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rrel of the Ancients and the Moderns
신구논쟁(고대인과 현대인의 논쟁)은 문학적 및 예술적 가치에 대한 논쟁으로, 17세기에 원래의 토론자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과 프랑스 문학계로 확산되었다.
The Quarrel of the Ancients and the Moderns (French: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 was a debate about literary and artistic merit, which expanded from the original debaters to the members of the Académie Française and the French literary community in the 17th century.
논쟁의 기원
Origins of the debate
유럽 르네상스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는 고전(그리스 및 로마)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와 제도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중세의 스콜라주의가 기독교 신학과 불변의 군주제를 강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언어, 문학, 학문, 가치관을 회복하고 해석하며 이를 흡수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15세기에 고대 문헌이 재발견되고, 약 1440년경 인쇄기가 발명된 후 이 문헌들이 널리 보급되면서 문화가 민주화되었고, 아이디어의 빠른 전파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고전 자료에 기초한 학문의 부활은 많은 지적 및 사회적 과학의 추구에서 혁명을 가져왔다. 예를 들어, 건축 이론 분야에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고전고대 건물의 유적을 연구하고 1세기 작가 비트루비우스의 저작을 분석하여 그로부터 식별할 수 있는 수학적 원리를 이해한 후, 재발견한 지식을 사용하여 중세 건축에 혁명을 일으켰다.
It was an essential feature of the European Renaissance to study the culture and institutions inherited from Classical (Greek and Roman) antiquity. In contrast to the medieval scholastic emphasis on Christian theology and unchanging monarchy, Renaissance humanists launched a movement to recover, interpret, and assimilate the language, literature, learning and values of ancient Greece and Rome. The 15th-century rediscovery of ancient texts and their wide distribution after the invention in about 1440 of the printing press democratized culture, allowing a faster propagation of ideas; and the resurgence of learning based on classical sources brought revolutions in many intellectual and social scientific pursuits. For example, in the field of architectural theory, Filippo Brunelleschi revolutionized medieval architecture using the knowledge he rediscovered after studying the remains of ancient classical buildings, analyzing the works of 1st-century writer Vitruvius and understanding the mathematical principles that could be discerned from them.
고대의 고전적 이상에 대한 이러한 문화적 재탄생과 과학적, 예술적 사상에서의 잇따른 변화는 그것을 기독교 문명의 안정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중세의 근대성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가치를 재확립하고자 했던 이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은 샤를 페로(1628~1703)의 「고대와 근대의 비교」(1688~92)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장난으로, 비교(parallèle) 대신 논쟁(querelle)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면서 ‘논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This cultural rebirth of the Classical ideals of ancient times, and the following changes in scientific and artistic thought, gave rise to a reaction from those who perceived it as a danger to the stability of Christian civilization and wished to reassert the social and political values of medieval modernity. The debate became known as a ‘quarrel’ after the frequently made pun on Charles Perrault’s title Parallè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 (Parallel between Ancients and Moderns, 1688–92), the word querelle being used in the place of parallèle.
프랑스에서의 논쟁
Debate in France
고전파와 근대파 사이의 논쟁은 두 가지 뚜렷한 흐름을 대립시킨다:
The quarrel between the Classics and the Moderns opposes two distinct currents:
니콜라 부알로 데프레오(1636~1711)가 이끄는 고대인(고대파)은 문학 창작이 고대의 유산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걸작을 만드는 것은 학자 집단의 현학적인 의견이 아니라, 시간의 시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저명한 작가들의 가치는 20세기에 걸친 보편적 찬사에 의해 확립되었다. 보일로는 당대의 위대한 작가들(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가 미래에 천재로 칭송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문화의 누적적 측면을 인정하고 선행자들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장이의 비유’는 이러한 원칙을 잘 보여준다: 과거의 위인들의 업적에서 배우면, 그들을 능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알로는 자신의 편에 라신, 라퐁텐, 페늘롱, 라브뤼에르 등 당대 최고의 프랑스 작가들을 두고 있다.
