샷건 하우스


허리케인 카트리나 직후, 뉴올리언스 바이유 세인트 존 지역에 있는 소박한 샷건 하우스. 샷건 하우스는 복도 없이 3~5개의 방이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좁고 직사각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via Wikimedia Commons
1973년 텍사스 휴스턴의 5번 워드 지역에 있는 샷건 하우스. via Wikimedia Commons
텍사스 휴스턴의 제3구역 중 트룩실요 북쪽에는 산탄총 오두막이 많이 있다. via Wikimedia Commons
미시시피 주 아발론에 있는 단 하나의 샷건 하우스는 미시시피 존 허트의 집이었으며,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via Wikimedia Commons

샷건 하우스는 좁은 직사각형의 주거용 주택으로, 일반적으로 너비가 약 3.5m(12ft)를 넘지 않으며, 방들이 서로 연이어 배치되어 있고 집의 양쪽 끝에 문이 있다. 그것은 미국 남북 전쟁(1861~1865)이 끝날 때부터 1920년대까지 미국 남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택 양식이었다. 대체 명칭으로는 샷건 섁(판잣집), 샷건 헛(오두막), 샷건 코티지(작은 시골집)가 있으며, 다가구 주택의 경우, 샷건 아파트라고도 한다. 디자인은 철도 아파트와 유사하다.

오래된 이론에 따르면 이 스타일이 아프리카에서 유래하여 아이티를 거쳐 뉴올리언스의 주택 디자인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것이지만, 이 주택들은 멀리 플로리다 키웨스트와 이보르 시티, 그리고 텍사스, 더 북쪽으로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도 발견된다.

비록 처음에는 빈곤층뿐만 아니라 중산층에게도 인기가 있었지만, 샷건 하우스는 20세기 중반에 빈곤의 상징이 되었다. 도시 재개발로 인해 많은 샷건 하우스가 파괴되었다; 그렇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을 받는 지역에서는 역사적인 보존 노력으로 인해 이러한 주택들이 리노베이션되고 있다.

샷건 하우스의 여러 변형은 추가적인 기능과 공간을 허용하며, 많은 경우 소유자들의 후대 세대의 필요에 맞게 업데이트되었다. 가장 오래된 샷건 하우스들은 실내 배관 없이 지어졌지만, 이것은 나중에 종종 집 뒤쪽에 (때때로 투박하게) 추가되었다.

“더블 배럴(2연발총)” 또는 “더블” 샷건 하우스는 중앙 벽을 공유하는 두 집으로 구성된 연립형 구성으로, 더 많은 주택이 한 지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캐멀백(낙타 등)” 샷건 하우스는 집 뒤편에 2층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복도를 만들기 위해 리모델링 중에 전체 평면도가 변경되기도 한다.


역사

켄터키주 루이빌의 샷건 하우스. 도시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샷건 하우스가 서로 가까이 지어졌다. via Wikimedia Commons

샷건 하우스라는 용어와 건축 형태의 기원 그리고 발전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심지어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상충되는 보존과 재개발 노력의 결과로 더욱 그러하다.

뉴올리언스의 건축사가인 새뮤얼 윌슨 주니어(1911-1993)는 1800년대 초에 샷건 스타일의 주택이 뉴올리언스의 크리올 교외 지역에서 유래했다고 유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또한 “샷건(산탄총)”이라는 용어가 모든 문이 열리면 정문에서 집으로 발사된 산탄총 총알이 다른 쪽 끝인 뒤쪽으로 깔끔하게 날아갈 것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한 참조라고 말했다.

