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저널리즘


조 바이든이 제46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 날인 2021년 1월 21일, 워싱턴 DC에서 워싱턴 기념탑을 바라보고 있는 방위군의 흑백 사진. via Wikimedia Commons

포토저널리즘(사진보도)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뉴스 스토리를 전달하는 저널리즘의 한 형태다. 주로 스틸 이미지(정지 화상)를 의미하지만, 방송 저널리즘에서 사용되는 동영상도 포함할 수 있다. 포토저널리즘은 (다큐멘터리 사진, 소설다큐멘터리 사진, 전쟁 사진, 거리 사진, 셀러브리티 사진 같은) 유사한 분야의 사진과 달리 엄밀한 저널리즘 용어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정직하고 공정한 접근 방식을 요구하는 엄격한 윤리적 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포토저널리스트는 뉴스 미디어에 기여하며, 공동체가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들은 정보에 밝고 지식이 풍부해야 하며, 뉴스 내용을 창의적이고 정보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글 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포토저널리스트도 기자지만, 종종 즉각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고 사진 장비를 휴대해야 한다. 이는 종종 상당한 장애물에 직면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며, 그 중에는 즉각적인 신체적 위험, 악천후, 대규모 군중, 그리고 취재 대상에 대한 제한된 접근성 등이 포함된다.


역사

전쟁 사진의 기원

뉴스 기사를 사진으로 삽화화하는 관행은 19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인쇄 및 사진 기술의 혁신으로 가능해졌다. 초기에는 《타임스》에 실린 호레이쇼 넬슨 경의 장례식 삽화(1806)와 같은 삽화가 신문에 등장했지만, 최초의 주간 삽화 신문은 1842년에 처음 발행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였다. 이러한 삽화는 판화를 이용해 인쇄되었다.

생모르 거리의 바리케이드(1848). 신문 기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 최초의 사진. via Wikimedia Commons

신문 기사 삽화에 사용된 최초의 사진은 1848년 6월 25일, ‘6월 봉기’ 기간 동안 파리의 바리케이드를 담은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1848년 7월 1일부터 8일까지 발행된 《릴뤼스트라시옹》에 판화로 게재되었다.

‘크림 전쟁’ 동안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로저 펜튼(1819-1869)이 촬영한 전쟁 사진을 인쇄하며 초기 포토저널리즘의 탄생을 선도했다. 펜튼은 최초의 공식 전쟁 사진작가로, 그의 작업은 전쟁이 병사들에게 미친 영향, 전투가 벌어진 지역의 풍경 파노라마, 전투 장면을 재현한 모형, 지휘관의 초상화 등을 기록하여,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기초를 마련했다. 크림 전쟁의 다른 사진작가로는 윌리엄 심슨(1823-1899)과 카롤 사트마리(1812-1887)가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매튜 브래디(1822-1896)의 미국 남북전쟁 사진도 《하퍼스 위클리》에 게재되기 전에 판화로 제작되었다. 당시 기술은 아직 신문에 사진을 직접 인쇄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브래디의 사진이 도달할 수 있는 관객층은 크게 제한되었다. 그렇지만, 전쟁 기간 동안 사진을 판화로 제작하여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에 인쇄하는 것은 여전히 일반적이었다. 초기 삽화 신문에서는 기차 사고나 도시 화재 같은 재난도 인기 있는 주제였다.

확장

이 시기에는 신문에 이미지가 인쇄되는 일이 드물었다. 사진은 독립적인 정보 전달 매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보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870년대 후반,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존 톰슨(1837-1921)의 작업으로 이러한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급진적 언론인 아돌프 스미스(1846-1924)와 협력하여, 그는 1876년부터 1877년까지 월간지 《스트리트 라이프 인 런던》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사진과 텍스트를 통해 런던 거리 사람들의 삶을 기록했으며, 소셜다큐멘터리 사진을 포토저널리즘의 한 형태로 정립했다. 그는 이미지를 텍스트의 보조 역할로 사용하는 대신, 인쇄된 사진을 정보 전달의 주요 매체로 활용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사진과 인쇄된 글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1880년 3월 4일, 《더 데일리 그래픽》(뉴욕) 신문은 뉴스 사진을 판화가 아닌 하프톤 방식으로 재현한 첫 사례를 발표했다.

