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to-city
원시도시는 계획성이나 중앙집권적 지배가 부족한 대형의 밀집된 신석기 정착지로, 대체로 (흔히 말하는) ‘도시’와 구별된다. 이 용어는 메가사이트(동일 기간 및 지역의 다른 유적지와 비교했을 때 비정상적으로 큰 유적지)라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많은 원시도시로 간주되는 유적들의 정확한 분류는 모호하고 상당한 논란이 있지만, 일반적인 예로는 토기-이전 신석기 B 문화와 그 이후의 문화들이 포함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유적들, 예를 들어 예리코와 차탈회위크, 동남 유럽의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의 유적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우바이드 시대의 유적들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기원전 4천년 말 우루크 같은 도시의 등장과 함께, 최초의 확실한 도시 정착지가 발달한 우르크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 이전의 유적지다.
A proto-city is a large, dense Neolithic settlement that is largely distinguished from a city by its lack of planning and centralized rule. The term mega-sites is also used. While the precise classification of many sites considered proto-cities is ambiguous and subject to considerable debate, common examples include sites of the Pre-Pottery Neolithic B culture and following cultures in the Fertile Crescent such as Jericho and Çatalhöyük, sites of the Cucuteni-Trypillia culture in Southeast Europe, and of the Ubaid period in Mesopotamia. These sites pre-date the Mesopotamian city-states of the Uruk period that mark the development of the first indisputable urban settlements, with the emergence of cities such as Uruk at the end of the Fourth Millennium, B.C.
원시도시 정착지에서 도시의 출현은 초기 도시화의 다양한 경험을 보여주는 비선형적인 발전 과정이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우바이드 시대 원시도시 유적들은 첫 번째 수메르 도시들의 사회적, 정치적 발전을 예고하지만, 많은 원시도시들은 이후의 도시 정착지들과 큰 연관이 없다. 도시와 원시도시의 발전, 그리고 사냥과 채집에서 농업으로의 전환은 신석기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The emergence of cities from proto-urban settlements is a non-linear development that demonstrates the varied experiences of early urbanization. Whilst the proto-urban sites of the Ubaid period in northern Mesopotamia anticipate the social and political developments of the first Sumerian cities, many proto-cities show little correlation with later urban settlements. The development of cities and proto-cities and the transition away from hunting and gathering toward agriculture is known as the Neolithic Revolution.
정의
Definition
원시도시라는 라벨은 그 시대에 비해 크고 인구 밀도가 높은 신석기 메가사이트에 적용되지만, 후에 나타난 도시 정착지들, 예를 들어 기원전 4천년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에서 발견되는 특성들은 대부분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나중의 도시 유적들은 일반적으로 밀집되고 계층화된 인구와 공공 사업 건설, 식량 잉여분의 재분배, 주변 지역에 대한 침략 등을 촉진하는 수준의 조직이 특징이다. 그에 반해서, 차탈회위크 같은 원시도시 유적은 인구 밀도가 높지만 대규모 공공 사업 같은 중앙 통제와 사회적 계층화를 나타내는 명확한 징후는 부족하다.
The label of a proto-city is applied to Neolithic mega-sites that are large and population-dense for their time but lack most other characteristics that are found in later urban settlements such as those of the Mesopotamian city-states in the 4th Millennium B.C. These later urban sites are commonly distinguished by a dense, stratified population alongside a level of organisation that facilitated the building of public works, the redistribution of food surpluses and raids into surrounding areas. In contrast, proto-urban sites such as Çatalhöyük are population dense but lack clear signs of central control and social stratification, such as large public works.
일반적인 예
Common Examples
예리코
Jericho
토기-이전 신석기 A 시대의 예리코는 기원전 9천년대 초기에 밀집된 인구를 가진 대형 정착지였으며, 정착지의 인구 추정치는 2,000~3,000명에서 200~300명까지 다양하다. 이곳은 아인 에스-술탄의 샘에서 나오는 담수와 가까워 동물 사육과 농업의 초기 발전을 촉진했으며,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신석기 혁명의 가장 발전된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Pre-Pottery Neolithic A Jericho was the site of a large settlement with a dense population as early as the Ninth Millennium BC, with estimates of the settlement’s population ranging from 2000-3000 to only 200-300. Its proximity to fresh water from the spring at Ain es-Sultan facilitated the early development of animal husbandry and agriculture, making the site among the most advanced centres of the Neolithic Revolution in the Fertile Crescent.