The Ancients (Anciens), led by Boileau, say that literary creation has its roots in the fair appreciation of the heritage of Antiquity. According to them, it’s the test of time that makes the masterpieces, not the pedantic opinion of an elite of scholars; the worth of the famous authors from Greece and Rome is established by twenty centuries of universal admiration. While recognizing the merits of the great writers of his time (Boileau predicted that Corneille, Racine and Molière would be acclaimed as geniuses in centuries to come) it is also important to recognize the cumulative dimension of culture and study our predecessors. The metaphor of the dwarves on the shoulders of giants illustrates this principle: by learning from the works of the great men of the past, it’s possible to surpass them. Boileau has on his side the greatest French writers of his time, including Racine, La Fontaine, Fénelon and La Bruyère.
샤를 페로에 의해 대표되는 근대인(근대파)는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정치적 및 종교적 완전성, 성취와 독보적인 면에서 역사상 모든 다른 국가를 능가하기 때문에, 왕과 교회의 영광을 위해 17세기 작가들이 만든 작업은 필연적으로 지난 세기에 만들어진 어떤 작품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근대 시대에 알맞는 새로운 문학, 즉 프랑스 궁정을 기쁘게 하고, 17세기 예법을 존중하며, 가톨릭 신앙에 열심을 다하고, 오래된 고전 작가들의 자유를 포기하며, 항상 프랑스 군주제와 가톨릭 교회를 찬미하기 위해 싸운다. 페로는 아카데미, 독실한 모임, 문학 살롱, 오늘날 거의 완전히 잊혀진 많은 유행을 따른 시인들을 곁에 두고 있다.
The Moderns (Modernes), represented by Charles Perrault, maintain that, since the France of Louis XIV surpasses all other states in history by its political and religious perfection, accomplished and matchless, it follows that the works created by 17th-century authors to the glory of King and Church are necessarily superior to anything produced in the past centuries. Therefore they fight for a new literature adapted to the modern era, complacent towards the Court of France, respectful of 17th century decorum, zealous for Catholic religion, renouncing the freedom of old Classical authors and always seeking to celebrate the French monarchy and the Catholic Church. Perrault has on his side the Academy, the devout party, the literary salons and a host of fashionable poets who are today almost completely forgotten.
(정부에 아첨하는 작가들에 대한 연금 지급, 문학적인 모든 것의 최고 재판관으로 활동하기 위한 리슐리외의 아카데미 창설, 저자에 대한 법적 처벌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논란이 되는 책의 검열과 금지 등) 17세기 동안 정치 권력이 문학계에 점차적으로 영향을 확대해 나가면서, 이러한 환경은 장관인 콜베르의 권력과 후원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던 페로에게 크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이는 그의 근대파가 예술 창작에 대해 내세운 견해를 더욱 강화했다.
The gradual takeover of the literary community by political powers during the 17th century (pensions to authors who flatter the government, creation of the Academy by Richelieu to act as a supreme judge of all things literary, censorship and banning of controversial books which could even carry legal penalties against the authors) greatly favored Perrault, who had risen to prominence through the power and patronage of minister Colbert, and bolstered his Modern party’s views on artistic creation.
1637년부터 1694년까지, 근대에 적응한 문학의 지지자들은 “고대인”에 맞서 격렬히 대립했다. 1637년 코르네유의 『르 시드』는 반-애국주의 및 예법과 도덕을 모독한 혐의로 살롱에서 공격을 받고 아카데미에 의해 비난 당했다. “근대인”은 1663년 몰리에르의 〈아내들의 학교〉, 1667년 라신의 〈페드르〉에 대항하여 다시 동원되었는데, 이들 모두 프랑스 관습과 사회에서 반종교적이고 너무나 충격적이라고 일컬어졌다.
From 1637 to 1694, the proponents of a literature adapted to modern times raged against the “Ancients”. In 1637 Corneille’s Le Cid was attacked in the salons and condemned by the Academy, accused of anti-patriotism and of affronting decorum and morality. The “Moderns” mobilized again in 1663 against Molière’s L’École des femmes, in 1667 against Racine’s Andromaque and in 1677 against Racine’s Phèdre, all called irreligious and outrageous to French customs and society.