〈크롤러〉(‘앉은뱅이 거지’의 뜻), 런던, 1876-1877, 존 톰슨의 사진 다큐멘터리 『런던의 거리 생활』에 담긴 사진. via Wikimedia Commons
로저 펜튼의 〈죽음의 그림자 계곡〉. 대포알이 있는 버전과 없는 버전. via Wikimedia Commons
1886년 3월 27일, 크룩 장군에게 항복하기 전 제로니모의 캠프. by C. S. 플라이. via Wikimedia Commons

1886년 3월, 조지 크룩(1828-1890) 장군이 아파치 족 지도자 제로니모(1829-1909)가 항복 조건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 사진가 C.S.플라이(1849-1901)는 장비를 들고 군대 대열에 합류했다. 협상이 진행된 3일 동안 플라이는 8×10in(200×250mm) 유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약 15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3월 25일과 26일에 촬영된 제로니모와 다른 자유 아파치 족의 사진은 미국 원주민이 여전히 미국과 전쟁 중이던 시기에 촬영된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이는 침착하게 촬영 대상을 포즈 취하게 하며, 구도를 개선하기 위해 머리와 얼굴 방향을 바꾸도록 요청했다. 대중적인 출판물 《하퍼스 위클리》는 1886년 4월 24일자에서 그의 사진 중 6장을 게재했다.

1887년, 플래시 파우더(섬광분)가 발명되면서 제이콥 리스(1849-1914) 같은 언론인들이 실내에서 일상적인 피사체를 촬영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1890년의 중요한 책 『다른 절반의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로 이어졌다. 1897년까지는, 인쇄 기계가 풀 스피드로 작동할 때 하프톤 사진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롤, 브랑제, 슈소-플라비앙(약 1880~1910년)과 같은 에이전시들이 전 세계에서 사진을 전송하여 시기적절한 새로운 일러스트 요구를 충족시켰다. 이러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여전히 존재했고, 1897년에서 1927년까지의 기간 동안 많은 선정적인 신문과 잡지 이야기들은 여전히 판화로 삽화를 넣었다. 1921년에는 와이어포토(유선 전송 사진)가 등장하여 뉴스가 전파되는 속도만큼 거의 즉시 사진을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황금기

“포토저널리즘의 황금기”는 대개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로 간주된다. 이는 1925년에 상업용 35mm 라이카 카메라의 개발 그리고 1927년에서 1930년 사이에 첫 플래시 벌브(섬광구)가 등장하면서 가능해졌으며, 이는 기자들이 사진을 찍을 때 진정한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를리너 일루스트리어트 차이퉁》은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이며 널리 모방되었다. 1936년 8월 26일자 표지 사진인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에밀리오 몰라의 만남〉. via Wikimedia Commons

사진을 텍스트보다 더 많이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잡지와 신문이 등장했다. 《베를리너 일루스트리어트 차이퉁》은 일러스트 뉴스 잡지 형식을 처음으로 개척한 매체였다. 1901년부터 잡지 안에 사진을 인쇄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혁명적인 혁신이었다. 이후 몇 십 년에 걸쳐 현대 뉴스 잡지의 원형으로 발전했다.

그것은 포토-에세이를 개척했고, 사진을 위한 전문 직원과 제작 부서를 두었으며 사진 라이브러리를 운영했다. 또한 새로운 소형 카메라로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찍은 사진의 사용을 도입했다.

이 잡지는 사진을 사용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기자들을 찾았으며, 그 중에서도 스포츠 사진의 선구자이자 최초의 (정식 사원) 카메라맨인 마르틴 문카치(1896-1963), 그리고 포토저널리즘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에리히 살로몬(1886-1944)이 포함되었다.