그 대신에, 민속학자이자 교수인 존 마이클 블라흐(1948-2022)는 이 건물 양식과 명칭의 기원 자체가 18세기 이전의 아이티와 아프리카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블라흐는 이 명칭이 “집회 장소”를 의미하는 다호메이 폰 지역 용어인 “to-gun”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뉴올리언스에서 아프리카계 아이티 노예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설명이 잘못 이해되어 “샷건”으로 재해석되었을 수 있다. 블라흐를 인용하면서, 제임스 디츠(1930-2000)는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에 있는 1790년대 해방된 흑인 노예 커뮤니티인 파팅 웨이즈에서의 자신의 발굴로 아프리카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극도로 제한된 증거에 대한 그의 샷건 해석 ㅡ “통합되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두 개의 방 ㅡ 은 “시기상조”라는 비판을 받았다. 초기 아프리카 기원에 대한 블라흐의 이론은 뉴올리언스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1803년에는 도시에 1,355명의 자유 흑인이 있었다. 1810년에는 흑인이 10,500 대 4,500으로 백인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이것은 주택 붐을 일으켰다. 건축업자와 주민 모두가 아이티를 경유한 아프리카인이었기 때문에, 블라흐는 그들이 고국에 두고 온 집을 본떠 새로운 집을 지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포르토프랭스(아이티 수도) 주택 재고의 약 15%를 포함하여 그 기간 동안 잔존한 많은 아이티 주택들이 뉴욜리언스의 싱글 샷건 하우스와 닮았다.

샷건 하우스는 뉴올리언스에서 대중화되었으며, 그리고, 프레드 니펜(1900-1993)이 1930년대에 루이지애나 주택 유형에 대한 주 전체 조사에서 기록한 것처럼, 가장 많은 수가 그곳에서 확산 이론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분산되어 발견된다. 그 스타일은 1832년까지 확실히 그곳에 지어졌지만, 1830년대에 판매된 주택들이 15~20년 전에 지어진 증거도 있다.

루이지애나 주 파젠드빌의 배틀 그라운드 침례교회와 인근 샷건 하우스 스타일 주택, 1960년. via Wikimedia Commons

더 간단한 이론은 그것들이 남부 농촌 지역에서 흔했던 전형적인 한 방 깊이의 평면을 좁은 도시 필지에 맞게 회전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집들은 남쪽의 더운 도시 지역 전체에 걸쳐 지어졌는데, 그 이유는 이 스타일의 길이와 양쪽 끝에 있는 외부 문이 뛰어난 공기 흐름을 허용하는 반면, 좁은 정면은 거리를 따라 설치할 수 있는 부지의 수를 늘렸기 때문이다. 이는 루이지애나 주 파젠데빌에 있는 샷건 하우스의 경우와 같았는데, 파젠데빌은 1960년대 샤르메트 국립 역사 공원 및 전쟁터(현재 장 라피트 국립 역사 공원 및 보호구역의 일부) 조성의 일환으로 결국 철거된 역사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마을이다. 이 스타일은 매우 자주 사용되어 일부 남부 도시에서는 오늘날에도 주택 재고의 10% 이상이 샷건 하우스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이들 주택을 위한 명칭으로 “샷건 하우스”를 사용한 가장 초기 (사례)로 알려진 것은 1903년 8월 30일자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의 안내 광고에서다: “심슨가 교차로에 있는 철도 야적장 구내에 방 3개짜리 집 2채, 선불하는 좋은 세입자에게 월 12달러로 임대; 가격은 할부 시 1200달러 또는 현금 100달러, 잔금 15개월; 투자 은행과 저축 은행의 조합: 이것은 판잣집이 아니라 수리가 잘 된 좋은 샷건 하우스입니다.” 이 광고는 샷건 하우스를 바람직한 노동 계급 주택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1929년까지 테네시 법원은 샷건 하우스를 매우 가난한 세입자 계층 외에는 임대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공황 이후 샷건 하우스는 거의 지어지지 않았고, 기존 집들은 쇠퇴했다. 20세기 후반까지 일부 지역에서 샷건 하우스는 주택 및 기타 용도로 복원되고 있었다.

샷건 하우스는 종종 초기에, 노동자를 위한 주택을 제공하기 위해, 제조 중심지 또는 철도 허브 근처에 위치한 임대용 부동산으로 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공장주들은 종종 직원들에게만 특별히 임대하기 위해 이 집을 지었는데, 보통 한 달에 몇 달러였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까지 샷건 하우스는 종종 소유주가 점유(자가 거주)했다. 예를 들어, 뉴올리언스 로어 나인스 워드의 주택 중 85%(대부분 샷건 하우스)가 자가-거주였다.