1674년, 데마레 드 생소를랭은 그의 친구 페로에게 “우리 작품보다 고대 작품을 선호하는 이단적인 군대”에 맞서 “프랑스를 방어”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이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샤를 페로와 그의 형제 클로드는 루이 14세의 절대군주제에 복종한 근대 가톨릭 작가들의 작품보다 (아테네 또는 로마의) 자유 체제 아래서 글을 쓴 고대 이교도 작가들의 작품을 더 선호했다는 이유로, 부알로를 신성모독 및 국왕모독의 죄로 기소하려 했다.
In 1674, Desmarets de Saint-Sorlin made a public call on his friend Perrault to “defend France” against “that heretical troop who prefers Ancient works to our own.” In response to this call, Charles Perrault and his brother Claude tried to charge Boileau with the crimes of blasphemy and lèse-majesté on the grounds that he preferred the works of ancient pagan authors who wrote under a regime of liberty (in Athens or Rome) to the works of modern Catholic authors who submitted to the absolute monarchy of Louis XIV.
이 논쟁의 전개에서 핵심 에피소드 중 하나는 파리 인근, 나중에 나시옹 광장이 될 부지에 루이 14세의 승리를 찬미하는 개선문을 세우려는 콜베르의 계획에 의해 촉발된, 이른바 명문(銘文) 논쟁이었다. (이 건설 프로젝트는 1680년경에 포기되었고, 미완성된 구조물은 루이 14세 사망 직후 철거되었다.) 논점은 돌출된 아치에 루이를 찬양하는 비문이 (“고대”) 라틴어로 되어야 하는지 또는 (“근대”) 프랑스어로 되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것이었다. 골동품 전문가인 프랑수아 샤르팡티에는 프랑스어 명문을 지지했고, 이에 대해 클레르몽 대학교의 예수회 신부 장 뤼카가 반박하며 라틴어 사용을 옹호하는 웅변적인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1676년 11월 25일 대학교에서 발표되어 1677년 「라틴어로 기록될 공공 기념물에 관한 연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One of the key episodes in the quarrel’s development was the so-called Quarrel of the Inscriptions (French: querelle des inscriptions), which was triggered by Colbert’s plan for a triumphal arch glorifying Louis XIV’s victories to be erected near Paris, on the ground that would later become the Place de la Nation. (The construction project ended up being abandoned around 1680, and the unfinished structures were demolished shortly after Louis XIV’s death.) The question was whether the inscriptions glorifying Louis on the projected arch should be in (“ancient”) Latin or (“modern”) French. Antiquarian François Charpentier argued in favor of French inscriptions, and was countered by Jesuit Jean Lucas of the College de Clermont, who defended the option of Latin in an eloquent address pronounced at the College on 25 November 1676 that was published in 1677 under the title De Monumentis Publicis Latine Inscribendis Oratio.
‘논쟁’이라는 이름을 딴 실제 에피소드는 10년 후인, 페로가 아카데미에서 「루이 대왕의 시대」를 낭독한 1687년에 시작되어 169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는 루이 14세 시대 작가들의 훌륭함를 지지했고 근대인의 입장을 아주 간결하게 표현했다:
The actual episode that took the name of La Querelle happened a decade later and lasted from 1687 to 1694, starting with the reading in the Academy of Perrault’s Le siècle de Louis le Grand (The Century of Louis the Great), in which he supported the merits of the authors of the century of Louis XIV and expressed the Moderns’ stance in a nutshell:
조예 깊은(박식한) 고대는 그 모든 시간 동안
우리 시대에 비할 만큼 계몽된 적이 없었다.
La docte Antiquité dans toute sa durée
A l’égal de nos jours ne fut point éclairée.