다른 잡지들로는 《아르바이터-일루스트리어트-차이퉁》(베를린), 《뷔》(프랑스), 《라이프》(미국), 《룩》(미국), 《픽처 포스트》(런던)이 있으며, 신문으로는 《더 데일리 미러》(런던)와 《더 뉴욕 데일리 뉴스》가 포함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사진가들로는 로버트 카파(1913-1954), 로마노 카뇨니(1935-2018),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1898-1995), 마거릿 버크-화이트(1904-1971), 그리고 W. 유진 스미스(1918-1978)가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은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아버지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 칭호는 1930년대 정치 인물들의 참신한 스냅사진으로 유명했던 에리히 살로몬(1886-1944)과 같은 다른 여러 사진가들에게도 적용된 바 있다.

예를 들어, 아구스티 센텔레스(1909-1985)의 포토저널리즘은 1930년대 후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선전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공황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제작한 도로시아 랭의 〈이민자 엄마〉(1936). FSA는 대공황을 기록하기 위해 다른 여러 사진가들을 고용했다. via Wikimedia Commons

미국 언론인 줄리앙 브라이언(1899-1974)은 1939년 9월에 독일의 강력한 폭격을 받는 폴란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그는 컬러 사진과 코다크롬 기술의 선구적인 작업자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 밴디버트(1912-1989)는 1940년 독일의 런던 공습인 ‘블리츠’를 컬러 사진으로 촬영했다.

병사 토니 바카로(1922-2022)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소형 카메라인 아거스 C3로 촬영한 사진들은 전쟁의 끔찍한 순간들을 포착했으며, 이는 로버트 카파의 스페인 병사가 총에 맞는 장면과 유사하다.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디데이에 오마하 해변에 있었으며, 그날의 중요한 전투 장면들을 촬영했다. 바카로는 또한 병사의 헬멧을 이용해 직접 사진을 현상했으며, 1944년에 폐허가 된 카메라 가게에서 발견한 화학 약품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대형 신문은 쉽게 번지는 유성 잉크와 황백색의 질 낮은 “신문인쇄용지”, 그리고 조잡한 망점 기술로 사진을 인쇄하는 세기 전환기의 “활판 인쇄” 기술로 인쇄되었다. 활판 인쇄는 텍스트는 알아볼 수 있게 인쇄됐지만, 사진을 구성하는 점들은 자주 번지거나 얼룩져 흐릿하고 불명확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신문이 사진을 잘 사용하더라도, 예컨대 적절히 자르고 적당한 크기로 배치하더라도, 흐릿한 재현으로 인해 독자들은 사진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캡션을 다시 읽어야 했다. 1979년, 《월스트리트 저널》은 활판 인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점묘법으로 된 인물화를 도입하여 초상화를 게재했다. 대부분의 신문이 더 질 좋은 하얀 종이에 사진을 선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오프셋” 인쇄기로 전환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피아노를 파괴하는 소년〉, 필립 존스 그리피스, 1961. via Wikimedia Commons

그에 반해서, 1936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간지 중 하나였던 《라이프》는, 고급 판화 스크린, 고품질 잉크, 광택지를 사용하여 11×14in의 대형 페이지에 아름답게 재현된 사진으로 가득했다. 《라이프》는 종종 《국제합동통신》(UPI) 또는 《연합통신》(AP)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이는 신문에 먼저 실린 사진이었지만, 품질 높은 잡지판 버전은 완전히 다른 사진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진이 선명하여 감상할 가치가 있었고, 사진가의 이름이 항상 작품과 함께 실렸기 때문에, 잡지 사진가들은 거의 유명 인사와 같은 지위를 얻었다. 《라이프》는 대중이 사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오늘날의 많은 사진집은 “포토저널리즘”을 마치 유명 잡지 사진가들만의 독점적 영역인 것처럼 찬양한다.

1947년, 몇몇 유명 사진가들이 국제사진협동조합인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했다. 1989년에는 ‘코비스 코퍼레이션’이, 1995년에는 ‘게티 이미지스’가 설립되었다. 이 강력한 이미지 라이브러리들은 사진과 기타 스틸 이미지(정지 화상)의 권리를 판매한다.