이 정착지는 2~3헥타르의 면적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폭 3m, 높이 4m의 석벽과 가장 오래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예리코 탑이다. (이 탑은 기원전 8000년경에 건설된 8m 높이의 대형 석탑으로, 탑을 건설하는 데는 상당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했으며, 약 10,400일의 노동 시간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성벽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했을 수도 있고, 홍수 감지 시스템 또는 “공동 생활 방식을 채택하도록 사람들을 동기부여하는” 상징적인 기념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이 탑은 공동체 내에서 권력 투쟁을 나타내는 징후일 수도 있다. 개인이나 집단이 “거주자들의 원시적인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을 설득하여 탑을 건설하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유적에서는 인간 폭력의 증거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싸움이나 폭동에서 죽임을 당한 12명의 사람들의 유골이 탑 안에서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가축화, 농업 및 건축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회 조직은 여전히 정착지의 성공에 결정적인 요소였다. 기원전 6000년에는 큰 지진이 아인 에스-술탄의 샘물을 이동시키거나 방해했으며, 이는 신석기 시대 예리코의 종말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The settlement was built over an area of 2 or 3 ha, and its most notable features include stone walls 3m wide and 4m tall, as well as the oldest known monumental building, the Tower of Jericho: a large stone tower 8m high and built c. 8000 BC The Tower required substantial communal effort to build, with an estimated 10,400 working days invest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tower. It may have functioned as part of a fortification system, a flood-detection system, or as a symbolic monument to “motivate people to take part in a communal lifestyle”. The Tower may also have been an indication of power struggles within the community, as an individual or a group may have “exploited the primeval fears of the residents and persuaded them to build it”. There is also evidence of human violence at the site, as the skeletons of twelve people apparently killed in a fight or riot have been found within the tower. Thus, despite new technologies in domestication, agriculture and architecture, social organisation was still a decisive factor in the success of the settlement. In 6000 B.C., a major earthquake shifted or interrupted the Spring of Ain es-Sultan, likely causing the end of Neolithic Jericho.
차탈회위크
Çatalhöyük
차탈회위크는 남부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신석기 시대의 메가사이트로, 기원전 7100년부터 6000년까지 사람이 거주했으며, 면적이 34에이커(137,593㎡)에 이르는 이곳에는 최대 8000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지는 서로 겹겹이 쌓인 진흙벽돌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들 사이에는 쓰레기 더미나 가축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차탈회위크는 의도적인 계획의 흔적을 보여주기보다는 “유사한 단위(건물)의 반복을 통해 유기적으로 모듈화된 발전”을 나타낸다. 개별 주택은 대부분 자급자족 구조로 기능했고,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집을 짓는 전담 건설자가 없었고, 건축에 사용된 벽돌은 구성 성분과 형태가 다양했다. 이곳에서는 카파도키아에서 170km 떨어진 곳에서 가져온 흑요석의 수입과 같은 장거리 교역의 증거가 있으며, 이를 활용한 부가가치 생산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차탈회위크에서는 사회적 계층화나 중앙집권적 권위의 뚜렷한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복잡한 문화와 정착지의 지속성을 볼 때 사회적 결속을 이루기 위한 다른 방식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Çatalhöyük is a mega-site of the Neolithic in Southern Anatolia that was inhabited from 7100-6000 B.C., and had a population of up to 8000 people in a site measuring 34 acres. The site consists of sequences of mudbrick buildings built atop one another and separated by spaces for middens and livestock. Rather than showing signs of deliberate planning, Çatalhöyük displays an “organic modular development through the repetition of similar units (buildings)”. Individual houses were largely self-sufficient in function, lacking specialisation. For example, there were no assigned builders of houses, and the bricks used to build them differed in composition and shape. There is some evidence of long-distance trade, with possible value-added production occurring with imports of obsidian from Cappadocia, 170 km away. The site has little evidence of significant social stratification or centralised authority, yet the complex culture and longevity of the settlement suggests different methods of achieving social cohesion.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
Cucuteni-Trypillia Culture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기원전 4100~3400년)는 신석기-동석기 시대 동안 남동부 유럽에서 가장 큰 정착지를 형성한 것으로 주목받는다. 이 정착지의 면적은 100헥타르에서 340헥타르에 이르렀다. 그 규모로 인해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가 만든 메가사이트는 일부에서 원시도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The Cucuteni-Trypillia culture (4100-3400 B.C.) is notable for creating the largest settlements in south-eastern Europe during the Neolithic-Eneolithic that range between 100 and 340 ha. Owing to their size, the mega-sites created by the Cucuteni-Trypillia culture is classified by some as proto-cities.