이 시는 특히 페로가 과대평가되고 평범하다고 여긴 호메로스와 다른 고전 시인들을 공격한다. 이를 듣고, 부알로는 동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면서,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The poem particularly attacks Homer and other classical poets, whom Perrault considers overrated and mediocre. Upon hearing this, Boileau stood up and left in anger, saying he was ashamed that a countryman of his could have spoken like that.
1688년에서 1692년 사이에 페로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 「고대와 근대의 유사점」이라는 네 권의 책을 썼다. 이에 부알로는 페로의 오류를 조롱하는 풍자적인 경구(짧은 풍자시)로 반박했으며, 더 진지하게는, 롱기누스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성찰에서 그의 주장을 반박했다.
Between 1688 and 1692 Perrault wrote the four volumes of Parallè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 (Parallel between Ancients and Moderns) where he attempted to prove his ideas on literature. Boileau countered with satirical epigrams mocking Perrault’s errors and, more seriously, in his Critical Reflections on Longinus.
1694년, 앙투안 아르노에 의한 중재 후 둘은 공식적으로 화해했지만, 장기간에 걸친 격렬한 논쟁으로 인해 페로는 적의를 품고 분개하게 되었고,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부알로를 비난하는 새로운 팸플릿을 쓸 것이라고 위협했는데, 이에 부알로는 “페로와는 끝났고” 페로가 무엇을 하든 “그에게 완전히 무관심하다”고 답했다.
In 1694, after a mediation by Antoine Arnauld, the two officially reconciled, but the prolonged and heated polemic left Perrault embittered and resentful, and he threatened, in the following years, to write new pamphlets against Boileau, to which Boileau replied that he was “done with Perrault” and that whatever Perrault did was “completely indifferent to him”.
장 라신은 고대의 문학으로부터 끌어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선택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신이 고대인 중 한 사람임을 드러냈다. 그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부터 고전주의자들이 도출한 고전적 통일성(3일치의 법칙)인 장소, 시간, 행위의 통일성(각각 하나의 장면 위치, 24시간, 일관된 행동)에 따라 자신의 비극의 범위를 정했다.
Jean Racine showed himself one of the Ancients by focusing his choice of subjects on those drawn from the literature of Antiquity. He also delimited his tragedies by the classical unities, derived by the classicists from Aristotle’s Poetics: the unities of place, time, and action (one scene location, 24 hours, and consistent actions respectively).
다음 세기의 초엽에,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마리보(1688-1763)는 고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연극 장르인, 감상희극(최루 희극)을 확립함으로써 근대적인 자신을 드러냈다. 이 장르에서는 임박한 비극이 결국 화해와 눈물의 홍수 속에서 해결된다.
In the opening years of the next century, Marivaux was to show himself a Modern by establishing a new genre of theatre, unknown to the Ancients, the sentimental comedy (comédie larmoyante). In it the impending tragedy was resolved at the end, amid reconciliations and floods of tears.
평가
Assessment
결국, 고대인과 근대인의 논쟁은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닌 상반된 견해를 재치 있게 포장한 것이었다. 한쪽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 이상에 집착하며 문학을 지배 권력의 프로파간다(선전 도구)로 전락시키는 예술 이론을 거부했고, 반면에 다른 쪽은 왕과 교회의 권위 위에 지적 또는 미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에 반대했다.
In the end, the Quarrel of the Ancients and Moderns was a cover, often a witty one, for opposing views of much deeper significance. One side was attached to the classic ideals of Greece and Rome and rejected a theory of art that turned literature into propaganda for the ruling powers, while the other contested the very idea of intellectual or aesthetic values above the authority of the King and the Church.
계몽주의 시대 동안 고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고전주의적 과거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어졌고, 결국 『성경』 자체도 비판적 사상가들의 정밀 조사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권위에 대한 공격은 과학적 탐구의 대두와 유사한 면이 있었으며, 문학 분야에서의 왕권과 교회 권위에 대한 도전은 절대 군주제와 국가-승인 종교—근대성의 상징—가 공화정, 민주주의 및 종교의 자유라는 고대 사상의 이름으로 전복된 프랑스 혁명 당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문을 예고했다.