감소

포토저널리즘의 황금기는 1970년대에 끝이 났으며, 이 시기에는 많은 사진 잡지들이 폐간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라이프》는 1972년 12월에 주간 발행을 중단했다. 이들 잡지는 대규모 발행 부수와 높은 비용을 유지하기 위한 광고 수익 경쟁에서 다른 매체와 겨룰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잡지는 저널리즘에 사진 에세이와 정지 화상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포토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사진은 미술관에서 미술 사진과 함께 전시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뤽 델라헤이(1962-), 마누엘 리베라 오르티즈(1968-), 그리고 세븐 포토 에이전시(2001 창립)의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사진가들 중 일부에 속한다.


전문 조직

덴마크 언론 사진가 연합(Pressefotografforbundet)은 세계 최초의 신문 사진가를 위한 국가 조직이었다. 이 협회는 1912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6명의 기자 사진가에 의해 설립되었다. 현재 이 협회는 800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에서 1946년에 설립된 전국사진기자협회(NPPA)는 약 10,000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영국사진기자협회(BPPA)가 1984년에 설립되었다가 2003년에 다시 출범했으며, 현재 약 450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 외에도 홍콩사진기자협회(1989년 설립), 북아일랜드사진기자협회(2000년 설립), 사진기자클럽(스웨덴, 1930년 설립), 그리고 PK — 사진기자클럽(노르웨이)가 있다.

매그넘 포토스는 1947년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침” 시모어(1911-1956),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조지 로저(1908-1995), 윌리엄 밴디버트(1912-1989), 리타 밴디버트, 마리아 아이즈너(1909-1991)에 의해 설립되었다. 매그넘 포토스는 세계 최초의 사진 협동조합 중 하나로, 전 세계 회원들에 의해 소유되고 운영된다.

세븐 포토 에이전시는 2001년 9월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름은 창립 멤버 7명인 알렉산드라 불라(1962-2007), 론 하비브(1965-), 게리 나이트(1964-), 안토닌 크라토크빌(1947-), 크리스토퍼 모리스(1958-), 제임스 낙트웨이(1948-), 존 스탠마이어(1964-)에서 유래했다. 현재 세븐 포토 에이전시는 멘토 프로그램과 함께 30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뉴스 기관과 저널리즘 학교는 보도 사진가들을 위한 다양한 상을 주관한다. 퓰리처상은 1968년부터 보도 사진 분야에서 ‘특집사진’과 ‘속보사진’ 부문에 상을 수여하고 있다. 이 외에도 월드 프레스 포토, 베스트 오브 포토저널리즘, 올해의 사진, 영국 기반의 프레스 포토그래퍼스 이어 같은 상들이 있다.


윤리적, 법적, 사회적 고려사항

2016년 리버풀 노동당 대회에 참석한 사진기자들. via Wikimedia Commons

포토저널리즘은 다른 기자들이 적용하는 객관성에 대한 윤리적 접근과 동일한 원칙을 따른다. 무엇을 촬영할지, 프레임에 무엇을 포함할지, 어떻게 큐레이션하고 편집할지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과제를 위해 뉴스를 촬영하거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려는 과정에서 다양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포토저널리스트(사진기자)는 어떤 사진을 촬영할지, 어떤 사진을 연출할지, 그리고 어떤 사진을 대중에게 공개할지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진다. 예를 들어, 폭력과 비극을 담은 사진은 미국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피가 나면, 톱 기사가 된다”는 암묵적인 원칙 때문이다. 대중은 잔혹한 사진과 극적인 이야기의 장면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진이 대중에게 보여지기엔 너무 폭력적인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사진은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사진에 묘사된 인물의 이름이 캡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 병사가 거리에서 처형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은 죽음의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는 이유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진 속 희생자의 아내는 신문 1면에 실린 사진을 통해 남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 사진은 “미국 내 반전 운동을 촉진한 사진”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전쟁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폭력적인 장면에 노출되는 것은 이를 기록하는 사람들에게 생리적,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는 사진기자들이 보고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감정 노동 중 하나에 해당한다. 이 경우, 사진을 촬영한 에디 애덤스(1933-2004)는 “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삶이 파괴되었고, 나는 그걸로 돈을 받았다. 나는 영웅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세계에 끼친 이 사진의 영향 때문에 이 사진이 자신을 괴롭혔다고 고백했다.