우크라이나의 네벨리브카에 위치한 쿠쿠테니-트리필리아 유적지는 약 1500개의 구조물이 두 개의 동심원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내부 거리로 인해 정착지가 14개의 구역과 140개 이상의 이웃으로 나뉘어 있다. 이러한 배치가 중앙 권위에 의한 계획을 시사함에도 불구하고 개별 지역들은 높은 수준의 가변성을 보여주며, 경제와 교역 측면에서는 이전 또는 동시대의 정착지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의 밀집된 정착으로 인한 사회적 긴장과 인구 압박은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전시키는 대신, 끊임없는 이주를 통해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의 유적지가 도시화 과정을 나타내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The Cucuteni-Trypillian site of Nebelivka in Ukraine features approximately 1500 structures organised into two concentric circles with inner streets that separate the settlement into 14 quarters and over 140 neighbourhoods. Despite this layout suggesting planning from a central authority, individual neighbourhoods feature a high degree of variability, and the site is undistinguishable from preceding or contemporary settlements in terms of economy and trade. Social tensions and population pressures resulting from the dense settlements of the Cucuteni-Trypillian culture may have instead been resolved by constant migration as opposed to the development of new social and political institutions in a sedentary population. It is thus ambiguous if the sites of the Cucuteni-Trypillian culture represent an urbanisation process.
도시 개발
Development of cities
원시도시에서 도시로의 발전은 대부분의 경우 단선적인 진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시도시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은” 고밀도 거주의 “초기 실험”으로 정의되며, 특히 인구 수준에서 이러한 특징을 보인다. 이는 도시화 과정이 보다 유연하고 복잡한 궤적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The development of cities from proto-urban sites was not a linear progression in most cases. Rather, proto-cities are defined as “early experiments” in high-density living that “did not develop further”, particularly in their level of population, suggesting a more flexible and complex trajectory to urbanisation.
그 대신에, 기원전 4천년경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텔 브락 같은 여러 원시도시 인구 중심지는 내부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채택한 “성공적인 실험”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지는 우루크 같은 남부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의 행정 관행을 예고하는데, 예를 들어 소유권이나 통제를 나타내기 위해 인장을 사용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텔 브락에서 발견된 사자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인장 봉인은 고위 관리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며, 후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사자를 왕권의 상징으로 여겼다.
Alternatively, a number of proto-urban population centres such as Tell Brak in Northern Mesopotamia in the fourth millennium B.C. can be considered “successful experiments” that adopted new social and political institutions to mitigate internal conflicts. These sites anticipate the administrative practices of Southern Mesopotamian city-states such as Uruk, such as the use of seals to denote ownership or control. At Tell Brak, a stamp sealing with a motif of a lion suggests the authority of a senior official; in later periods Mesopotamians considered the lion a symbol of kingship.