The renewal of interest in Antiquity during the Age of Enlightenment led to a reassessment of the achievements of the classical past, and ended up subjecting the Scriptures themselves to the scrutiny of critical thinkers. The attack on authority in politics and religion had analogues in the rise of scientific inquiry, and the challenge to royal and ecclesiastical authority in the literary field already announced the questioning of state and society at the time of the French Revolution, when absolute monarchy and state-sanctioned religion—the emblems of modernity—would be overthrown in the name of the ancient ideas of Republic, Democracy and Freedom of Religion.
16~20세기의 유사한 논쟁들
Analogous 16th–20th-century debates
르네상스 인문주의 혁명, 그리고 고전(그리스와 로마) 고대의 지적 업적에 대한 재발견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과의 차이를 가져왔으며, 이후 과학 혁명의 토대를 마련했다. 인문주의자들이 언어, 문학, 문화의 본래 의미를 밝히는 데 몰두했던 것처럼, 한 세기 후의 자연철학자들 또한 그러한 노력에 매진했다.
The Renaissance humanistic revolution, and its rediscovery of the intellectual achievements from classical (Greek and Roman) antiquity, brought about a divergence with medieval scholasticism and set the framework for the Scientific Revolution to come. Much as the Humanists had been preoccupied with uncovering the original meaning of language, literature and culture, so too had the natural philosophers of a century later.
르네 데카르트(1596–1650)와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권위와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검토를 통해 법칙을 규정함으로써 과학과 인문학의 모든 프로젝트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했다. 이들의 탐구는 데카르트를 합리주의의 길로, 베이컨을 경험주의의 길로 이끌었다. 관찰, 경험, 그리고 합리적 이론화를 기반으로 한 고전적 연구 방법으로 돌아가려는 자연철학자들(후에 과학자로 불리게 됨)의 이러한 소명은 유럽 과학 사상의 대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René Descartes (1596–1650) and Francis Bacon (1561–1626) set the tone of a return to nature in that they wanted to restart the entire project of science and humanities by determining laws based on an examination of reality rather than relying on authority and tradition. Their questioning would lead Descartes down a path of rationalism and Bacon down a path of empiricism. This calling of the natural philosophers (later to be named scientists) of a return to classical research methods based on observation, experience and rational theorization would allow for a great shift in European scientific thought.
중세 시대 이래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서구 학문 체계의 근간이 되어 왔다. 자연에 관한 모든 철학적 담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회의 다른 교부들이 설정한, 가톨릭이 승인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신의 개념과 교회 교리에 모순되지 않으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관점을 조화롭게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질서에 관한 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과 천문학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었다.
Since the Middle Ages, Aristotle had been the backbone of the system of Western academic knowledge officially endorsed by the Catholic Church. All philosophical discourse regarding nature was held within the parameters of Catholic-approved Aristotelianism as set by Thomas Aquinas and other Doctors of the Church, which sought to harmoniously unite the conception of God with a human understanding of nature that didn’t contradict Church doctrine and was assumed to be perfect and complete. Aristotle’s theories on the natural order were further substantiated by Ptolemy’s geography and astronomy.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과학 지식의 패러다임, 특히 물리학과 천문학은, 르네상스가 가져온 서구 사상의 변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전받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코페르니쿠스-케플러 체계의 천문학이 첫 비판을 열었고, 이는 갈릴레오-뉴턴 체계의 자연 철학과 결합되면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변혁은 과학 지식의 다른 분야에서도 발생했는데, 예를 들어 갈레노스(129-216)와 이븐 시나(?-1037)의 의학 이론은 교회의 권위 아래 12세기 이후 중세 의사의 대학 교육과정의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야누스 코르나리우스(1500-1558)와 미카엘 세르베투스(?-1553) 같은 르네상스 인물들의 작업은 기존 질서를 의문시하고 도전하여, 중세적 근대성을 수호하려는 옹호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다.
