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립트 클래시시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이삭 광장에 있는 독일 제국 대사관(1911~12년 설계)은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의 핵심 본보기로 꼽힌다. 원래 지붕의 주각에 있던 대형 조각상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제거되면서 더 많이 간결해졌다. via Wikimedia Commons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있는 〈빅토리아 궁전〉, 1937-44. via Wikimedia Commons

스트립트 클래시시즘(헐벗은 고전주의; 또는 “스타브드 클래시시즘(빈약한 고전주의)” 또는 “그리시안 모던[고대 그리스 양식의 극단적 현대풍]”)은 주로 장식의 대부분 또는 전부가 제거된 20세기 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정부가 청사 건물을 디자인하는 동안 자주 자주 사용되었다. 그것은 전체주의 정권과 민주주의 정권 모두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 양식은 전통적인 장식 디테일링을 제거하면서 전체적인 매스와 스케일에서 “단순하지만 인지가능한” 고전주의를 수용한다. 건축의 오더는 형태와 구조에서 암시될 뿐이거나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어원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은 때때로 “스타브드 클래시시즘”과 구별되는데, 후자는 “규칙, 비례, 디테일, 기교에 대한 느낌이 거의 없고, 모든 활기와 기백이 부족하다.” 평소에는 “stripped”와 “starved”라는 용어가 구별 없이 사용된다.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은 ‘정치적’ 모더니즘의 물질주의적 징후였다. 최근의 역사 기록은, 이 건축 양식 ㅡ 그리고 모더니즘 사상과의 관계 ㅡ 을 예술적 재주를 활용하여 미래를 지향하는 강력한 정치적 기풍을 지어진 형태로 표현한, 1920~1930년대에 발생한 정치적 프로젝트와 명시적으로 연결시켰다.

여타 작가들은 현대 세계의 무수한 가능성을 극찬한 이탈리아 미래파 같은 아방가르드 운동이 이 독특한 스타일(그리고 그것이 옹호한 미래주의)에 미친 영향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프랑스-태생의 폴 필립 크레(1876~1945) 등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소비에트 유니온, 뉴딜 미국 등에서 사용되었다.


설명 및 역사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20세기 합리주의 건축의 일부를 형성하는 보다 철저한 스타일을 위해 예약되어 있지만, 에티엔 루이 불레(1728~1799), 클로드 니콜라 르두(1736_1806), 프리드리히 길리(1772~1800), 피터 스피스(1772~1831), 존 손 경(1753~1837),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1781~1841) 같은, 일부 진보적인 18세기 후반 및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건축가들의 작업에서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의 특성이 구체화된다.

세계대전 사이, 불필요한 것을 모두 빼고 골자만 남긴 고전주의는 전 세계의 많은 기념비적이고 제도적인 정부 건물의 사실상의 표준이 되었다. 정부는 이 건축 방식을 사용하여 현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이상적인 정치적 대응인, 모더니즘과 고전주의를 아울렀다. 부분적으로, 이 운동은 수작업의 고전적인 디테일에 드는 비용을 피함으로써 정부 사업에서 비용을 절감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 1912년에 완공된 페터 베렌스 설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독일 대사관 같은 초기 사례들은 “미스 반데어로에 같은 하이 모더니스트들이 열망했던 고전적인 순수성의 모델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 스탈린, 울브리히트의 건축가들과 아마도 1930년대 미국의 영국과 프랑스 관공서 건물들의 과도하고 절제된 고전주의의 모델을 확립했다.” 이 양식은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뿐만 아니라 스탈린 정권 하의 소련에서도 지지자들을 찾았다. 뉘른베르크 외곽의 나치당 집회장 부지의 일부인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의 체펠린펠트 같은 독일의 가장 유명한 사례들은 기둥과 제단 같은 고전적인 요소들을 스포트라이트 같은 현대 기술과 함께 사용했다. 코모의 카사 델 파쇼 역시 이 운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 소련에서는 지어지지 않은 소비에트 궁전에 대한 제안 중 일부 또한 이 양식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뉘른베르크 외곽에 있는 〈제펠린펠트〉, 알베르트 슈페어, 1934. via Wikimedia Commons
워싱턴 D.C.에 있는 〈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 via Wikimedia Commons

미국 건축가들 중에서는 폴 필립 크레의 작업이 이 양식을 잘 보여준다. 1928년에 지어진 그의 샤토티에리 미국 기념비는 초기 사례로 식별되었다. 이 양식과 관련된 그의 다른 작업으로는 워싱턴 D.C.에 있는 1933년 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의 외관(튜더 리바이벌 양식의 도서관 내부는 제외), 1937년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의 메인 타워, 워싱턴 D.C.의 1937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건물, 1939년 베데스다 해군 병원 타워 등이 있다.