샷건 하우스는 자동차의 광범위한 소유로 사람들이 사업체 및 기타 목적지에서 더 멀리 살 수 있게 되기 전에 가장 인기가 있었다. 건물 부지는 폭이 기껏해야 9m(30ft)로 작았다. 새로운 제조업 일자리를 채우기 위해 미국의 시골 지역과 외국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도시에서 주택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샷건 하우스는 북동부 도시에서 연립주택과 동일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어졌다. 여러 채가 종종 한 명의 건축업자에 의해 동시에 지어졌기 때문에 외관이 유사한 경향이 있었다.


특징

앨라배마 주 모빌의 캠프장 역사 지구에 있는 1920년대에 지어진 한 쌍의 샷건 하우스. via Wikimedia Commons

샷건 하우스의 방들은 나란히 늘어서 있고, 전형적으로 거실이 먼저 나오고, 그 뒤로 한두 개의 침실, 마지막으로 주방이 뒤쪽에 있다. 초기 샷건 하우스에는 욕실이 없었지만, 나중에는 집의 마지막 방 앞에 작은 복도가 있는 욕실이 지어지거나, 부엌 측면에 증축되었다. 일부 샷건 하우스에는 방이 두 개뿐이다.

굴뚝은 내부에 지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며, 앞쪽 방과 중간 방이 각각 벽난로 입구가 있는 하나의 굴뚝을 공유할 수 있었다. 부엌은 보통 자체 굴뚝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평면 레이아웃 외에, 샷건 하우스는 공통적으로 많은 표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집은 거의 항상 도로와 가까이 있으며, 때로는 매우 짧은 앞마당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집이 셋백(이격, 물러섬의 의미) 없이 보도와 완전히 붙어 있기도 하다. 원래 계단은 나무였지만, 종종 영구적인 콘크리트 계단으로 대체되었다.

전형적인 캐멀 백 또는 1+1⁄2층 샷건 하우스의 스케치와 장식용 나무 문 받침대의 자세한 스케치. via Wikimedia Commons
욕실이 있는 전형적인 싱글 샷건 하우스의 평면도. via Wikimedia Commons

뉴올리언스 유산의 상징인 이 집은 일반적으로 지면에서 60~90cm 높게 지어졌다. 집 앞에는 문과 창문이 각각 하나씩 있으며, 종종 집의 나머지 부분보다 약간 넓은 뒷방으로 이어지는 옆문이 있다. 현관문과 창문은 본래 장식용 덧문으로 덮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측벽에는 창문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앞문이나 뒷문에 직접 연결되지 않은 방은 일반적으로 집들이 매우 가깝게 지어질 때조차 적어도 하나의 창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샷건 하우스는 목골 구조와 목재 외장재(벽널; 벽판자)를 사용하지만, 일부는 벽돌이나 심지어 석재로 지어진 예도 있다. 특히 더 오래되거나 저렴한 샷건 하우스들에는 집의 앞 벽에서 끝나는 평지붕을 가지고 있다. 1880년 이후에 지어진 주택에서, 지붕은 보통 전면 벽 위로 돌출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돌출부 위에는 박공이 있다. 이 돌출부는 보통 장식용 나무 브래킷으로 지지되며, 때때로 주철 환기장치를 포함한다.

방들은 적당한 크기이며, 따뜻한 공기가 더 높이 올라갈수록 방 아래쪽 부분이 더 시원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냉각 목적을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천장을 가지고 있다. 복도가 없기 때문에 모든 방에서 효율적인 교차 환기가 가능하다. 방에는 일반적으로 몰딩, 천장 메달리온, 그리고 정교한 목공예 같은 일부 장식이 있다. 뉴올리언스 같은 도시에서는 지역 산업을 통해 정교하지만 대량 생산된 샷건 하우스용 브래킷과 기타 장식품을 공급하여 평범한 주택 소유자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변형

더블 샷건 하우스는 기존 샷건 하우스보다 가구당 더 적은 토지를 필요로 했으며, 더 적은 재료로 지을 수 있으며 거주자당 더 적은 토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빈곤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1854년 뉴올리언스에서 처음 나타났다.

