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무테지우스


무테지우스의 삽화, 1911. via Wikimedia Commons

헤르만 무테지우스로 알려진, 아담 고틀립 헤르만 무테지우스(1861.4.20.~1927.10.29.)는 독일의 건축가, 저자, 외교관으로, 아마도 독일 내에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의 여러 아이디어를 장려하고, 이후 바우하우스 같은 독일 건축 모더니즘의 초기 개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초기 생애와 교육

무테지우스는 1861년 에르푸르트 인근의 그로스노이하우젠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건설업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조기 교육을 받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2년간 공부한 후, 1883년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에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했다. 한편, 독일 의회 건축가 파울 발로트(1841-1912)의 사무실에서도 일했다.


1900년 해머스미스 수도원에서 아내 안나와 함께한 헤르만 무테시우스. via Wikimedia Commons
카셀의 하를레스하우젠 지역에 위치한 엘레나 클리닉의 남쪽 입면으로, 그 본관은 원래 헤르만 무테지우스가 빌라로 지은 건물이다. via Wikimedia Commons

경력

학업을 마친 후, 무테지우스는 1887년부터 1891년까지 도쿄에 있는 독일 건설 회사 엔데 운트 뵈크만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첫 번째 건물 ㅡ 고딕 리바이벌 양식의 독일 복음주의 교회 ㅡ 이 완공되는 것을 보았고, 아시아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1891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프로이센 공공사업부서에서 일했고, (1895년에는) 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서 잠시 공부했으며, 거의 2년 동안 두 곳의 공식 건설 저널 에디터로 근무했다.

런던

1896년에 무테지우스는 런던 주재 독일 대사관의 문화 공보관(아타셰) 자리를 제안받았다. 무테지우스는 패션 디자이너이자 가수였던 안나 트리펜바흐(1870-1961)와 결혼했다. 이는 그에게 영국인의 생활 방식을 연구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이후 6년 동안 주거 건축과 가정 생활 방식 및 디자인을 조사하는 데 집중했으며, 1904년과 1905년에 출간된 3권의 보고서이자 그의 가장 유명한 작업인 『다스 잉글리쉬 하우스』(“영국 주택”)로 마무리했다. 비록 그의 주제는 광범위했지만, 특히 19세기 독일 건축의 과시적인 역사주의와 장식에 대한 집착에 대한 대안으로 기능, 겸손, 절제, 개성과 재료에 대한 정직성을 강조하고 산업 디자인에 장인 정신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영국 예술 공예 운동의 철학과 실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찰스 레니 매킨토시(1868-1928)의 디자인으로 대표되는 글래스고 학파의 혁신적인 작업을 조사하기 위해 글래스고를 방문했으며, 윌리엄 비드레이크(1861-1938)가 작업한 버밍엄에 있는 주택에 관해 썼다.

공식 보고서뿐만 아니라, 무테지우스는 또한 영향력 있는 일련의 책과 기사에서 자신의 아이디어와 관찰을 전달하여 작가로서의 경력을 발전시켰는데, 『영국 주택』에서 절정에 이르러, 독일에서 중요한 문화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아내는 안티-패션(반-유행 복식)에 대해 썼으며 여성들이 독일 의류 산업가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프랜시스 맥도널드(1873~1921)에 의해 디자인된 독특한 제본 방식을 채택한 그녀의 책은 아티스틱 드레스 운동에 대한 중요한 기여로 평가받고 있다.

무테지우스는 1905년 발행된 잡지 《데코라티브 쿤스트》의 한 호에서 글래스고의 윌로우 티룸에 대해 썼는데, 그 호는 거의 전적으로 ‘글래스고의 매킨토시 티룸’에 헌정되었으며, “오늘날 글래스고를 방문하는 누구든 미스 크랜스턴의 티룸에서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쉴 수 있으며, 몇 푼의 돈으로 차를 마시고 아침 식사를 하며, 마치 요정 나라에 있는 듯한 꿈을 꿀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이 짙은 추악함의 정글 속에서 아름다움의 깃발을 높이 들기 위한” 매킨토시의 보상받지 못한 고투를 안타까워했다.

독일

무테지우스는 1904년에 독일로 돌아와 개인 건축가로 입지를 다지는 동시에 프로이센 정부의 공식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워크숍 훈련에 더 중점을 두기 위해 미술과 디자인 교육을 개혁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독일 전역에 걸쳐 일련의 주택을 디자인했으며, 자신의 유명한 책에 자세히 설명한 원칙 및 관행을 활용하고 더욱 확고히 했다.

“무테지우스 사건”과 독일 공작연맹

이 때까지 무테지우스는 영국 문화 숭배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또한 그가 분열된 충성심에 대한 비난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07년에 그는 베를린 강연에서 독일 공산품의 품질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미술공예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무역 협회〉에 의해 고발당했다. 그 결과 몇몇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와 산업가들이 협회로부터 탈퇴하고 대량 생산된 결과물에 최고 수준의 디자인을 도입하는 것을 명시적인 목표로 하는 〈독일 공작연맹〉(도이처 베르크분트)을 설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 공작연맹은 르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및 미스 반데어로에의 초기 경력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지만, 비록 무테지우스는 여러 모로 공작연맹의 정신적 아버지였고 1910년부터 1916년까지 회장을 역임했음에도, 그는 아르누보와 바우하우스의 후기 디자인 모두를 19세기의 그것과 같은 피상적인 스타일로 간주하여 부상하는 초기 모더니즘에 거의 동조하지 않았다.

무테지우스는 1909년에 세워진, 드레스덴의 교외 도시인 독일 최초의 전원 도시, 헬레라우를 건설한 주요 건축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것의 토대는 독일 공작연맹의 활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테지우스의 많은 직원들 중에는, 1924년부터 약 1932년경까지 베를린에 거대한 스케일로 전원 도시의 교훈을 적용한 독일 사회주의 도시 계획가 마르틴 바그너(1885–1957)가 있었다.


죽음과 유산

무테지우스는 베를린에서 현장 방문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1927년 10월 29일까지, 주택을 디자인하고 국내 건축에 관한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슈테티셰 한트베르커 운트 쿤스트게베르베슐레’(시립 공예 및 미술공예 학교)는 1907년 독일 킬에서 개교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5년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테지우스-베르크슐레 킬 퓌어 한트베르크 운트 안게반테 쿤스트(수공예와 응용미술을 위한 킬의 무테지우스 팩토리 스쿨)로 개명했다.


작업

  • 베른하르트 하우스 (1906)
  • 크래머 하우스 (1912)
  • 리히테르펠데-웨스트에 있는 작은 주방 주택 (1909)

주요 저서

  • 『양식 건축과 건축술』 (1902)
  • 『영국 주택』 (1904)
  • 『내 집 짓는 방법』 (1915)
  • 『작은 집과 작은 정착지』 (1920)


카테고리

작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