사진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주요 사례는 미국 민권운동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빌 허드슨(1932-2010)은 평화적인 시위를 기록하기 위해 앨라배마주 버밍엄에 머물던 중, 고등학생 월터 개즈던을 촬영했다. 이 사진에서 개즈던은 경찰견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으로 보였고, 그 결과물이 민권운동의 잔혹한 면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진은 1963년 5월 《뉴욕 타임스》의 상단에 실렸다. 이 사진은 민권운동의 흐름을 바꾸는 데 기여했으며, 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포토저널리즘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로는 사생활 권리, 피사체가 원하는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도록 협상하는 것, 그리고 보상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특히 폭력적인 장면을 다룬 사진과 관련하여, 사진기자들은 희생자들의 사진을 공개할지 말지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다. 희생자의 사생활 권리가 종종 고려되지 않거나, 그들의 동의나 사전 고지 없이 사진이 게재되는 경우도 있다.

포토저널리즘의 또 다른 주요 문제는 사진 조작으로, 어느 정도의 조작이 허용될 수 있는지가 논란의 대상이다. 일부 사진은 단순히 색감을 보정하기 위해 조작되지만, 다른 사진들은 사람을 추가하거나 제거하는 등 상당히 조작된 경우도 있다. 전쟁 사진은 자주 연출된 장르로 알려져 있다. 과거 전쟁에서 사용된 카메라의 크기와 종류 때문에 즉흥적인 뉴스 이벤트를 포착하는 일은 드물었고, 더 나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피사체를 신중히 구성하고 연출했다. 또 다른 윤리적 문제는 잘못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캡션이다. 2006년 레바논 전쟁 사진 논란은 이러한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저널리즘에서의 사진 조작 사용에 대한 다른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디지털 사진의 등장은 이미지 조작, 복제, 전송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관련된 많은 윤리적 문제가 복잡해졌다.

윤리적 갈등은 이미지가 언론사에 전달된 후 이를 관리하는 부편집자나 사진 편집자의 행동에 따라 완화되거나 심화될 수 있다. 사진기자는 자신이 촬영한 이미지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전미보도사진가협회(NPPA)는 포토저널리즘을 강조하는 미국의 전문가 단체다. NPPA 회원들은 다음과 같은 윤리 강령을 준수한다.

  1. 포토저널리즘의 실천은 과학이자 예술로서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2. 포토저널리즘은 다른 몇몇 직업에만 비길 만한 수준으로 대중에게 봉사할 기회를 제공하며, 이 직업의 모든 구성원은 어떤 형태의 상업적 고려로부터 자유로운 높은 윤리적 행동 기준을 모범과 영향력을 통해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3. 모든 사진기자는 언제나 진실하고 정직하며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해야 할 개인적 책임이 있습니다.
  4. 다양한 형태의 사업 홍보는 필수적이지만, 어떤 종류의 거짓된 진술도 전문 포토저널리스트로서의 자격이 없으며, 우리는 그러한 관행을 엄중히 규탄한다.
  5. 포토저널리즘의 질을 지속적으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우리 직업의 모든 구성원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6. 모든 사진기자는 법으로 인정된 모든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 모든 뉴스 및 시각 정보 출처에 대한 접근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7. 우리의 사업 거래, 야망 및 관계의 기준에는 인류 공동체에 대한 동정심이 포함되어야 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가장 높은 의무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비즈니스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책임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책임을 다하고 그 의무를 다하여 우리 각자가 일을 마쳤을 때 인간의 이상과 성취의 수준을 우리가 발견했던 것보다 더 높이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8. 윤리 강령이 모든 상황을 예단할 수는 없으므로, 윤리 원칙을 적용할 때는 상식과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비윤리적 관행