This Aristotelian-Ptolemaic paradigm of scientific knowledge, particularly physics and astronomy, lasted unchallenged until the transformations in Western thought brought by the Renaissance, at which point the 16th and 17th centuries saw the union of a Copernican-Keplerian system of astronomy open up a hefty first critique which was then completed by the union of the Galilean-Newtonian system of nature. The same transformation occurred in other fields of scientific knowledge, such as the medical theories of Galen and Avicenna becoming—under the authority of the Church—the mainstay of the medieval physician’s university curriculum from the 12th century onwards, and the work of Renaissance men like Janus Cornarius and Michael Servetus, who questioned and challenged the established order, bringing about the fierce reaction of the defenders of medieval modernity.
자연철학에서의 이 논쟁은 고대파와 근대파의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프랑스에서 근대파의 지도자들인 자크베니뉴 보쉬에(1627-1704) 같은 인물들은 중세 스콜라 철학을 옹호한 반면, 고대파는 새로운 발견들을 지지했다. 따라서 부왈로, 라신, 프랑수아 베르니에는 ‘아레 뷔를레스크’(문학적 풍자 작품)에서 철학과 과학의 부활(프랑스어로 “르네상스”)을 훌륭하게 옹호하며, 근대성의 현상 유지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을 조롱했다. 클로드 브로셋(1671-1743)에 따르면, 이 ‘아레’는 파리 대학교가 데카르트주의를 금지하려던 계획을 무산시켰다. 부알로는 또한 갈레노스식 의술을 옹호하며 새로운 발전을 거부했던 근대파에 맞서 퀴닌의 사용 같은 새로운 형태의 의료 치료법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This debate in natural philosophy played a part in the Quarrel of the Ancients and the Moderns. In 17th century France, the leaders of the Moderns, like Jacques-Bénigne Bossuet, were for medieval scholasticism, while the Ancients party supported the new discoveries. Thus, Boileau, Racine, and François Bernier brilliantly defended, in an Arrêt Burlesque (a work of literary satire), the rebirth (in French: Renaissance) of philosophy and science, and ridiculed all those who feared changes in the status quo of modernity. According to Claude Brossette, this Arrêt destroyed a project of the University of Paris to ban Cartesianism. Boileau also wrote in defense of new forms of medical treatment, like the use of quinine, challenging the Moderns who were for Galenism and rejected any new developments.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연구가 선배 학자들의 업적에 크게 의존했다고 언급하며 로버트 훅에 맞서 고대파의 편에 섰으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Isaac Newton took the side of the Ancients against Robert Hooke when he wrote that his work relied heavily on the work on his predecessors and famously stated: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근대파의 지지자였던 훅은 현미경이 현대에 이르러 완벽한 경지에 도달했으며, 이를 더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뉴턴은 미래에는 현미경이 4,000배 더 강력하게 확대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가 개발되어 결국 원자조차도 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며 반박했다. 마리아 포포바(1984-)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뉴턴의 겸손은 지식이 스스로를 기반으로 점진적으로 기존 아이디어를 개선하여 결국 누적된 결과가 혁신적인 변화를 이룬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본질적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Hooke, a partisan of the moderns, claimed that microscopy had reached perfection in modern times and that it was impossible to do better, to which Newton replied predicting that the future would bring new instruments capable of magnifying four thousand times more powerfully, eventually making even the atom visible. Maria Popova comments: “Newton’s humility sprang from an early and formative understanding of how knowledge builds upon itself, incrementally improving upon existing ideas until the cumulative adds up to the revolutionary.”
윌리엄 템플 경은 그의 에세이 「고대와 근대의 학식에 대하여」에서 근대파의 입장에 반대했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우리가 더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이기 때문이라는 베르나르두스 카르노텐시스(?-1130)에서 비롯된 상투어를 반복했다. 템플의 에세이는 약간의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그 중 템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사람들 중에는 고전학자이자 편집자인 리처드 벤틀리(1662-1742)와 비평가 윌리엄 워튼(1666-1727)이 있었다.
