카메라 크래프트》 잡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f64 그룹에 대한 나의 개념은 이것이다: 그것은 공식적인 절차, 법인 설립, 또는 예술적 비밀 사회, 살롱, 클럽 또는 파벌의 어떠한 제한도 없는 진지한 사진가들의 조직이다 … 이 그룹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진의 트렌드를 정의하려는 우리의 열망의 표현으로 형성되었다 … 우리의 모티브는 엄격한 제한을 가진 학파를 강요하거나, 다른 관점에 대한 호전적인 경멸로 우리의 작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순수사진)에 대한 합리적인 진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성향은 장려되고, 그룹 전시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절차의 가장 단순한 측면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기술적이고 감성적인 개개인의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역사

1932년 첫 전시회 이후,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포틀랜드, 오리건, 카멀에서 이 전시회의 일부 또는 전부가 전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34년 대공황의 영향은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느껴졌고, 그룹 멤버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예술을 위한 전제에 관한 어려운 토론을 거듭했다. 대공황의 영향과 함께 (아들과 함께하기 위해 산타바바라로 이주한 웨스턴과 뉴욕으로 이주한 밴다이크 등) 그룹 멤버 중 몇몇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면서 1935년 말, f64 그룹은 해체되었다. 멤버 중 다수는 사진 작업을 계속했고 현재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 중 일부로 알려져 있다.

f64 그룹 사진가들의 가장 완벽한 프린트 컬렉션은 현재 애리조나의 크리에이티브 사진 센터(CCP)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 MoMA)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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