대부분의 포토저널리스트들은 연출된 장면을 솔직한 장면으로 제시하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여긴다. 포토저널리즘 역사에서 일부 사진가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관객을 속인 사례들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베테랑 사진작가인 마이크 메도우스는 1993년 10월 27일 캘리포니아 남부를 휩쓴 대형 산불을 취재하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소방관인 마이크 알베스가 알타데나의 수영장에서 물로 더위를 식히고 있는 그의 사진이 《타임스》와 전국에 보도되었다. 이 사진을 퓰리처상 후보로 제출하기 전에 메도우스의 담당 편집자인 프레드 스위츠는 이 소방관에게 연락했는데, 그는 메도우스로부터 수영장에 가서 자신의 머리에 물을 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메도우스는 “좋은 장면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 기억으로는 직접 그렇게 하라고 한 적은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 저는 수년 동안 속보 기사를 작성해왔지만 사진을 설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메도우스는 일주일 동안 무급 정직 처분을 받았고 사진은 모든 사진 공모전에서 탈락했으며, 《타임스》는 이를 “조작”이라고 불렀고 신문사의 사진 감독인 래리 암스트롱은 “상황을 조작하면 뉴스도 조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뉴욕 타임스》의 에드워드 키팅(1956-)은 FBI가 알카에다 조직을 급습한 마을 근처의 중동 식료품점 밖에서 장난감 총을 겨누고 있는 어린 소년의 사진을 찍었다. 현장에 있던 다른 사진작가들은 키팅이 소년에게 총을 어느 방향으로 보고 조준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자신의 팔로 가리키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가 이 사건을 보도한 후, 키팅은 어쩔 수 없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신기술의 영향

로저 펜튼의 ‘포토그래픽 밴’ 사진(1855). 이전에 와인 상인의 마차를 개조한 것이며, 보이는 인물은 그의 조수이다. via Wikimedia Commons

19세기 중반 크림 전쟁 초기에 사진가들은 유리판 카메라라는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전장에서 영국 군인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따라서 전쟁 상황뿐만 아니라 긴 셔터 속도가 필요한 사진을 찍어야 했고, 사진을 찍기 전에 각 판을 준비하고 촬영 후 바로 현상해야 했다. 이로 인해, 예를 들어 로저 펜튼은 이동식 암실을 가지고 다니게 되었고, 이 때문에 적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적 장벽 때문에 로저 펜튼은 액션 장면을 직접 촬영할 수 없었다.

현대 사진 저널리즘의 시작을 알린, 1925년 출시된 ‘라이카 1’ 모델. via Wikimedia Commons

사진을 뉴스 보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확대 가능한 필름 네거티브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기록하는 더 작고 휴대간편한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1925년 35mm 라이카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사진작가들은 현장과 함께 움직이며 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만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모터 드라이브, 전자 플래시, 자동 초점, 개선된 렌즈 및 기타 카메라의 발전으로 사진 촬영이 더욱 쉬워졌다. 새로운 디지털 카메라 덕분에 포토저널리스트는 필름 롤 길이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카메라에 포함된 메가픽셀 수, 촬영 모드가 JPEG인지 Raw인지, 사용하는 메모리 카드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하나의 메모리 카드에 수천 장의 이미지를 저장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는 전 세계의 이벤트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중요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카메라 폰을 들고 사진을 찍어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에 게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편의성 덕분에 AP 통신 및 기타 회사는 사진의 소유권을 가진 시민 기자에게 연락하여 뉴스 매체에서 해당 사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을 수 있다.

뉴스 가치에 있어서는 사진의 내용이 품질보다 더 중요한 경향이 있다. 2004년 2월 18일, 《뉴욕 타임즈》는 1면에 카메라 폰으로 촬영한 AT&T CEO 존 제글리스(1947-)의 사진을 게재했다. 콘텐츠는 여전히 포토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미지의 신속한 수집과 편집으로 마감 시간을 연장할 수 있게 되면서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니콘 D1, 캐논 EOS D30 같은 디지털 카메라가 아직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원격지에서 컬러 사진 한 장을 스캔하여 인쇄를 위해 뉴스 오피스로 전송하는 데 거의 30분이 소요되었다. 이제 포토저널리스트는 디지털 카메라, 휴대폰, 노트북 컴퓨터만 있으면 이벤트 발생 후 몇 분, 심지어 몇 초 만에 고품질 이미지를 전송할 수 있다. 카메라 폰과 휴대용 위성 링크 덕분에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점에서 이미지를 모바일로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뉴스 사진가들 사이에서는 이미지 캡처 기술이 자연스럽게 발전함에 따라 오늘날 알려진 포토저널리즘이라는 직업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2010년대 들어 포토저널리즘 직원의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었고, 현재 미국의 일부 대형 뉴스 매체는 필요한 인력 대부분을 프리랜서에게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6년에 《뉴욕 타임스》는 52명의 사진 편집자를 고용하고 시각 자료의 50% 이상을 프리랜서에 의존했으며, 《월스트리트 저널》은 24명의 사진 편집자를 고용하고 특집 이미지의 66%와 뉴스 이미지의 33%를, 《워싱턴 포스트》는 19명의 사진 편집자를 고용하고 국제 뉴스 이미지의 80%, 정치 뉴스 이미지의 50%, 국내 뉴스 이미지의 60~80%를 프리랜서에 의존하고 있다.

