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가상화폐 #NFT

이중용 건축편집자

나는 가상화폐와 NFT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냥, 가상화폐는 블록체인 기술에서 도출한 성급한 상품이고, NFT는 가상화폐 상품에서 도출한 성급한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가상을 위한 진짜 기술
진짜 기술로 만든 진짜 화폐상품
진짜 화폐상품을 본뜬 진짜 예술상품

내가 이해하는 블록체인은 컴퓨팅 가상 환경의 영향이 지대한 현대 사회에서 컴퓨팅 가상 환경의 신뢰 유지에 도움이 되는 기술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나는 블록체인을 감자 깎는 칼로 비유해서 생각한다. 보통의 칼로도 감자를 깎을 수 있지만, 칼을 다루는 편리는 그만큼의 리스크 감수를 요구한다. 반면에 감자 깎는 칼은 동일한 상황에 대해 편리와 리스크의 모든 면에서 충분한 만족과 안전을 보장한다. 임의조작이 불가능한 데이터 원장 관리 기술로 알려진 블록체인은 임의조작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던 이전의 컴퓨팅 가상 환경에 비해 충분한 만족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술 내용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노출된 정보들을 통해, 나는 그것을 현실 세계의 주요 일부인 진짜 가상을 위한 진짜 기술로 수긍한다.

하지만 감자 깎는 칼이 충분한 만족과 안전을 보장하여 사회의 신뢰 증진에 기여한다 하더라도, 감자 깎는 칼로 깎아 만든 화폐라고 제시된 것에 화폐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왜냐하면 화폐는 필요나 욕망에 의해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사물이 아니라, 교환 가치에 대한 사람들 간 상호 인정의 바탕 위에서만 성립하는 신뢰, 라는 특수한 가상의 상징적인 대용물이기 때문이다.

대용물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담는 형태는 조개 껍데기일 수도 있었고, 금속 막대일 수도 있었고, 금괴나 은괴일 수도 있었고, 도장 찍힌 종이일 수도 있었고, 동전이나 지폐일 수도 있었고, 카드일 수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보증된 모니터 상의 숫자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상이 현실을 보완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상화폐라는 개념 또한 화폐 가치를 담는 대용물로서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부분에 관한 한 나 또한 동의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가상화폐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화폐의 대용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교환 가치에 대한 사람들 간 상호 인정이라는 사회적 관문이 남아 있다. 그 관문을 통과한 대용물만이 화폐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무의미해지겠지만, 아마도 대체로는 인정할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통상적인 화폐 사용 방식을 통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치킨이 먹고 싶어서 자기 머리카락 한 움큼을 잘라 감정적 호소 1도 없이 순수 화폐의 논리로 그것을 건내어 거래를 성립시킨 적이 있는 분이 있다면 나는 ‘좋아요’를 누르겠다. 두 번 누르겠다.)

물론 어떤 이들은 가상화폐가 이미 증시와 연동되고 있는 것이 사회적 인정을 받은 증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가상화폐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상화폐는 화폐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것 말이다. 실제 화폐는 실제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화폐 환율이 증시 상품처럼 널을 뛰면 불안해서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화폐가 불안정해지면 교환도 불안정해지고, 이어지는 불안이 증폭시키는 불신에 의해 결국 사회 자체가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가상화폐와 관련하여 자극적인 문구들이 붙은 뉴스 제목들을 자주 접하게 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일상 경제를 흔든다는 얘기는 들은 바가 없다. 달리 말하면, 특정 주식의 상승과 하락에 대해서, 투자한 일부 사람들 외에 사회 전체가 일상적으로 갖는 관심이 그렇게나 지대한지, 지대해야 하는지, 지대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ㅡ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ㅡ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상화폐가 시장경제 촉진과 연관된 주요 부분인 투자 혹은 투기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ㅡ 내 생각에는 튤립 구근 파동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지만 ㅡ 범상한 일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심각한 문제는 ‘가상화폐’라는 표기의 사용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품이 화폐 흉내를 내는 것을 사회가 방기하는 문제일 수 있다. 물론 가상화폐의 표기를 ‘가상머니’ 같은 것으로 바꾸는 순간 그것이 게임머니와 다른 점을 증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무엇이든 교환의 대용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화폐가 되고 싶었던 상품의 이야기가 남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것은 투자하고 기대를 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미 진짜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최초 약속은 상품이 아니라 화폐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달리기 시작한 경주에서 출발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투자의 최종적인 가치는 약속의 성취와 그것을 향한 노력에 대한 판단에 있는 것이므로, 관건은 투자 혹은 투기한 사람들이 그 약속의 성취를 맛볼 순간까지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약속과 그것의 과정을 보면 볼수록, 게임장을 열어 사람들을 모으고 판돈을 걸게 하여 약속이나 내용은 상관 없이 승패에만 몰입하게 만들려는 어떤 것과 비슷한 얄팍한 심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냥 상품일 뿐인데, 쓸 데 없이 화폐 문제부터 따지게 만드는 것 자체가 사회의 소통 비용을 소모시키며 자기 정당성을 포장하는 불건전한 프레이밍이라는 생각에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평소 사람들 사이에 이 이슈가 나오면 딱히 할 말이 없어진다. 사회는 그것을 화폐라고 한 적이 없고, 나 또한 그에 동의하고, 그것이 상품인 한 그에 대한 판단과 선택은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의견을 더하는 것은 가하나 당위를 따질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와 같은 연유로, NFT에 대해서도 역시 할 말이 없다. 그것은 상품이 낳은 상품이며, 진짜 상품이 될 수 있었던 상품 옆에서 자신도 진짜 상품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상품일 뿐이다. 그것이 왜 하필 예술과 접목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좀 뜬금 없지만, 나는 예술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작품의 오리지널리티 혹은 대체불가능성 정도 뿐이라면,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대체불가의 어떤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 정도가 예술의 기능이라면, 예술은 학생들의 교과서에서나 의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이 몇 달 동안 손수 깎아 만든 대체 불가능한 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디자인을 공부하던 학생이 손으로 일일이 눌러 만든 대체 불가능한 컵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자세히 보면 나의 세계는 이미 대체불가능한 사람들과 사물들과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 더해서 무언가를 건내지도 깨우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지위 인정만을 요구하는 것에 안주하는 예술이라면,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저는 예술을 졸업했어요.” (하지만 나는 나의 인생 속에 남은 예술의 과정이 더 많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NFT? 남아도는 유휴 자산이 있는 사람들이 초기 붐을 일으키기 위해 마중물을 쏟아붇고 있는 중이겠지만, 그것은 결국 가치가 상승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상화폐의 옆자리에 피라미드 게임장을 세팅하려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 또한 초기 약속 ㅡ 뭐냐? 예술이냐? ㅡ 은 잊혀지고 오직 시작과 종료 사이에 열린 투자 혹은 투기 공간의 레이스만 남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 또한 개인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일 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예술이야말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하여 떡상시키고 세탁시켜 온 분야라는 것을 사람들이 은연 중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상화폐가 가장 먼저 예술에게 껄떡대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의 번거로움은 가급적 피하는 한편 자기 가치를 부풀리기 좋은 경로를 따라서, 가상의 그것이 전진하고 있는 셈이다.


  • 작성 : 202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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