험프백(혹등고래)이라고도 불리는 캐멀백(낙타 등) 하우스는, 집 뒤쪽에 부분적으로 2층이 있는 샷건 하우스의 변형이다. 캐멀백 하우스들은 샷건 하우스의 후기에 지어졌다. 평면과 시공 방식은 뒷방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샷건 하우스와 매우 유사하다. 2층 또는 “험프(혹)”에는 1~4개의 방이 있다. 부분적인 2층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단층 주택으로 세금을 부과했다. ㅡ 이것이 그것들을 건설한 주요 이유였다.

(둘의) 조합인 더블 캐멀백 샷건 하우스도 존재한다. 사소한 변형으로는 부엌에 접근할 수 있는 옆문, 또는 집의 거의 전체 길이에 걸쳐 있는 베란다(포치)가 있다.

“노스 쇼어” 하우스는 세 면에 넓은 베란다가 있는 샷건 하우스다. 그것들은 대부분이 부유한 백인을 위한 여름 별장으로서 뉴욜리언스의 폰차트레인 호수 북쪽 해안에 지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


쇠퇴 및 유산

샷건 하우스의 건설은 둔화되었고 결국 20세기 초에 중단되었다. 자동차와 가정용 에어컨이라는 두 가지 혁신 기술의 가격 부담이 내려가면서, 샷건 하우스의 주요 이점은 주택 구매자들에게 더 이상 쓸모 없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 중심의 현대적인 교외 지역이 대규모로 건설되면서, 샷건 하우스는 새 집을 짓거나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샷건 하우스가 거의 지어지지 않았지만, 단순한 단층 평면도라는 개념은 랜치 스타일 하우스에서 이어졌다.

잔존하는 도시의 샷건 하우스들은 그것들이 위치한 도심 지역이 일반적으로 겪는 문제들과 관련된 어려움들을 겪었다. 부유한 거주자들의 교외 이주, 부재 지주, 도심 거주자들을 위한 모기지(주택 담보) 대출 기관 부족 등은 20세기 중후반 샷건 하우스의 쇠퇴로 이어졌다. 여러 세대에 걸쳐 가족 내에서 상속된 복잡한 소유권 문제 또한 많은 집들이 수년간 비어 있는 원인이 되었다.

샷건 하우스는 때때로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동네에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인식됐지만, 원래는 분리된 백인 지역 주택 재고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들 동네 중 다수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주로 흑인 거주 지역이 되었지만, 다른 많은 지역은 그렇지 않았고 여전히 백인 거주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 안에 누가 살았든 간에,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80년대까지 샷건 하우스는 열악한 주택이자 빈곤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었으며, 많은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샬럿 같은 도시가 “샷건 역사 지구”를 지정하면서 더 이상 널리 퍼지지 않았다. 샷건 하우스는 독특한 도시 생활을 촉진하는 품질과 비용-효율적인 문화 자산으로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조지아 주 메이컨 같은 다른 도시에서는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해 샷건 하우스를 개조하는 실험을 했으며, 비록 철거하고 새 주택을 짓는 것이 더 저렴할지에 대한 망설임이 있었지만, 일부는 재건되었다.

남부의 오래된 미국 도시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샷건 하우스가 밀집돼 있는 큰 동네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휴스턴의 서드 워드; 뉴올리언스의 바이워터; 세인트루이스의 더 힐; 포틀랜드, 부처타운 및 루이빌의 저먼타운; 애틀랜타의 캐비지타운과 마지막 남은 25채의 샷건 하우스가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된 마이애미 코코넛 그로브의 빌리지 웨스트 등이 있다. 그것들의 역할은 남부의 역사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001년 10월에 라이스 대학교는 “샷건즈 2001”이라는 전시회를 후원했다. 이 3일간의 행사는 복원된 샷건 하우스들이 있는 지역에서 열렸으며, 이들 주택에 대한 강연과 예술적 회화 전시, 프레젠테이션 및 패널 토론 등이 포함되었다.

샷건 하우스가 주를 이루는 일부 지역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부동산 가치가 상당히 높아졌다. 때때로, 새로운 소유자가 더블 배럴 샷건 구조의 두 채를 모두 구입하여 비교적 큰 단독 주택을 만들기 위해 그것들을 결합한다. 또한 샷건 하우스는 종종 사무실이나 창고 공간으로 리노베이션하기 위해 합쳐지기도 한다.