그것은 때때로 대공황 시대에 공공사업진흥국에서 건설한 건물들에서 아르데코 건축 또는 그 요소들과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관련된 스타일은 PWA 모던과 그레코 데코로 설명된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으며, 국경을 초월했다.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에서 적어도 주목할만한 실험을 한 건축가로는 존 제임스 버넷(1857~1938), 조르조 그라시(1935~), 레온 크리에(1946~), 알도 로시(1931~1997), 알베르트 슈페어, 로버트 A. M. 스턴(1939~), 파울 트루스트(1878~1934) 등이 있다.

전체주의 정권에서 인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양식은 미국 뉴딜 정책 시대를 포함하여 많은 영어권 민주주의 정부에서 채택되었다. 아무튼, 추정되는 “파시스트”적 기반은 주류 건축 사상으로의 수용을 저해했다. 이 양식을 선호했던 건축가들이 특정한 우파 정치 성향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둘 다 이 양식의 팬이었다. 반면에,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은 이오시프 스탈린과 여러 지역 공산주의 정권에서도 선호했다.

나치 독일의 패망과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이 양식은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1960년대 디자인에서 어느 정도 부활했다. 그 예시로 필립 존슨의 뉴욕링컨 공연예술센터가 있으며, 이는 “스트립트 클래시시즘 양식의 부활”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호주 캔버라에서는 호주수도특별구법원(1961)과 호주국립도서관(1968)이 웅장한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의 디자인을 다시 선보였습니다. 호주의 비주거용 건축 양식을 참고하라.

〈호주국립도서관〉, 호주 캔버라, 1968. via Wikimedia Commons

옛 것과 새 것의 역설적 포용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전체주의 정치 프로그램의 공통된 특징은 문화와 ‘신화’의 사용이었는데, 여기에는 독일의 나치즘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포함된다. 이러한 국가들이 시작한 문화적 동기 부여와 그 모든 다양한 복잡성은 모더니즘 사상의 흐름을 불러일으켰다.

건축을 통해 그들은 물리적 풍경(특히 수도) 속에서 모더니티의 힘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했으며, 동시에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의 절제된 고전적 특징으로 상징되는) 과거를 재창조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건전한’ 요소들을 샅샅이 뒤져 재구성되고 활력을 되찾은, 미래 지향적이고 개방적이며 기념비적인 미래를 열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이 묘한 이분법은, 스트립트 클래시스즘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인데, 역사학자 로저 그리핀은 이를 파시스트 건축물과 관련하여 논하는 그의 개념적 틀인 ‘뿌리 있는 모더니즘’ 속에 담아냈다.

스트립트 클래시시즘 건축물에서의 모더니즘은 그들의 양식적 요소들(음소거 개구부, 텅 빈 벽, 장식의 부재)과 그들의 순수한 기능성을 통해 보여질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현대 건축 이론가인 아돌프 로스와 그의 에세이 「장식과 범죄」는 스트립트 클래시시즘의 양식적 요소들 중 일부를 예견했던 많은 철학자/이론가/건축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미래주의 같은 아방가르드 운동 또한 화려하면서도 유선형이며, 다기능적이면서도 다면적인 현대적 미래—즉 초고속 교통, 첨단 통신 기술, 유압 공학 등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형태를 예고했다. 사무엘 패터슨이 쓴 것처럼, 이는 “역사상 가장 기계화된 전쟁에 맞춰” 등장한 것이었다.

스트립트 클래시시즘 양식은 (대공황의 여파를 개선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던) 뉴딜 정책, 그리고 동시에 미국의 전형적인 천재성 아래서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건축을 갈망했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1882~1945)에 의해 수용되었다. 루즈벨트 행정부, (제퍼슨주의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재창조, 그리고 1930년대 건축의 활용에 대한 논의는 패터슨의 ‘문제-해결사들’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