기원전 4천 년 말까지, 남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우루크 도시의 출현은 이전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의 원시도시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발전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도시는 “정착지 핵형성에 있어 점점 더 성공적인 실험들의 절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매우 넓은 규모(250헥타르, 텔 브락의 두 배 크기)를 자랑하는 우루크는 종교적, 정치적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잘 꾸며진 대규모 주택과 사원들은 정치 및 종교 엘리트층을 나타낸다. 초기 메소포타미아 도시들 중 가장 두드러진 곳으로, 우루크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기원전 약 3300년)가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4천 년의 공공 건축물 중 가장 넓은 면적을 포함하고 있어 고고학자들이 도시로 분류하는 초기 정착지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
By the end of the fourth millennium B.C., the emergence of the city of Uruk in Southern Mesopotamia reflected the social, cultural and political developments of proto-cities in the region during prior centuries. The city can be viewed as “the culmination of a series of increasingly successful experiments in settlement nucleation”. Extremely large in scale (250 ha, twice the size of Tell Brak), Uruk was a centre of religious and political power, with large, well-decorated households and temples indicating a political and religious elite. As the most prominent of the early Mesopotamian cities, Uruk has yielded the earliest written documents (c. 3300 BC) and also the largest area of public buildings from the fourth millennium B.C., making it among the most significant of the early settlements that archeologists classify as cities.
우루크와 같은 도시 정착지의 부상은 복잡한 노동 분업과 농업 잉여 생산으로 인해 사회 계급이 발달하고 궁극적으로 통치자나 기타 정부 요소 같은 주요 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사회적 관계에서의 “혁명”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초기 도시와 국가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친족에 기반했던 것에서 거주지나 계급에 기반한 관계로 변화했다. 국가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여겨지는 기념비적 건축물은 정치 권력의 상징으로 작용했으며, 건축 과정 자체를 통해 평민들을 그들의 도시와 통치자에게 정서적으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고대 기념물을 건설하기 위해 노예 노동이 사용되었다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이러한 노동의 상당 부분은 세금 의무의 일환으로 자유 평민들에 의해 제공되었다.
The rise of urban settlements such as Uruk is often attributed to a “revolution” in social relations where – among other factors – the complex division of labour and the production of an agricultural surplus resulted in the development of social classes and ultimately, the centralisation of power around key institutions such as a ruler or other elements of government. In the first cities and states, this shifted societal relations from being based on kinship to being based on residence or class. Monumental architecture – attributed to the state – served as a symbol of political power, and may have also served to bind commoners emotionally to their city and to their ruler through the act of construction. As opposed to the popular view of the use of slave labour to construct ancient monuments, much of the labour was provided by free commoners as part of their tax requirements.
도시화 과정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초기 도시들에서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그렇게 혁명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즉, 친족 관계가 대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 정착지와 도시를 통합하도록 재정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의 사원과 궁전은 “아버지”, “아들”, “하인”과 같은 가정 용어를 사용하여 가정처럼 운영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기원전 5천 년 우바이드 시대 마을 정착지의 주택은 기원전 4천 년 텔 브락의 원시도시 정착지와 우루크 도시의 사원과 동일한 구조를 공유했다; 우루크의 일반 주민은 사원을 규모와 웅장함의 차이만 있을 뿐, 여전히 집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기원전 4천 년 동안 가정은 국가에 의해 대체된 것이 아니라, 직계 가족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은유적 가정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첫 도시들의 형성은 야심 찬 가정의 가장들이 사회적 연결을 확장하려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가정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원래 의도와는 달리 새로운 추종자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착지가 우연히 성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An alternative explanation of the urbanisation process suggests that changes in social relations may not have been as revolutionary in the earliest cities, where kinship may not have been replaced, but rather redefined to incorporate entire settlements and cities. The temples and palaces of the Mesopotamian city-states were run like households, using household terminologies such as “father”, “son” and “servant”. Houses in the village settlements of the fifth millennium B.C. Ubaid Period in Mesopotamia shared the same layout with temples both in the proto-urban settlement at Tell Brak and in the city of Uruk in the fourth millennium B.C; a common resident of Uruk would still be able to recognise a temple as a house, albeit different in scale and grandeur. Thus, through the course of the fourth millennium B.C., households might have been replaced not by the state, but rather by a metaphorical household that spanned an entire city rather than just an immediate family. The formation of the first cities may have been somewhat accidental if ambitious household heads trying to expand their social connections unintentionally grew their settlement by attracting new followers, even if they originally aimed to sustain and expand their own household.