제한된 복고

샷건 스타일의 요소들은 최근 워싱턴 D.C.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솔라 데카슬론 콘테스트에서 사용된 소형, 저밀도 구조물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일부는 현장으로 운반된 패널로 세워지지만, 그러한 많은 구조물은 여러 모듈을 현장에서 연결하는 것과 더불어 도로 운송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밀폐형 단일 또는 다중 유닛으로 구성되며, 또한 콤팩트한 선형 구조는 명확한 개인 공간보다는 다용도 “구역”을 채택하면서도 공간의 선형적인 진행을 유지한다.

2011년, 루이빌의 일간지, 《더 커리어-저널》은 저렴 주택 건설 및 리노베이션에 전념하는 지역 비영리 기관이 루이빌 남서부 개발 지역에 새로운 샷건 하우스를 짓는다고 보도했다.


대중 문화와 남부 문화

엘비스 프레슬리가 태어난 미시시피 주 투펠로의 샷건 하우스. via Wikimedia Commons

샷건 하우스는 남부의 민속과 문화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다. 미신에 따르면 유령과 영혼은 그들이 직접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샷건 하우스에 끌린다고 하며, 일부 집은 이러한 영혼들을 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일렬이 아닌) 문을 짓는다. 그것들은 종종 남부에서 생활의 편리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샷건 하우스에서 태어났고, 네빌 브라더스의 아론 네빌은 샷건 하우스에서 자랐으며, 블루스맨 데이비드 허니보이 에드워즈에 따르면 로버트 존슨은 샷건 하우스에서 사망했다. 1997년 5월 사망 직전, 제프 버클리는 멤피스에 있는 샷건 하우스를 빌렸고 그것에 너무 매료되어 소유자에게 구매 가능성을 문의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브라운의 제프와 팀 버클리에 대한 전기인 『드림 브라더』는 이 샷건 하우스에 대한 설명과 제프가 이 집을 좋아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샷건 하우스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언급 중 하나는 1980년, 토킹 헤즈의 노래 “once in a lifetime”이다. 노래의 첫 소절은 “그러다 문득 샷건 판잣집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몰라”이다.

존 멜렌캠프의 노래 “Pink Houses”는 그가 인디애나폴리스 공항으로부터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고가도로를 따라 운전할 때 영감을 받았다. 거기에는 앞마당 격인 고속도로를 따라 과속하는 차량들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는, 작은 분홍색 샷건 하우스 집 밖에 앉아 품에 고양이를 안고 있는 노년의 흑인 남자가 있다. 멜렌캠프는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손을 흔들었고, 나도 손을 흔들었다”고 말했다. “‘핑크하우스’는 그렇게 시작됐다.” 〈레킹 볼〉 앨범에 수록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We Take Care of Our Own”에서, 그는 “우리는 샷건 판잣집에서 슈퍼 돔까지, 우리 자신을 돌본다”라고 노래하면서, 샷건 하우스를 언급한다. 스프링스틴은 또한 1982년 앨범 〈네브라스카〉의 “Reason to Believe”에서, “회백색 샷건 판잣집에서, 한 노인이 세상을 떠났고, 그들은 그의 시신을 묘지로 가져가,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소절과 더불어, “샷건 판잣집”을 언급한다.


갤러리

텍사스 휴스턴 제3구역의 연립 주택 프로젝트. via Wikimedia Commons
뉴올리언스의 업타운 지역에 있는 더블 샷건 구조. 더블 샷건 하우스는 다세대 주택의 한 형태로, 기본적으로 두 채의 기존 샷건 하우스가 중앙 벽을 공유하는 형태다. via Wikimedia Commons
뉴올리언스 업타운에 위치한 클래식한 캐멀 백 샷건 하우스. via Wikimedia Commons
뉴올리언스의 샷건 하우스. via Wikimedia Commons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의 싱글 샷건 하우스. via Wikimedia Commons
노스캐롤라이나 더럼의 월타운에 있는 오리지널 샷건 하우스, 조지 월 하우스.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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