Sir William Temple argued against the Modern position in his essay On Ancient and Modern Learning; therein he repeated the commonplace, originally from Bernard of Chartres, that we see more only because we are “dwarves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Temple’s essay prompted a small flurry of responses. Among others, two men who took the side opposing Temple were classicist and editor Richard Bentley and critic William Wotton.
영국에서의 전체적인 논쟁은 1696년까지 마무리됐지만,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는 고대파와 근대파의 대립 속에서 두 가지 일반적인 성향 또는 삶의 방식을 축약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다시 다뤘다. 그는 이 논의를 『터무니없는 이야기』(1704)라는 풍자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했으며, 이 작품은 1694년과 1697년 사이에 지어져 1704년에 유명한 서문 「책의 전쟁」과 함께 출판되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초기의 논쟁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스위프트의 극단적인 풍자는 그의 스크리블레루스 클럽 동료들 사이에서 다른 풍자 작가들이 사용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다.
The entire discussion in England was over by 1696, but it was revisited by Jonathan Swift, who saw in the opposing camps of Ancients and Moderns a shorthand of two general orientations or ways of life. He articulated his discussion most notably in his satire A Tale of a Tub, composed between 1694 and 1697 and published in 1704 with the famous prolegomenon The Battle of the Books, long after the initial salvoes were over in France. Swift’s polarizing satire provided a framework for other satirists in his circle of the Scriblerians.
고대파와 근대파 사이의 구분에 대해 장황하게 쓴 다른 두 명의 저명한 18세기 철학자는 지암바티스타 비코(1668-1744; 그의 『우리 시대의 공부법에 관하여』 참조)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781; 근대파는 ‘더 많이’ 보지만, 고대파는 ‘더 잘’ 본다)이다.
Two other distinguished 18th-century philosophers who wrote at length concerning the distinction between moderns and ancients are Giambattista Vico (cf. e.g. his De nostri temporis studiorum ratione) and Gotthold Ephraim Lessing (for whom the moderns see ‘more,’ but the ancients see ‘better’).
19세기 영국에서는, 헬레니즘(“아테네”/이성 또는 “우아함과 지성”)과 헤브라이즘(“예루살렘”/신앙) 사이의 구분을 강조하면서, 매슈 아널드(1822-1888)는 당시의 지배적인 진보적 지적 경향에 맞서 고대인들(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을 옹호했다. 아널드는 고대인과 근대주의자들 사이의 큰 차이가 자유/이성과 권위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널드는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을 헬레니즘과 문화가 필요한 시대에서 헤브라이즘과 의무의 위대한 대변자로 보았다.
In 19th-century England, highlighting the distinction between Hellenism (“Athens”/reason or “sweetness and light”) and Hebraism (“Jerusalem”/faith), Matthew Arnold defended the ancients (most notably Plato and Aristotle) against the dominant progressive intellectual trends of his times. Arnold drew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great divide between ancients and modernists pertained to the understanding of the relation between liberty/reason and authority. Arnold saw Thomas Carlyle as the great spokesman of Hebraism and duty in an age which needed Hellenism and culture.
20세기 지적 역사와 문학 비평의 많은 주장에 반박하며, 레오 스트라우스(1899-1973)는 고대인과 근대인(또는 각 진영의 옹호자) 간의 논쟁이 진보나 퇴보의 문제로 축소될 때 잘못 이해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는 고대파의 편에 서서(예를 들어, 스트라우스의 친구인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옹호한 근대주의적 입장에 반대하며) 오래된 “논쟁”을 부활시켰다.
Countering the thrust of much of 20th-century intellectual history and literary criticism, Leo Strauss has contended that the debate between ancients and moderns (or the defenders of either camp) is ill understood when reduced to questions of progress or regress. Strauss himself revived the old “querelle,” siding with the ancients (against the modernist position advocated, e.g., by Strauss’s friend Alexandre Kojève).
- 출처 : 「Quarrel of the Ancients and the Moderns」, Wikipedia(en), 2022.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