논란
Controversy
원시도시, 도시, 또는 시골 정착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모호함과 논쟁의 원천이 되어왔다. 비어 고든 차일드(1892-1957)는 “‘도시’라는 개념은 정의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고 언급했다. 차일드가 1950년에 제시한 “도시 혁명” 개념은 도시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여전히 주요한 틀로 작용하며, 신석기 마을과 최초의 “본격적인” 도시를 구분하는 열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차일드의 기준들 중 가장 오래 지속되는 특징으로는 크고 밀집된 정착지 인구, 노동의 전문화, 중앙집권적 권위에 의한 농업 잉여의 집중, 사회 계층의 형성, 그리고 가족 및 가정으로부터 분리된 정치 권력의 중앙집중화 등을 들 수 있다.
The precise definition of what constitutes a proto-urban, urban or rural settlement has been a source of ambiguity and debate. As noted by V. Gordon Childe, “The concept of ‘city’ is notoriously hard to define”. Childe’s 1950 concept of the “Urban Revolution” remains the prevailing framework for understanding the origins of cities, and lists ten criteria which differentiate Neolithic villages from the first “proper” cities. Among other features, the most enduring of Childe’s criteria include: a large and dense settlement population, the specialisation of labour, the concentration of an agricultural surplus by a centralised authority, the creation of social classes, and the centralisation of political power away from families and households.
차일드의 기준 중 많은 부분은 여전히 초기 복합 사회의 발전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그의 기본 모델은 초기 도시 발달에 대한 대부분의 현대적인 설명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보다 현대적인 고고학 연구에서는 “도시 혁명”보다는 “국가의 기원”, “초기 국가 형성” 또는 “고대 국가”에 대해 논의하며, “차일드의 도시 혁명 개념은 복잡한 국가 수준 사회로의 전환에 관한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도시화나 도시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Many of Childe’s criteria are still widely recognised as key milestones in the development of early complex societies, and his basic model can still be discerned within most modern accounts of the development of the earliest cities. More modern archaeological studies discuss the “origin of states”, “primary state formation” or “archaic states” as opposed to any “Urban Revolution”, and it is noted that “Childe’s concept of the Urban Revolution was about the transition to complex, state level societies, and not primarily about urbanism or cities per se”.
도시 정착지를 정의하는 데 있어 차일드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자주 의문시되어 왔다. 그의 설명은 “도시나 특정 도시의 형태나 미학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으며”, 대신 “도시화와 국가를 단일 연속 과정으로 결합하여 이러한 특정 연관성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차일드 접근법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그것이 유럽 중심적 틀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타당성이 의심될 뿐 아니라 장소나 문화에 특화된 세부사항을 무시하고 궁극적으로 “체크리스트 방식”에 그친다는 점이다. 대안적이고 더 유연한 방법으로 도시와 다른 유형의 유적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도시, 원시도시, 또는 도시-이전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데 있어 덜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초기 도시 현상을 정확히 분류하는 일은 종종 모호하고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Childe’s enduring influence in defining urban settlements has been frequently called into question, as his description features “nothing about the form or aesthetics of the City, or any particular city”, rather, it “combined urbanism and the state in a single sequence and permitted the uncritical evaluation of this particular association”. Another criticism of the Childean approach has been its reliance on a Eurocentric framework with questionable validity on a global scale, ignoring site and cultural-specific details and ultimately constituting a “check-list approach”. Alternative, more flexible methods of differentiating a city from other types of sites have been less effective at differentiating between different site types, such as between urban, proto-urban or pre-urban. Thus, the precise classification of early urban phenomena is often ambiguous and subject to debate.
- 출처 : 「Proto-city」, Wikipedia(en), 202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