시민 저널리스트의 시대와 아마추어 구경꾼의 뉴스 사진 제공은 포토저널리즘의 예술에 기여했다. 폴 레빈슨(1947-)은 이러한 변화를 “모든 사람이 시각적 현실을 잠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 최초의 저렴하고 접근하기 쉬운 사진 기술 중 하나인 코닥 카메라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뉴스 수용자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기존 매체와는 별개로 블로그, 팟캐스트, 온라인 뉴스가 생겨났고,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저널리즘 외부의 기업에서 뉴스가 점점 더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가디언》과 로이터 통신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던 댄 정은 전문 사진기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동영상에 적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디지털 일안 반사식 카메라에는 동영상 기능이 탑재되고 있다.

폰 저널리즘

폰 저널리즘은 비교적 새롭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포토저널리즘의 한 수단으로, 전문 사진가나 비전문 사진가가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편집한 사진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최근 몇 년간 소셜 미디어가 사람들이 뉴스를 접하고 이벤트를 공유하는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 잡으면서, 휴대전화 사진 촬영이 온라인 시각적 소통의 주요 도구로 인기를 얻고 있다. 휴대전화는 휴대가 간편하고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닐 수 있으며, 사진을 즉각적으로 촬영함으로써 장면이나 피사체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다. 사진가들은 풍부한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아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매우 미학적인 방식을 구현할 수 있다. 사진이 소셜 미디어에 업로드되면, 사진가들은 즉시 다양한 관객에게 작품을 노출하고 실시간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온라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사진은 짧은 시간 안에 널리 퍼질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소셜 미디어와 폰그래피 결합의 장점을 발견한 일부 유명 신문, 뉴스 잡지 및 전문 사진 저널리스트들은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폰-저널리즘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2005년 7월 런던 폭탄 테러가 발생했을 때,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처음으로 시민 기자가 카메라 폰으로 찍은 사진을 1면에 실었다. 목격자와 생존자들의 작품인 이 사진들은 기록적 의도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외상적 충격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 사진들은 “우리 주변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는 역사의 생생하고 사실적인 기록”이라고 《워싱턴 포스트》 기자 로버트 맥밀런은 말했다. 또 다른 사례로, 2012년 허리케인 샌디가 미국 북동부를 강타했을 때, 《타임》은 참상을 기록하기 위해 다섯 명의 사진가를 아이폰과 함께 파견했다. 사진가들은 현장 깊숙이 들어가 폭풍과 인간의 고통에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촬영했다. 그 중 하나는 벤자민 로위가 브루클린의 코니아일랜드에서 격렬한 바다 파도가 무너지는 장면을 담은 사진으로, 《타임》 11월 12일자 표지를 장식했다. 그러던 2013년, 《시카고 선-타임스》는 퓰리처상 사진 부문 수상자인 존 H. 화이트를 포함한 28명의 사진작가 전원을 해고했다. 이 신문은 시청자들이 더 많은 동영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런 다음 프리랜서 사진가를 고용하고 이들에게 사진 촬영을 위한 아이폰 사용법을 교육하여 공백을 메우도록 했다. 일부 온라인 시청자들은 신문의 이전 전임 전문 사진가들과 비교했을 때 품질이 때때로 떨어진다는 점을 빠르게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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